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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꾸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우리네 세시풍속(歲時風俗) 가운데 ‘풋꾸’라는 게 있었다. 대략 음력으로 칠월 중순께가 되면, 논매기가 만물 내지 ‘만도리’였다. 본디 벼농사는 노동집약적인 농사라서, 모내기부터 시작하여 논매기까지 두레에 의해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해온 터. 대체로, 칠월 보름인 백중(百中)에 이르면, 벼농사에 한시름을 놓을 수 있게 된다. 여러 종류의 매미 가운데 쓰르라미가 ‘쉬렴쉬렴쉬렴’ 울어댈 때이기도 하다. 온 마을 사람들이 술과 떡을 집집이 빚어 한 자리에 모아 놓고, 그늘에서 머슴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며 진종일 질탕하게 노는 행사를 ‘풋꾸 먹는다’고 하였다.
풋꾸, 내 고향 경북 청송에서 즐겨 쓰던 말이다. ‘풋굿’에서 온 말임을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 어원을 거슬러 찾아 올라가다가 보니, ‘(잡초를 다 제거한 후) 풀밭에서 한바탕 굿행사 같이 놀기’에서 비롯된 말임을 알 수 있었다. 지역에 따라서는 다채로운 동의어로 쓰인다. ‘호미씻이’ · ’호미씻기’·’호미걸이’ 등으로도 부른다. 분신인양 늘 쥐고 지내던 호미를 드디어 씻어 광에다 걸어둘 때가 되었다는 의미다. 우리네 문헌상 ‘호미씻이’는 ‘세서연(洗鋤宴)’ 또는 ‘세서회(洗鋤會)’로 소개되어 있는데, ‘호미씻이’의 한자식 표현일 따름이다. 풋꾸의 동의어 가운데는 꼼비기·질먹기·장원례(壯元禮) 등도 있다. 다시 말하거니와, 풋꾸는 백중 전후에 먹게 되는 까닭에, 저 아랫녘 밀양에서는 ‘백중놀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이른바 ‘밀양백중놀이’는 매년 음력 칠월 보름날에 행하며, 중요 무형문화재 제 68호로 지정되어 있다.
풋꾸에 관해서는 얼추 소개한 듯하다. 그러한 세시풍속이 주인네들 자신들이 아닌, 머슴들을 위한 ‘베풂’ 즉 ‘한 턱 냄’이었다는 걸 주목하게 된다. 특히 그 해 농사가 잘 된 집에서는 크게 내어 놓고, 자기네 머슴을 추켜세웠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사실 주력 농업이었던 벼농사는 꽤나 힘들고 지루한 공정을 거쳐야만 하였다. 한 톨의 쌀을 얻기까지 무려 88회의 공정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러기에 쌀을 일컬어 ‘米’라고 썼다지 않은가. ‘米’를 파자(破字)하면, 놀랍게도 거꾸로 선 ‘八’과 ‘十’과 바로 선 ‘八’로 되어 있으니까.
그러했던 풋꾸의 진정한 의미는 어느새 희미해져 갔다. 벼농사도 이앙기, 콤바인, 트랙터, 로터리 등의 기계의 출현과, 각종 병충 예방약 등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생력화(省力化)된 덕분이다. 그러한 추세에 머슴이 사라졌으니… . 사실 머슴이 사라진 것은, 도회지에 공장이 날로 들어섰고 수입이 머슴 새경보다 나았던 탓도 있지만, 위에 소개했듯 각종 기계와 병충 예방약 보급 탓이 더 크다고 생각된다. 그래도 풋꾸는 그 명칭과는 상관없이 어떤 형태로든 남아 있다. 한여름날 이곳 남천면 송백1리에서도 온 동민들이 하루 날을 잡아 마을회관에 모여 질탕하게 먹고 마시는 날이 있으니까.
사실 모든 농사가 예전 같잖다. 호미나 낫을 들고 다니는 농부들도 거의 없다. 대신, 제초제 약통을 메거나 예초기(刈草機)를 메고 들에 나서는 편이다. 이젠 벼농사만 하더라도 그렇게 힘든 게 아니다. 나는 농사 가운데 가장 손쉬운 농사가 벼농사라는 걸 지난 해에 이어 올해도 실감하고 있다. 관리기로 논둑 짓고, 트랙터로 논 썰고, 사온 기계모판의 모를 이앙기로 심는 것으로 끝났다. 뒷날 피사리, 즉 피를 뽑는 일도 할 필요가 없다. 병충방제를 할 필요도 없다. 피사리, 병충방제 등은 모를 내기 전 모판에다 이미 입제약(粒製藥)을 쏠쏠 흩여 뿌림으로써 끝낼 수 있었다. 도열병, 멸구 등도 그렇듯 한방에 예방할 수가 있었으니까. 사실 무논에 1차,2차 우윳빛 제초제를 뿌렸던 덕분으로 첫물 매기,두물매기… 만물매기 등의 논매기도 할 필요가 없다. 가을에 가서 콤바인만 논바닥에 들여놓고 포대에 벼를 담기만 하면 된다. ‘나락(벼) 농사만큼 쉬운 농사가 없다.’고들 하던 말을 내가 2년차 벼농사를 지으면서 새삼 실감하게 된다.
풋꾸, 이제 내 기억 속으로 아슴프레 사라져간 말이다. 실로, 벼농사도 예전 같잖다. 일손이 그다지 달리지도 않는다. 기껏 두 세 명이 손발을 맞추면, 들판 전체를 하루만에 모내기 끝낼 수 있을 지경이다. 예전에는 모내기 때 얼마나 바쁘고 일손이 또 얼마나 필요했으면 그러한 말이 생겨 났을까? 내 양친은 입버릇처럼, ‘모내기 때는 송장 손이라도 빌려 쓰고 싶다’ 하였다. 나는 그렇게 힘들이지 않고도 거뜬히 600여 평 논 농사를 하고 있다. 올해부터는 내 벼농사 협력자들 둘을 모셔다가 함께 원두막에서 풋꾸를 먹을까 보다. 크게 한 턱 내어놓아야겠다. 나는 그들한테 그냥 “한잔 합시다.” 하지 말고, 굳이 추억이 서린 말로 청해야겠다.
“우리 풋꾸 먹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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