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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에너지가, 이 광적인 에너지가 도대체 어디서 생겨날까요?
저는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를 염두하지 않으면, 단 한 줄의 글도 못 써 온 걸요.
해서, 제 모든 글들은 '변형된 연서'인 걸요.
수필작품을 쓰는 게 아니라, 아직도 못다 쓴 연서를 적고 있노라고.
부디, 아름다운 꿈들 꾸세요.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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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염한 여성의 다리 꼬고 앉은 모습같지 않아요?
다음까지 안녕히 계세요.
고추밭에서(8)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고추밭 고랑에 들어서서 좌우 두 이랑 나란히 줄지어 들어선 고추나무에서(?) 홍고추를 번갈아가며 따고 있다.
혼잣말을 하게 된다.
‘우리 선조들은 정말 지혜로운 분들이셨어! ‘이랑짓기’의 이로움을 어떻게 깨치셨을까?’
나는 ‘고추밭에서(7)’에서 이랑을 가급적 높게, 고랑을 되도록 낮게 지음으로써 ‘물빠짐’을 쉬이 할 수 있는 점을 적은 바 있다. 정말 ‘이랑’의 이점이 그것 하나에서 그칠까.
미리 애독자님들께 양해를 구한다. 사실 내가 40여 년 빚어온 5,000여 편의 수필작품들. 그 작품들 가운데에서 어느 작품엔가 ‘이랑’에 관해 다루지 않았을 리가 없다. 다만, 어느새 나는, 내가 낳은 새끼들 이름들과 그 내용들도 다 기억하지 못할 뿐. 그러니 제발 애독자님들께서는 , ‘ 이 양반, 이미 적었던 이야기를 재탕, 삼탕 적고 있네.’하지 마시길.
이랑의 이점들이다. 자랑 같지만, 아래 사항들은 내 ‘깊이 생각하여 살핌’ 즉, 고찰(考察)의 산물(産物)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 토심(土深)을 깊이 해준다. 작물뿌리가 되도록 깊이 내려, 보다 많은 영양분을 실뿌리를 통해 흡수토록 도와준다. 달리 말해, 실뿌리의 활동영역을 넓혀준다. 이랑은 고구마, 감자 등한테는 그 알이 최대한 굵어질 너른 터를 만들어준다. 내 경험상, 들깨· 옥수수· 콩 따위의 작물은 이랑 짓지 않은, 땅거죽이 편편한 데에다 심어도 만판이었다. 대신, 그것들도 생육기에는 호미로 그 발치의 흙을 그러모아주면 왕성하게 자라곤 하였다. 그 작업이 바로 ‘북 주기’ 즉, ‘북돋아 주기’아닌가. 해서,‘북돋기’는 ‘간이 이랑짓기’내지 '이랑짓기 보조수단'으로 보아도 무난할 듯.
둘째, 이랑은 밭의 ‘겉넓이’를 넓혀준다. 산술적으로 따지면, ‘이랑, 고랑, 이랑, 고랑... 이랑, 고랑’으로 이뤄져 있으니, 밭 크기를 1.5배 정도는 넓혀준다고 보아야 할 듯. 고랑과 이랑의 연속이니, 주름 잡힌 밭의 거죽. 그 거죽을 다림질하듯 하면 그리 될 것이라는 나의 추측. 정말, 우리네 선조들은 그걸 어떻게 깨치셨을까?
셋째, 위 ‘둘째’의 내용과 맞물린 사항이지만, 작물 생장에 도움되는 태양의 복사열을 보다 많이 모을 수 있다. 게다가, 이랑의 모양 자체가 돋보기꼴이니... . 어린 날 내 선친은 우리한테 멍석에 내다말리던 ‘우케(벼나 보리)’에 ‘밀개’라고 하는 도구로 이랑과 고랑을 지으라고 자주 이르곤 하였다. 그러면 참말로 우케가 빨리 마르곤 하였다. 이는 밭에다 이랑과 고랑을 번갈아 지어야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끝으로, 이랑을 띠 모양으로 지음으로써, 토양학에서 말하는 ‘낱알구조[土粒構造]’보다 ‘떼알구조[粒團構造;crumbled structure]’의 유용함과도 맞물려 있다. 즉, 토양 알갱이 하나하나는 그다지 의미가 없지만, 그것들 입자가 멀칭비닐의 도움으로 띠로 묶여 그룹을 이뤘을 적에는 생산성을 드높인다는 이론.
일찍이 우리네 선조들은 해마다 밭을 갈되, 수고롭게 매번 이랑짓기를 하였다. 하여간, 이랑짓기는 대단한 농사기술임에는 틀림없다.
내가 ‘고추밭에서(7)’에서 소개했던 ‘혜옥 씨’의 언어유희를 상기(想起)한다.
그녀가 말했다.
“(과장님), ‘당연’한 걸 ‘태연’하게 말씀하시네요.”
정말로, 이랑짓기는 ‘당연한’ 농사기법. 그 이점을 나처럼 속속들이 파고들지 않더라도, ‘태연하게’, 힘들더라도 태연하게 봄마다 거듭거듭 해야 하는 작업이다.
랑데부 작품 읽기)
‘물곬을 치고’
http://yoongt57.tistory.com/341
작가의 말)
나의 글에 늘 충고 아끼지 않는, 내가 새롭게 찾은 뮤즈.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수필작가이니, 함께 수필문학의 완성을 향해 공부해나가길 바란다. 해서, 나의 의도를 군데군데 주기(朱記)해 두었다. 금세 그는 알아차릴 듯.
그가 이번 글에 관해서는 또 어떤 ‘꼬집기’를 해올지 두렵기도 하고, 은근히 그 ‘꼬집기’가 기다려지기도 한다.
* 이 글은 본인의 티스토리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