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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Gee,G)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나는 지금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를 듣고 있다. 바이올린의 여러 스트링(string) 가운데 ‘G’만 이용한 연주곡이기에 그렇게 이름 붙여졌다고 들었다. 한편, 나는 저녁 무렵 미리 한 움큼 베어 온 정구지(부추)를 다듬고 물에 씻어 물을 삔 다음, 반쯤 남은 고추장통에 우겨넣어 숟가락,젓가락으로 버무린다. 이른바, 지를 담그는 것이다. 너무 무리한 힘으로 버무리면 풋내가 나서 영 작품을 버린다는 거 모를 리 없다. 곧 정구지는 숨을 거둘 것이다. 자신의 체액을, 고추장에 녹아 있는 소금기로 인해 빼앗길 것이다. 생물학에서 익힌 삼투압과 역삼투압이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저장액(低張液)인 정구지의 맛깔나는 체액은 고장액(高張液)인 고추장으로 빠져나가 일체(一體)를 이루는 일. 모든 김치 담그기의 원리는 이처럼 삼투압으로 설명함이 옳다. 며칠 지나면 정구지는 온전한 지가 되어 내 입맛을 돋굴 것이고. 사실 고급 식당의 일류요리사는 대개가 여인네가 아닌 남정네들이다. 그리고 요리에 관해서만은, 여인네 수필가가 아닌 남정네 수필가가 이렇듯 적어대야 어울리며 맛깔 날 거라고 믿게 된다. 우리끼리만 하는 이야기인데, 내 아내가 담근 김치류보다는 내가 손수 담근 열무김치 등이 더 맛 있다. 해서, 그가 딴에는 정성껏 담갔다고 생각하며 내 농막 냉장고에 몰래 갖다다 놓은 김치를 꺼내먹는 예는 드물다. 나는 신신당부한다. 꼭히 남편한테 김치를 갖다다 줄 요량이면, 시장에서 열무 한 단만 사다 놓든지 하라고. 내가 손수 담그는 김치와 아내가 담그는 김치의 결정적 차이점은, 그 국물 양[量]의 많고 적음에 있다. 요컨대, 그가 담근 김치는 빠듯한데 비해 내가 담근 김치는 국물이 많다. 역시 김치는 국물 맛. 채소들의 체액이 여지없이 삼투압에 의해 밖으로 빠져 나와야 쓴다. 그리하여 열무나 배추와 혼연일체를 이루어야 한다. 오죽 했으면, ‘떡 줄 이는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말까지 생겨 나왔겠냐고?
며칠 먹고 지낼 정구지지를 이렇게 간단히 담근 후, 혼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막걸리를 한 대포 부어 마신다. 안주는 엊그제 담가서 거의 다 먹고 난 배추김치. 김칫국만 남았는데, 그 국물을 숟가락으로 떠서 안주 삼는다.
‘음, 이 맛!’
내일은 시장에 가서 기어이 열무 한 단을 사 와야겠다고 벼른다. 이제 새로 뿌린 열무는 앞으로 얼마간 시간이 지나야만 자랄 테니까. 여름날엔 그저 열무김치가 최고다.
지(Gee,G)를 말할 것 같으면, 불가(佛家)에서 이르는 세 종류의 동음이자(同音異字)도 아니 떠올릴 수가 없다. ‘智’는 반야를 일컫는다. ‘止’는 불교수행법을 나타낸다. ‘地’는 불교의 세계관 또는 우주관에서 유정(有情)이 머무는 곳을 뜻한다. 이러한 동음이자의 ‘지’ 앞에다 온갖 채소 이름들을 갖다다 부치기만 하면, 맛있는 저장음식이 된다. 정구지지,오이지,더덕지… 고추지,들깻잎지 등. 채소 뿐만 아니라 오징어 등 생선도 지를 담그게 된다.참말로, 그 어느 한 가지도 지를 못 담그는 게 없을 지경이다. 이야말로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인 셈이다. 지는 소금에 절여 발효시킨 음식의 대명사로, 경북과 전라도의 방언으로 소개되고 있다. 유사어로는 김치,짠지,장아찌 등이 있기는 하지만, 지라고 불러야 제 맛이 날 때가 있다.
아무래도 ‘단무지’가 대표적인 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중화요리집에 가기만 하면 거의 어김없이 식탁에 오르고, 김밥집에 가기만 하면 어김없이 비닐봉지에 묶어주는 반찬. 사실 이 단무지는 세 개의 낱말이 어우러져 한 낱말이 되었다고 한다. ‘달다[甘]’, ‘무’, ‘지[←’淸(절이다)’에서 온 말임.]가 그것들이란다. 풀이하면,‘달콤한 무로 절인 지’가 된다는 것이다. 한때는 ‘노란무짠지’라고도 불었다는데, 1950년대에 이르러서야 ‘단무지’로 순화된 표현을 쓰기 시작하였단다. 사실 여부는 뒤로 미루어 두자. 에도 시대(1600~1867)년 초기 일본의 다쿠앙(澤庵淸; 1573~1646)란 스님이 고안해낸 발효음식이라고들 한다. 그러기에 우리네 예전 어른들은 그분의 이름을 따서 ‘다꾸앙’ 또는 ‘다꽝’ 또는 ‘다꾸안’이라고 곧잘 불렀다. 단무지를 담그는 핵심기술(?)은, 쌀겨와 소금을 섞은 이른바 ‘살겨소금’에 무를 절인다는 것 아닌가. 쌀겨가 지닌 단백질이 무에 녹아 들어 감칠맛을 더한다고 한다. 사실 다쿠앙 스님 이전에 현재 전라도인 백제의 유민들이 ‘울외지(‘울외’라는 오이로 담근 지)’를 일본에 전해줬다는 설도 있다. 그들은 그걸 일컬어 ‘나나츠케’라고 하는가 보다.
우리네 고유한 ‘지’인 김치가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일본과 중국은 뒤늦게 김치산업에 뛰어들어 숫제 김치전쟁을 벌이는 형국인데, 실제로는 나라마다 시대마다 ‘절임음식’은 있어 왔다고 한다. 서양의 피클(pickle), 일본의 다꾸앙쓰케모노(澤庵淸物), 중국의 ‘쑤안차이(酸菜)’와 ‘파오차이(泡菜)’ 등. 내 오랜 자취생활 경험에 비춰, 어떠한 절임음식이든 소금의 질과 양이 핵심기술이었다. 거기다가 제법 넉넉한 양의 양념을 더하면, 맛은 나게 마련이었다. 나는 사반세기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식당 음식에 맛들여져, 흔히들 말하는 화학조미료에도 그야말로 인이 박여 조미료가 아니 든 음식은 제 맛을 모르는 게 사실이다. 그러함에도 아내는 남편의 건강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60평생의 입맛을 생억지로 고치려 드니… . 내가 늘 볼멘소리를 한다. “이 댁은 언제고 고객 중심이 아니고 주인 중심이란 말이야!” 하고서. 절임음식의 기술 가운데 또 빠뜨릴 수 없는 게 있다. 바로 내 손이 내 딸이라는 거. 자기 자신이 자기 입에 맞도록 간을 맞추고 양념을 친 음식이 맛 없을 리 없지 않은가. 그러한 이유 하나만으로도 나는 다른 음식은 몰라도, 김치만큼은 남의 집 김치에 함부로 젓가락을 대는 적이 없다. 군내가 나는 경우가 허다했으니까. 이를 바꾸어 이야기하자면, 요즘 부인들 대개가 김치 하나도 제대로 못 담근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내가 여기까지 먹는 음식에 관해 구질구질 이야기한 듯한데, 강렬한 이야기를 하고 이 글 맺도록 하련다. 세상천지 지를 담그지 못하는 음식 재료는 거의 없다. 그러한데, 그러한데… 젊은 날 내 사랑도 지를 담가두었더라면, 아니 옛 애인의 살내음조차도 소금 삼아 양념 삼아 지를 담가두었더라면… . 그 점이 내내 아쉬울 따름이다. 지,지,지,지,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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