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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120) - ‘딜레탕트(Dilettante) 음악인들’-수필/음악 이야기 2023. 1. 7. 15:20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120 )
- ‘딜레탕트(Dilettante) 음악인들’-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위 부제에서 말하는 ‘딜레탕트(Dilettante)’는 ‘즐긴다’라는 뜻을 지닌 이탈리아어다. ‘미술, 문예 등을 즐기는 비직업적 애호가’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호사가(好事家)’로 다소 깎아내려 말할 적에도 쓴다.
19세기 후반인 1800년대에 러시아 음악계에는 ‘딜레탕트(Dilettante)음악인들 5인'이 있었으니... . 그들은 다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노느니 염불’ 혹은 ‘노느니 장독이라도 깬다’로 작곡을 한 이들이다. 그들 멤버들 가운데에서 화학자였던‘보로딘(1833~1887)’은 본인을,‘일요일의 작곡가’로 말하기도 하였다. 당시 음악평론가였던 ‘브라디미르 스타소프’는, 그들 멤버들 가운데에서 막내둥이인 ‘림스키코르사코프(1844~1908)’가 해외여행에서 영감을 얻어 적은 <세르비아 주제에 의한 환상곡> 연주회를 보고 평론을 적었다.
‘(이젠 우리도) 러시아 태생의 ‘강력한 소수’를 갖게 되었다.’
사실 그 평론가의 말이 그들 ‘러시아 5인조’의 명칭과(?) 관련이 있다. 그들 ‘러시아 5인조’는 ‘한 줌에 지나지 않은 (너희) 다섯 명이 어디 잘해보렴!’의 냉소적 의미도 깔려있다는 것을. 그들도 그 별명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는 나의 이 시리즈물 제 96화와 겹쳐지는 점이다. 나는 그 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상략)사실 당시 ‘르로아’라는 미술평론가는,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보고서, 그들 실험적 화가들을 조롱하면서, ‘인상주의자 같은 이들’이라고 칭하면서 생겨난 문예사조라는데... 어쨌든, 내가 며칠 동안 드뷔시를 공부하다가 낚아챈 사실이다. 모네의 <<인상: 해돋이>>란 작품에 드뷔시가 <달빛>이란 곡으로 화답한(?) 것은 아닐까 하고서. 사실 내가 이 글의 완성도를 한층 높이고자, 모네의 그 그림을 감상해본즉, 과연 드뷔시의 <달빛>도 모네의 <<인상: 해돋이>>와 너무도 닮아 있음을 느끼게 했다. 모네는 해돋이이되, 결코 강렬한 빛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드뷔시는 달빛이되, 요요한 달빛이 아니라 으스름 달빛이었다. 둘 다 은은하기만 하였다.(하략)>
이따가 이들 ‘러시아 5인조’ 인물들을 하나하나 소개하면서 따로 밝히겠지만, 그들 멤버 가운데에서 ‘무조륵스키(1839~1881)’의 관현악 모음곡인 < 전람회의 그림>은, 후일 프랑스 인상파 작곡가인 ‘드뷔시’한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게 음악계 중론이다. 이처럼 예술은 장르의 벽까지 뛰어넘어 상호작용한다는 것을.
지금부터는 그들 ‘러시아 5인조’가 탄생한 역사적 배경이다. 당시 러시아는 ‘음악 아카데미’도 없었고, 고관대작들은 음악을 그저 여흥 정도로 여겼던 모양. 그러다보니, 전문 음악인도 없었다. 그들과 동시대를 살았던 차이콥스키(1840~1893)는 서구 음악에 이미 맛들여져(?) 있었고... . 음악적 재능을 가진 이들조차도 ‘로망’은 고급 장교 등 전문직업인이 되는 정도. 그러한 분위기 가운데에서 깨인 음악인 하나가 있었다. 그가 바로 ‘미하일 글린카(1804~1857)’. 그는 부유한 귀족 가문 출신. 그의 할머니는 손주를 과잉보호하여 방안에 가두어 늘 섭씨 25도의 방안 온도에서 지내야만 하였다. 그가 듣는 소리는 교회종소리와 집 앞을 오가는 농부들의 노랫소리. 아이러니하게도, 그 불협화음이 서유럽 협화음의 고정관념에서 탈피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러시아 국민음악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그는 러시아 민족의 고유한 음악어법을 설파했다. 그는 ‘러시아 5인조’가 결성되기 전에, 후일 그 조직의 리더가 되는‘발라키레프(1837~1910)’한테 미리 충고한다.
‘러시아 민족음악이 나아가야 방향은 바로 이거요. ‘막강한 소수’를 난 원하오.’
그의 소망은 위에서 이미 말한, 음악평론가‘브라디미르 스타소프’의 ‘강력한 소수’와 맥을 같이 한다.
미하일 글린카의 오페라 가운데에서 < 루슬란과 류드밀라>의 서곡은 요즘도 아주 자주 연주된다. 내 신실한 애독자들께서도 그 곡을 들으면, “아하, 이거로구나!”금세 아실 곡.
미하일 글린카의 의도를 온 몸으로 깨달은 발라키레프. 그는 실천하게 이른다.
지금부터는 그들 나이와 상관없이 ‘러시아 5인조’에 가담한 순서대로 적고자 한다.
1) 발라키레프(1847~1910)
그는 수학 전공자였다. 그러함에도 그는 전문적인 음악인이었다. 5인조 지도자였다. 관현악곡과 가곡을 작곡하였다. 15세에 자신이 작곡한 곡으로, 지방 관현악단에서 연주를 하였다. 1856년 ‘ 큐이’를 만나면서 ‘5인조’결성이 시작되었다. 그를 포함해서 ‘큐이’, ‘무조륵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보로딘’. 그는 혁신적 음악사업을 이끌었다. 독특한 음악어법과 기교를 개발하여, 큐이, 림스키, 보로딘 등의 작곡을 지도하였다. 심지어, 차이코프스키한테도 자기 음악어법을 강요하고, 자기네 그룹에 들어올 것을 강요하다시피했다. 그들 멤버들의 초기작품에 간섭하여 폭군처럼 굴었으나, 러시아의 관현악과 서정가곡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정력적이었다. 박학다식한 사람이었으며 날카로운 비판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교향시 < 타마라 여왕>은 무려 15년 만에 완성한 역작이다. 주제선율을 전개시키는 기법과 섬세한 리듬으로, 드뷔시와 라벨한테 큰 영향을 끼쳤다.
2) 무조륵스키(1839~1881)
그도 음악과 전혀 관련 없는,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다.
그는 내가 너무도 좋아하는 <전람회의 그림>을 작곡한 이다. 그는 절친했던 건축가 겸 화가인 ‘ 빅토르 하르트만’이 젊은 나이에, 동맥파열로 요절하자, 충격을 받았다. 그의 유작 전시회에 갔다가, 10점의 유작들 전시회를 보면서, 그 그림들을 음악으로 ‘바꿔치기’한 작품들. 관현악 모음곡이다. 회화를 선율로 그처럼 바꿔치기하다니! 자기가 친구의 한 작품, 한 작품을 감상하면서 옮겨가는 발걸음을 형상화한 ‘프롬나드(Promenade;산책, 거닐다)’ 4개 삽입 악곡은(?) 퍽이나 이채롭다. 그래서일까, 그 작품이 발표된 1874년 이후 16년 지난 다음, 프랑스의 드뷔시(1862~1918)는, 28세가 되던 해인 1890년에 <달빛>을 작곡하였다. 인상주의 음악으로 일컬어지는 그 <달빛>, 회화적인 그 작품. 실은, 무조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이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 게 음악계 중론이다. 후일 ‘모리스 라벨’이 관현악 편곡 연주 버전이 애연된다.
무조륵스키, 그는 살아생전 러시아밖에 나가본 적도 없다. 피아노 레슨 선생님인 어머니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져, 28세 때부터 알콜 중독자가 되고, 위 친구인 화가의 죽음으로 더욱 괴로워했던 음악인. 그의 생전 실물사진을 보면, 콧등이 빨간, 알콜 중독자 모습 그대로다. 그는 42세 젊은 나이에 갔다. 정신병으로 갔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의 교향시 < (성 요한의) 민둥산의 하룻밤>도 유명하다.
그는 음악적 재능은 있었으나, 당시 러시아 사회 분위기상 정상적인 음악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다만, 군 복무시절 알게 된, 같은 연대 군의관이었이었고, 후일 같은 멤버가 된, ‘보로딘1833~1887)’으로부터 틈틈 작곡 수업을 받았을을 뿐. 그러니 그도 한낱 ‘딜레탕트(Dilettante)음악인’이었음에도... .
3) 림스키코르사코프(1844~1908)
미리 이 작곡가에 관해 말하겠는데, 나는 그의 <세헤레자데>를 너무도 좋아한다. 4악장으로 되어 있는 그 작품. 나는 그 가운데에서도 제 3악장 ‘ 젊은 왕자와 젊은 왕비’는 들을수록 매료된다. 그 연주속도로 따져, 세상에서 가장 난곡(難曲)으로 알려진 ‘왕벌의 비행’도 흥미롭고. 사실 그 ‘왕벌의 비행’은 그의 오페라, <술탄황제의 이야기> 제 2막 제 1장에 나오는 관현악곡. 현대에 이르러, 크로아티아 출신 ‘클로스 오버 피아니스트’인 ‘막심 므라비차’가 그 연주속도 경쟁면에서 으뜸이다.
림스키코르사코프, 그도 여타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딜레탕트 음악인’이었다. 집안 내림으로(?) 해군학교생도였다. 그는 해군학교와 원양 향해 경험을 토대로, 바다와 호수의 모습을 음악으로 형상화하였다. 그는 러시아의 민담, 문학, 역사에서 음악적 소재를 취해 많은 오페라와 관현악을 작곡하였다. 또한, 장소나 분위기를 관현악으로 묘사하는 기술에 능했다. 서구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 러시아 음악을 만들려고 애쓴 작곡가다. 평생 상트페레르부르크 음악원에서 작곡과 관현악을 두 세대에 걸쳐 가르친 교수. 따라서, 러시아 음악 전체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곡가이다. 그의 오페라 <눈 아가씨>와 <금계>도 유명.
그는 오랜 항해 끝에, 동양적 색채를 가미한 작품들을 많이도 빚었다. 그의 ‘5인조 멤버’로서 역할 가운데에서는, 130곡 정도의 러시아 민요를 수집한 일, 동료들 곡을 편곡을 자주 해주었다는 점 등.
4) 보로딘((1833~1887)
사실 이 연작물 제 120화는 그이 덕분에 적게 되었다. 그 실마리를 잡고, ‘쏠쏠’ 누에고치에서 실오라기 잡아당기다가 이 글 형상화가 되었다. 이 무슨 이야기? 그의 ‘현악사중주곡 제 2곡 제 3악장 녹턴, 안단테’는 감미롭기 그지없다. 그는 현악사중주곡 1번과 현악사중주곡 제 2번을 적었다는데... . 이 현악사중주곡 제 2번에는 이러한 사연이 있었을 줄이야! 독일로 유학을 떠났던 그. 그는 그곳에서 아리따운 여류 피아니스트와 열애에 빠진다. 둘은 결혼하게 된다. 그녀의 실물사진도 너무도 매력적이다. 그러함에도, 그녀는 한평생 폐결핵으로 골골. 결혼 20주년을 맞아, 보로딘은 아내한테 ‘현악사중주곡 제 2곡’을 지어 헌정한다. 그 3악장은 너무도 애연되는 곡.
보로딘은 구 소비에트 연방 ‘조지아’의 왕자와 그를 간호하던 여군의관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그는 아버지 호적에도 못 오르고, 아버지 농로였던 ‘보르딘’한테 입양되어,‘보로딘’이란 성을 얻게 된다. 그러했음에도, 그는 너무도 총명하였다. 의과대학 교수도 되었고, 화학자도 되었으며, ‘보로딘 반응’이란 유명한 이론도 발표한 이다. 그런 그가 음악에, 특히 첼로 연주에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였으니... . 위에서 이미 살짝 언급했지만, 그는 쉴 틈을 이용하여 취미삼아 작곡한다고 하면서, 스스로 ‘일요일의 작곡가’라고 하였다는 거 아닌가. 나중에 가서는 격무에 시달려 무도회에서 쓰려져 숨을 거두었지만...
그의 명언이다.
‘나는 선천적인 서정시인이며 교향곡 작곡가다. 나는 교향곡이라는 양식에 깊이 매료되어 있다.’
‘ 음악활동이 누군가에게는 직업이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휴식과 휴양이다.’
5) 큐이( 1835~1918)
그는 과학자 겸 군인. 군인으로서 후배들 양성에 힘썼다. 육군 공병학교 축성(築城) 전문가였다. 그는 음악가로서보다도는 평론가로. 국민악파의 우수성을 국내외 알린 이.
본디, 그의 부친은 프랑스군 사관.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 침공시 탈영한 군인. 그의 부친은 그곳에서 폴란드어 교사로 지냈다. 그의 부친은 리투아니아 여성과 결혼하여 그를 낳았다.
그는 공병학교 교수로 지냈다. 음악과는 관련 없는 듯 보이는 직업. 그는 설계학의 대가였다. 그는 상트레르부르크 공병학교에서 교수 재직 중 틈틈이 음악 공부를 하였다. 그의 음악은 프랑스 양식과 쇼팽 계보를 잇는, 러시아 민족성보다 프랑스계 살롱 분위기였다.
이제, 이 글 총정리할 차례. 나는 어느 아파트 초소에서, 어제 진종일 휴대전화기를 조작하여 ‘러시아 5인’을 공부하였다. 숨겨진 이야기 얼마나 많겠는가. 우선, ‘러시아 5인’에 관해, 나의 애독자들께, 내 안부를 겸해 이렇듯 소식 전한다.
작가의 말)
'전문적'이라는 게 때로는 틀에 갇히는 일. 기본도 제대로 아니 된 듯한 이들한테서 새로운 세계가 열리곤 하였어요.
내 모자라는 부분, 님들께서 채워 읽어주시길.
다만, 내 ‘새롭게 얻은 뮤즈’께서는 한 푼 에누리 없이 ‘윤쌤’ 글 에러를 더듬어 주시어야겠지요?
단숨에, 반술이 되어 이 정도 쓰면 되었지 않아요?
엄포.
아니면, 그대마저도 ‘선수교체’ 또 할 거니까.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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