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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추리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아침 저녁 지나다니는, 경산시 지정 등산로 ‘선의산(仙義山)’을 향한 산길 길섶에 원추리꽃이 무리 지어 소담스레 피었다. 7월이 되기까지는 내가 그 존재를 까맣게 잊고 지냈으나, 이 한여름에 온갖 잡초들 서리에서 꽃대를 빼 올려 주황색 꽃을 당당하게 피웠다. 사실 내 농장 앞밭에는 여러 종류의 백합이 심겨 있고, 해마다 늦은 봄부터 이맘때까지 종류별로 다양한 색깔, 갖가지 모양의 꽃을 차례차례 피우고 이울곤 한다. 새삼스럽지만, 그렇듯 가꾸어진 서양 백합만이 아름다운 꽃이 아니다. 이맘때가 되면, 백합 같이 생긴 원추리꽃이 외려 더 귀히 여겨지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원추리는 우리의 산야(山野)에 지천인데, 이른 봄날 여느 산초(山草)에 비해 일찍 새잎을 내어 놓는 편이다. 내 어머니와 내 손위 누이들은 그 어린 잎을 ‘넘나물’이라 하며 산나물로 더러는 뜯어오긴 하였지만, 그리 탐탁하게 여긴 것 같지는 않았다. 살짝 데치면 산나물이 된다고는 하였지만. 원추리는 봄날이 가고 나면, 후즐그레한 잎 등으로 이내 잊혀지는 야생식물이다. 사실 잡초들 서리에 그 여린 잎들이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함에도 7,8월이면 어김없이 꽃대를 빼 올려 자긍심으로 꽃을 피운다. 다시 말하거니와, 원추리꽃은 화단에 키우는 고급스런 백합 못지 않게 아름답다. 사실 그 꽃의 생김새가 백합 같아서 식물분류학상 백합과(百合科)에 속하는가 보다. 실제로는 원추리가 그 꽃 모양은 백합 같으나, 백합처럼 알뿌리[球根]를 지니지는 않는다. 하여간, 원추리는 자칫 지나쳐버리기 쉬운 우리네 야생화다. 많은 이들이 이와 같이 생각을 하여 왔을 것이다.
그러한 원추리가 팔자를 뜯어고친(?) 일이 생겨났다. 우리나라 자생종은 학명상 ‘호메로칼리스 코리아나, 나카이(Homeroscallis coreana,Nakai)’ 인데, ‘코리아나’는 ‘한국’을 나타내며 ‘나카이’는 일본의 식물학자가 명명했음을 나타낸다. 그런 ‘원추리’가 졸지에 ‘데이 릴리(day lily)’란 영어식 이름을 갖고 신분이 바뀌게 된 것이다. 1930년대, 안목 있는(?) 미국인들이 한국 야생 원추리를 관상가치가 높다고 여기며 반출하여 육종 개량하였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육종 개량한 원추리를 다시 들여와 외래종인양 귀히 여기며 우리네 화단에 심고 있다지 않은가. 사실 국가간 종자싸움은 치열하다. 하나의 실례(實例)다. 내가 알고 지내며 평소 존경해 마지 않고 내 애독자이기도 한, 세계적인 콩 박사 정규화 박사. 그분은 전남대 여수캠퍼스에 재직 중이고, 미국 ‘일리노이 주 국립 대두(大豆) 연구소’에서도 근무한 바 있다. 그분은 우리네 야생 돌콩이 전세계 모든 메주콩[大豆]의 원조인데, 그 종자를 미국에 빼앗기고 다시금 우리가 비싼 대가를 지불하며 수입하고 있는 사정을 몹시 안타까워 한다. 다시 원추리 이야기로 돌아간다. 우리네가 그저 산야에 지천이라 관심을 크게 두지 않았던 원추리가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화훼로 거듭 태어났다는 것만 하여도 참으로 자랑스럽다. 원추리야말로 어느 국악인의 광고 멘트, “우리 것은 참 좋은 것이여!”에 딱 어울린다.
원추리, 떠오르는 이가 하나 있다. 한 때 내 문학적 동반자였던 어느 연상(年上)의 여류 수필가는, ‘훤’이라는 이름을 입에 달고 지냈다. 그 ‘훤’이라는 분은 서울의 어느 유명한 정신과 개업의였다. 그 여류 수필가의 오랜 친구였으며 정신적, 물질적 후원자였단다. 아쉽게도, 나는 그 ‘훤’ 선생을 직접 만날 기회는 없었으나, 그 인자함 등은 익히 알고 지냈다. 그랬던 ‘훤’ 선생은 무슨 이유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오스트레일리아로 홀연히 이민을 가고 말았다. 꼭히 그 이유만은 아니었겠으나, 내 문학적 동반자와 나의 관계도 그 이후 소원(疏遠)해졌다. 하지만, 나는 그 ‘훤’이, 바로 ‘萱(훤)’임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萱’은 ‘원추리’를 일컫는다. 일찍이 중국인들은 원추리를 ‘훤화(萱花)’라고 불렀으며, ‘망우초(忘憂草; 근심을 잊게 하는 풀)’라고도 불렀음을 알고 지냈다. 내 문학적 동반자한테 ‘훤’ 선생은 온갖 근심을 잊게 하는 ‘망우초’였음이 분명하다. 그 꽃말이 ‘기다리는 마음’ 이다. 그 여류 수필가가 이국에 사는 ‘훤’ 선생을 향한 마음에 딱 어울릴 듯하다. 뒤늦게나마 그들 양인(兩人)한테 한 시대를 풍미하고픈 이 예술가는 안부 전한다. 이 소식이 저 오스트레일리아에까지 전해지기를… .
이제 나는 원추리에 관한 각종 자료를 토대로, 다른 이야기도 펼쳐보고자 한다. 원추리의 말린 잎과 말린 꽃을 중국인들은 ‘황화채(黃花菜)’라고 부른단다. 그 재료를 다른 음식에 넣거나 고명으로 쓴다고 한다. 일화는 제법 많다. 명나라 이시진이 적은 <<本草綱目>>에는 ‘원추리꽃을 삶아 먹으면 오장육부가 편하게 되고 몸이 가벼워지며 눈을 밝게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근심을 잊게 하여 마음을 즐겁게 한다.’고 되어 있다. 숙종 때 실학자 홍만선(洪萬選)이 적은 <<山林經濟>>에는 ‘원추리의 꽃술을 따내고 깨끗한 물에 한소끔 끓여내어 초를 쳐서 먹는다.’고 적고 있다. <<詩經>>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고대에 어느 부인은 남편이 원정을 나가자, 집안의 북쪽 건물에 훤초의 종자를 심었는데, 그 꽃을 바라보며 시름을 달랠 수 있었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은 ‘망우초’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 다른 일화. 진(辰) 나라 말기 농민 봉기의 우두머리 진승(陳勝)이 봉기하기 전에 너무 가난하고 몸도 병에 걸려 온몸에 부종이 생겨 났다. 마음씨 좋은 황씨(黃氏) 성을 가진 어떤 노부인이 훤초를 끓여 갖다 주었다. 그걸 먹은 진승은 부종이 낫고 몸이 튼튼해져 온갖 걱정 다 잊게 되었다. 훗날 그는 오광(吳廣)과 함께 농민을 조직하여 봉기하였고, 역사상 최초의 농민 영수가 되었다. 후일 그는 황씨 여인의 온정에 감사하며, 그녀를 자기 집안에 불러 들여 살게 하였으며,훤초를 ‘망우초’라 불렀다. 이밖에도 원추리와 관련된 일화는 많지만, 나의 애독자들님께서도 게으름 피우지 말고, 궁금한 부분 찾아서 지식을 보태시기를… .
이제 내 이야기 슬슬 정리할 단계다. 요컨대, 우리가 대수롭잖게 여겨 왔던 존재가 대단히 빛을 발휘할 때가 있다는 거. 원추리도 그 한 예에 해당한다. 미국으로 우리네 원종(原種)이 건너가서 ‘데일 릴리’라는 고급 화훼로 거듭 태어났다는 것만 하여도 설명은 충분하겠다. 소중한 것은 언제고 소중한 것인데,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나는 한 때 한평생 문학 동반자이길 바랐던 그분 연상의 여류 수필가와, 그분의 절친한 친구라는 ‘훤’을 동시에 잃고 말았다. 내 소홀함에서 비롯된 일이다. 정말로 내 탓이다. 나는 이 미흡한 글로나마 그분들께 화해 아닌 화해를 청한다. 이 말을 덧붙여야겠다.
‘원추리 겹꽃은 독이 있어서 먹어서는 아니 되고, 홑꽃은 먹되 그 가운데 노란 원추리는 특히 ‘금훤(金萱)’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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