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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24)수필/음악 이야기 2014. 5. 25. 21:02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24)
- 30년간 고용되었던 작곡가-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그는 마차 수레바퀴 제조공 아버지와 요리사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12남매 가운데 둘째 아들이었다. 그의 양친은 음악을 좋아했을 뿐, 내가 그의 친가와 외가를 살펴본즉, 음악적 유전자를 쉽게 찾을 수는 없었다. 그는 키가 작고 땅딸막한 몸매를 지녔고, 유머 감각이 뛰어난 이로 알려져 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파파’라고 불렀다. 그는 소년시절 합창단의 일원으로 지냈으나, 변성기에 이르러 방출(放出)된다. 악단의 단장한테 가벼운 농담을 하여 미움을 산 것이 결정적 이유였다는 말도 있고, 같은 단원의 뒷머리카락을 장난스레 잘라서 쫓겨났다는 말도 있다. 그것이 오히려 그가 팔자를 고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단다. 그는 흘러흘러 거리의 악사들과 지내기도 하다가, 헝가리의 ‘안톤 에스테르하지 후작’ 저택에 들어가게 된다. 그는 그 댁 3대에 걸쳐 30년간 고용된 음악가였다. 안톤 에스테르 후작 가정은 속된 말로, ‘삐까뻔쩍한’ 저택을 가지고 있었으며, 재력이 있어 그에게 넉넉한 월급도 주었다. 그래도 그렇지! 나는 25년 동안 같은 직장에 근무했음에도 지겨워서 도저히 견디기 힘들어, 누가 쫓아내지도 않는데도 제 발로 걸어 나왔거늘… . 그의 온화하고 참을성 있는 성품을 엿볼 수 있는 점이다. 당시 음악계의 풍조상, 고용주의 기호에 맞는 곡을 작곡하고 연주하는 게 일반적 흐름이었다. 그의 고용주였던 ‘안톤 에스테르하지 후작’ 집안은 음악에 조예가 있었으며, 음악 애호가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였다. 그는 그 후작 저택에서 20여 명의 빼어난 음악인들을 거느리는 악장으로 지냈다. 그러다가 그 댁에서 경제적 이유로 3대를 거친 후 악단을 해체하게 되면서 비로소 그는 자유로운 몸이 된다. 그는 퇴직금과 연금을 톡톡히 챙겼다. 금전적 쪼들림이 없어졌다. 그는 그 길로 해외 음악여행을 떠나게 된다. 바로 영국행이 그것이었다. 그가 대체 누굴까? 바로 프란츠 조셉 하이든(Franz Joseph Haydn, 오스트리아, 1732~1809년)이다.
이제 그의 생애와 음악세계에 관해 스케치해보도록 하겠다. 그는 27세 가량 되었을 적에 연상의 아가씨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때가 ‘안톤 에스테르하지 후작’댁에서 악장으로 지내던 시절이다. 그의 아내는 ‘안나 알로이지아’다. 가발제조업자의 딸로서 ‘왈가닥’으로 소문나 있다. 그녀는 교만하고 기가 세고 시샘이 많으며 음악적 교양도 전혀 없었다고 한다. 틈만 나면 남편한테 바가지를 긁어대는 악처였다고 한다. 그러했음에도 그 나라 오스트리아의 당시 법은 이혼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니, 하이든이 겪었을 결혼생활은 비참했다고 할밖에. 내가 여러 자료를 뒤져 보았으나, 그의 여성편력 흔적은 쉽게 찾아볼 수는 없었다. 그때가 1790년으로 그가 58세가 되던 해다. 그는 농민출신이었던 관계로, 가난에 익숙하였던 것 같다. 헨델처럼 이벤트를 하여 떼돈을 벌려고 덤벼 들지도 않았으며, 세바스찬 바흐처럼 경건하게 교회에서 교회음악만을 적은 것도 아닌 것 같다. 오로지 봉급쟁이 음악인으로 만족해 했던 것 같다. 다시 말하지만, 30년간 어느 특정 저택에서만 살았으니… . 그러했던 하이든. 나는 그가 퇴직과 동시에 그 연금으로 해외여행을 떠났다고 위에서 이미 적었다. 영국 런던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흥행가인 ‘잘로몬’의 권유로 이루이진 영국여행이다. 1794년 그가 62세가 되던 해에 영국으로 비로소 첫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의 명성은 이미 런던에까지 퍼져 있었다. 그는 런던여행을 하는 동안 무려 6곡의 교향곡을 적게 된다. 그 교향곡들을 일컬어, 음악회 매니저인 ‘잘로몬’의 이름을 따서 ‘잘로몬 교향곡’이라고 부른다. 그는 그 영국여행 중에 영국의 국가에서 감명을 받아, 당시 오스트리아 황제였던 ‘프란츠 황제’를 칭송하는 5중주곡 <<황제의 노래(Kaiser)>>를 작곡하게 된다. 그 곡은 2차대전까지 오스트리아의 국가가 되었다. 그 <<황제의 노래>> 멜로디는 지금도 독일의 국가로 쓰인다니… . 근 재차 영국을 여행하였고, 도 많은 곡들을 그곳에서 적었다고 한다.
하이든은 같은 나라인 오스트리아 출신의 어린 베토벤을 지도편달한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다. 베토벤은 그를 영접하기 위해 비엔나(빈)에서 작품 한 곡을 적어 기다리고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하이든은 자기보다 무려 24살이나 어린 모차르트와도 친구로 지내면서, 그에게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도 한다. 그가 당시 사람들로부터 ‘파파’ 라는 애칭으로 불려진 게 다 그처럼 점잔은 어른이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늙어갈수록, 일을 할수록 더 건강해졌다고 한다. 그는 77세 일기로 세상을 뜨기까지 10개의 교향곡, 84개의 4중주곡, 4개의 오라토리오, 34개의 오페라 등을 적었다. 그를 일컬어 ‘근대교향곡의 아버지’, ‘근대4중주곡의 아버지’ 등으로 부른 이유를 알 것 같다. 나는 그가 소나타 형식과 심포니 형식을 완성하였기에 그러한 별칭을 얻은 것으로 알고 지낸다. 그의 국제적 명망은 대단해서, 나폴레옹 군대가 비엔나 점령시에도 그 사령관은 하이든의 저택 근처에 특별 경비대를 배치해서 그를 보호했다니… .
어느 음악평론가는 하이든의 업적을 크게 둘로 표현한다. 하나는 오케스트라 발전에 전력을 쏟은 점이며, 또 하나는 그때까지만 하여도 종교적 이유로 금기시하였던 민속음악이란 미개척분야를 최초로 발견하여 발전시킨 점이라고 한다. 사실 그 음악평론가는, 하이든이 크로아티아 농민의 아들이었던 관계로, 민속음악을 남달리 발견하였을 거라고 보태기까지 하였다.
자, 이제 음악전문기자도 아닌 내가 농부 수필가답게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로 이 글을 마무리 짓는 게 예의인 듯싶다. 누구 말마따나 ‘내가 해 봐서 아는데’,그는 30년 동안이나 한 회사에서 아니, 한 집에서 어떻게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인내심도 대단하다. 나는 25년도 힘들어 죽겠던데 말이다. 나한테는 그의 훌륭한 음악세계를 헐뜯을만한 비평능력도 없다. 그렇지만 그가 아무리 생계를 위해 고용 음악인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고는 하나, 진작에 그러한 직장생활(?)을 버리고 자유로운 몸이 되었더라면, 더 훌륭하고 폭 넓은 음악세계를 펼칠 수도 있었으리라는 아쉬움만은 금할 길 없다. 사실 그 당시는 음악인들이 모두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참고적으로, 하이든보다 38년 후에 세상에 온 베토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독자적으로 작품을 출판하여 돈벌이(?)를 할 수 있게 되었단다. 달리 말해,베토벤은 배짱이 틀려 최초로 자력으로 작품 출판을 한 작곡가다. 베토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구이도 다레초(Guido d’Arezzo, 이탈리아 아레초, 990~1050)’의 덕분이란다. 구이도는 이른바 ‘실용적 기보법’을 고안해 낸 이다. 쉽게 말해, 악보를 고안해낸 이다. 베토벤은 그 ‘구이도의 손’이란 악보를 십분 활용한 작곡가다. 거슬러, 하이든은 자신의 작품을 출판함으로써 돈벌이를 할 생각을 할 줄 몰랐던 작곡가다. 요컨대, 그 점이 내가 아쉽다는 말이다.
(다음 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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