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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28)수필/음악 이야기 2014. 12. 3. 14:50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28)
‐ 부침(浮沈)을 거듭했던 작곡가-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한마디로, 부제(副題)에도 밝혔듯, 그는 ‘부침을 거듭했던 작곡가’다. 그를 생각하자니, 문득 우리 헌법 제 21조가 떠오른다. 거기에 ‘표현의 자유’에 관한 사항이 담겨 있다. ‘모든 국민은 언론, 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국적이 아니었던 그는, 살아생전 그러한 표현의 자유를 만끽하지 못하였다. 사실 우리 쪽 예술가들인들 과연 얼마나 풍족하게 표현의 자유를 누렸던가만... . 특히, 일제하에서나 군사독재시절하에서 많은 예술가들이 핍박받았지 않은가.
그는 1906년 공산주의 국가, 구소련에서 태어났다. 그는 ‘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출신인 어머니로부터 피아노 기초를 익힌 후, 11세 어린 나이에 글랴세르의 음악원에 들어가 정규 음악 공부를 하게 된다. 그리고는 러시아 혁명 이후인 1919년에 15세 나이로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한다. 그는 그의 어머니와 동창생인 셈이다. 그랬던 그가 19세가 되던 1925년에 그 음악학교를 졸업하게 되면서, 졸업작품으로 <<교향곡 1번>>을 출품(?)한다. 그 곡으로 서구 사회를 포함한 온 세계를 놀라게 한다. 해서, 그를 두고 ‘현대의 모차르트’ 또는 ‘소련이 낳은 최초의 천재’ 등의 별명까지 붙이게 된다. 이쯤 해두고, 그가 누구인지 소상히 밝히는 게 독자님들께 예의인 듯하다. 그가 바로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mitry Shostakovich, 1906~1975)다.
그의 예술가로서 부침, 즉 ‘천당 갔다가 지옥 갔다가’는 시작되었다. 그가 작곡가로 활동을 시작하던 무렵부터 구소련에서는 예술 분야에서도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 운동이 한창이었다. ‘문예정풍운동’이 그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1934년에 발표한 오페라 <<맥베스의 부인>>이 정부 당국으로부터 시쳇말로 딱 걸리고 말았다. 그 내용 가운데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성적 표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그 작품은 서방세계에 크게 알려졌지만, 공산당 예술운동에 역행된다고 씹히게 된 것이다. 즉, ‘포로노포니’라고 하면서.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는 이러한 기사가 실리게 된다.
‘ 서구적 퇴폐성을 띤 형식주의자의 불협화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몇 몇 작곡가와 달리, 체제에 순응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몇 몇 작곡가란, ‘스트라빈스키’와 ‘프로코피에프’를 대표로 하는 음악인들이다. 이들 양인은 정부가 하는 짓거리가 더럽고 아니꼽다고 여기며 서방으로 망명하였다. 하여튼, 그는 저항 대신 순응을 택한다. 나아가서, 명예를 회복코자 애쓰게 된다. 그래서 만들어 낸 것이 <<제5교향곡>>이다. 정부당국이 그 작품에다 ‘혁명’이란 부제를 붙였으나, 정작 그는 ‘진혼곡 ’이란 부제를 붙였다. 단지, 정부에 대한 저항의식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당시 독일로부터 전쟁에서 패한 상황을 그렇게 부제로 붙였다는데... . 그는 그 작품 초연시 정부가 들으라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소비에트 예술가의 답변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가 군사독재시절에 처해 있을 적에 그 <<제5교향곡>>이 금지곡이었다는 점. 대학가 등지에서 ‘혁명’이란 부제가 붙은 그 곡을 반정부 성향이 짙은 곡이라고 그렇게 금지했다니! 당시 한국의 정치상황도 돌이켜보니, 구소련 못지않게 우스꽝스럽기만 하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40년에 <<피아노5중주곡>>으로, 음악인한테는 최고 영예로 알려진 ‘스탈린상’을 수상하게 된다. 1942년에도 그는 <<제7교향곡>>으로 다시 스탈린상을 받게 된다. 그의 음악가로서 삶 가운데 ‘浮의 시기’였다. 그러나 대전 후인 1945년에 발표한 <<제9교향곡>>이 또 문제가 되었다. 그 경묘(輕妙)한 내용과 신고전적인 작풍(作風)으로 말미암아, 스탈린의 최측근이자 문화담당인 ‘지다노프’로부터 맹비난을 받게 된 것이다. 이를 두고 현대 음악평론가들은 ‘지다노프 비판’이라고 한다. 지다노프는 이렇게 비판했다.
“타락한 유럽 부르주아지의 형식주의 추종이다.”
사실 그는 33세가 되던 1939년에 레닌그라드 음악원 교수로 부임했는데, 그것이 교수로 재직 중에 발표한 곡이라서, 42세가 되던 해에 지다노프 비판으로 말미암아 교수직에서도 사임하게 이른다. 이 시기가 그의 ‘沈의 시기’였다. 그러나 그는 43세가 되던 1940년에 오라토리오 <<숲의 노래>>와, 1951년에 합창 모음곡 <<10의 시(詩)>>로 다시 인기를 회복하고 또다시 스탈인상을 받게 된다. 이처럼 그는 부침을 거듭했던 작곡가다. 그는 위대한 작곡가이기도 하였지만,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하여, 1927년에는 ‘쇼팽 국제 콩쿠르’에서 2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사후(死後) 그의 아들이자 지휘자인 ‘막심 소스타코비치’는 서방세계로 망명하여 ‘쇼스타코비치의 증언’이란 폭로성 출판물을 통해, 서방 세계에 아버지 음악가가 정부로부터 핍박받았던 사실을 폭로하여 물의를 일으킨 바도 있다. 참말로, 위 몇 사례만을 통해서도 그는 부침을 거듭했던 작곡가임에 틀림없다. 온탕(溫湯)과 냉탕(冷湯)에 번갈아가며 몸을 담갔던 이,천당과 지옥을 왔다갔다 한 이.
쇼스타코비치의 그 많은 명곡 등에 관해서는 더 이상 독자님들께 시시콜콜 소개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너무들 잘 아실 테니까. 굳이 나더러 한 곡만 추천하라면, 그가 1938년에 적은 ‘재즈 모음곡 2번(왈츠 2)’를 들까 보다. 그가 서방세계의 재즈 악단이 국내에 들어와 연주회를 갖자, 재즈에 매료된다. 그래서 재즈와 왈츠가 혼합된 그 곡을 적게 된다. 러시아의 우수가 담긴 동시에 흥겨운 춤이 곁들여진 춤곡이다.
이제 다시 엄연한 수필작가로 돌아온 나. 그는 정작 ‘모더니스트’였으면서도, 인민에게 음악으로 봉사할 것만을 요구하는 정부에 대해 저항하지는 않았다. 장르는 다르지만 마찬가지로 예술을 하는 내가 그 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나더러 ‘참여문학’을 하라면, 기관원 면전에서 그대로 받아쓰기를 할 수 있을까? 사실 문학을 아니 했으면 아니 했지, 그렇게는 못 할 것 같다. 또, 나더러 ‘저항문학’만을 하라는 이가 있다면 어떻게 할까? 그 짓도 용기가 없어 차마 못할 것 같다. 이러한 나의 마음가짐을 생각하자니, 쇼스타코비치가 겪었을 내면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알고도 남을 것 같다. 그가 공산주의 정부한테 그저 “네. 네.” 한 것 같지는 않다. 속으로 삭이며, 작품활동에 몰두했던 이였음에 틀림없다. 그 많은 예술가들이 핍박을 피해,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하려고 조국을 버리고 서방세계로 망명을 떠나는 등 하였지만, 그는 끝끝내 자기 조국에 남아 있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문둥이 같은 나라일지라도, 자기를 낳아준 조국이니... . 어쩌면 그러한 조국애로 인하여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더욱 빛을 발하는지도 모르겠다. 민족주의가 면면히 흐르는 그 많은 명작들. 그러기에 그들 러시아인들이 ‘현대의 모차르트’ 니 ‘소련이 낳은 최초의 천재’ 라니 하며 자랑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성싶다.
끝으로, 그가 살아생전 내뱉은 말의 참뜻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옮기는 것으로 이 글을 맺기로 한다.
“이데올로기 없는 음악은 있을 수 없다.”
(다음 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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