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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떤 보람(2)
    수필/신작 2014. 9. 13. 05:55

                             어떤 보람(2)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우선,이 글은 어떤 보람(1)의 후속작임을 밝혀둔다. 그러기에 지난 번 제 3()에 이어 제 4화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둘레의 사람들한테 좋든 나쁘든 영향을 끼치고,또 그들로부터 마찬가지로 좋든 나쁘든 영향을 입게 된다. 진심어린 충고 한 마디가 그의 운명을 확 바꾸어 놓은 사례가 있다면, 얼마나 보람된 일인가. 나한테도 그러한 사례가 더러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이르셨다. 불가(佛家)에서는 적선(積善) 을 가르친다. 한편, 항간에서도 생색(生色)내지 말라고들 하기도 한다. 음덕양보(陰德陽報)라는 말도 있긴 하다. 그래도 문득, 그들이 보고 싶다. 그들은 다들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나의 충고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팔자를 확 뜯어고친(?) 이들. 나는 그들이 참으로 고맙다. 그러기에 그들에 관한 추억을 몇 소개코자 한다.

    4. 쓰레기를 잘 줍던 청년

    우선, 그를 소개하기 전에 우리들 이야기부터 들려드려야겠다. 사실 우리 열 남매는 유년시절부터 이날 이때까지 부지런을 떠는 데는 선수다.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내 선친은 살아생전 성정(性情)이 불 같았으며,부지런하기 그지 없었다. 당신의 자녀들이 게으름을 피우는 걸 그냥 보고는 지나치지 못했다. 여름날 새벽에도 잠방이를 함뿍 이슬에 적시고, 깜장고무신에 물을 잔뜩 담은 채 마구간 소의 까래풀(깔개풀)을 한 짐 베오기 일쑤였다. 어머니는 초,,고 학생들인 우리들을 깨워댔다.

    야들아, 느그(너희) 어른 오실 때 다 되었대이. 얼른 일어나서 느그 어른 지게지고 고샅에 들어서실 때까지라도 꿈적대거래이.

    어머니의 충고를 받아들여, 우리는 눈을 비비며 멀쩡한 마당을 새삼 싸리비로 싹싹 쓸어대기까지 하였다. 그러면 잔뜩 벼르고 들어서던 내 선친은 묵묵히 넘어가곤 하였다. 다시 생각해보아도 내 어머니는 지혜로웠던 것 같다. 사실 군대생활 3년 동안에도 나는 그러한 지혜를 고참들한테 보임으로써 군기를 비교적 덜 잡혔다. 가령, 싸리비를 손수 만들어 말짱한 연병장을 쓴다든가, 낫을 새파랗게 갈아 언덕의 잡초를 벤다든가 하면서.

     이제 미루어두었던 그의 이야기를 펼쳐야겠다. 내가 영양전화국 총무과 차석(次席)으로 지낼 때에 만났던 그. 그는 겨우내 보일러실 보조요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김충렬이란 청년. 사실 내가 그의 근태(勤怠)를 관리하며 그의 출근부를 결재하곤 하였다. 그는 고작 삼동(三冬)에 용돈벌이밖에 아니 되는 그 일을 하였다. 그런데도 그렇게 부지런하고 그렇게 인사성이 밝을 수가 없었다. 그 무엇보다도 기특한 것이,사옥(社屋) 둘레에 떨어진 휴지며 담배꽁초 등을 보이는 족족 주워대던 점이다.

    나는 그의 태도가 너무 이뻐서 넌지시 물어보았다.

    충렬씨, 도대체 왜 그렇게 부지런해요? 집의 어르신은 무엇 하시는 분이시기에 .

    그랬더니, 그가 나직하게 대답했다.

    윤대리님, 저를 너무 이쁘게 봐 주시어 늘 고맙습니다. 저희 집은 ㅇㅇ신문 지국을 하는데요, 국민학교 다닐 적부터 아버지를 도와 신문배달을 해 왔거든요.

    그러면 그렇지!  쓰레기 줍기 등이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 부러 하는 짓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해동(解凍)이 되자, 그는 아르바이트생활을 접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어떤 묘수를 읽고서 그에게 조언 아끼지 않았다. 더도 덜도 말고, 내가 짜주는 시나리오 대로만 인사 드린 후 나한테 그 결과를 보고하라고(?) 했다.

    국장님(과장님), 그 동안 거두어 주시어 고맙습니다. 혹시라도 기회 생기면 절 다시 불러주세요.

    그는 착하게시리 내가 짜 준 시나리오 대로 그분들께 인사를 드렸으며, 나한테 그렇게 하였노라고 곧바로 말했다.

    때마침,방호실(경비실) 기능직 직원이 사내공채(社內公採)에 합격하여 일반직으로 전환함으로써 결원이 생겼고, 채용권이 국장한테 있던 시절이었다. 그에게 호기(好機)였다. 한편, 나는 이리저리 재고 달고 고민하는 국장과 과장을, 그가 쓰레기를 잘 줍는 점을 들어 쉬이 설득할 수가 있었다. 명색이 인사 담당이기도 하였던 나. 발언권이 영 없지는 않았다.

    그는 방호실 기능직으로 선발되었다. 후일 방호실 업무를 용역회사에 맡기게 되면서, 그는 자연스레 일반직으로 전환되어 전화 가설요원이 되었다. 그러다가 내가 그곳을 뜬 이후, 그는 직제 개편의 도움으로 대리까지 승진하여 인근 도시로 전출을 간 점과 결혼하여 아이도 얻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짜 준 시나리오 대로 한 자 한 획도 고치지 않고 달달 외워서 국장과 과장께 작별인사를 드렸던 그.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하며 사는지? 아직도 전화국에서 근무하는지? 문득 그립다. 

    5. 자기의 배필을 만났다고 떠벌리던 청년

    그는 나의 중학교 후배이자 입학 기준으로 대학 후배이자 졸업 기준으로 대학 동기이다. 내가 군대 제대를 한 후 1학년 2학기로 복학을 하자, 강의실 복도에서 키가 나직한 이가 다가와서 넙죽 절을 했다.

    형요, 고향이 청송이라면서요? 나는 청송군 파천면 병부리가 고향이시더. 형은 초막골이 고향이라면서요? 고등학교는 안동에서 나왔니더만... .

    그는 경제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하였고, 키가 작아 군대 징집면제를 받았다고 하였다. 참으로 학구적인 청년이었다. 대학 중앙도서관 열람실에 눌러 살다시피 한, 눈곱 대롱대롱하던 도서관학파(?)였다. 그에 비해, 나는 언제고 낭만적인 예술가 기질의 복학생이었으며, 대학 중앙도서관 앞 벤치에 책가방을 베고 누워 자던 헤롱헤롱 막걸리학파(?)였다. 그러나 둘은 피차일반 청주(淸州)에서 졸업식이 아닌 실업식을 함께 하고 낙향하고 말았다. 나는 남이 버려둔 산속 농가에 은둔 아닌 은둔을 하고 말았고, 그는 생전에 낙방이라는 걸 처음으로 경험했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둘은 실업 동기생이라며 물가에서 낮술을 마셔대며 껄껄 웃어대기도 하였다. 나는 뜻하지 않은 고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해 사경에 헤맸건만, 그는 문병도 오지 않았다. 2개월 여 입원 후 퇴원했을 적에 그는 그제서야 나를 방문했다. 그의 손에는 꽃다발 대신 입사원서가 들려 있었다.

    형요, 우리 함께 한국전기통신공사[KT의 전신(前身)] 시험 한번 봅시더. 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올해 첫 기수로 뽑는다는데요.

    둘은 300:1 경쟁의 시험을 함께 보게 되었다. 과목은 영어와 상식 두 과목. 시험을 친 후 둘은 두 과목 전체 문항에 관해 해답을 토의했다. 문제 해결도 어금버금인 것 같았다. 천운(天運)으로 붙으면 둘 다 붙을 이고, 떨어지면 둘 다 떨어질 거라고 서로 말했다. 그런데 웬걸 막걸리학파인 내가 되고, 도서관학파였던 그가 떨어졌지 뭔가. 군대 가산점 5점이 그렇게 클 줄이야! 아니, 징집면제 감산점(?) 과목당 5점이 그에게 치명타였던 셈이다.
     
    나는 고향 청송의 청송전화국에 근무하게 되고, 그는 충격을 받은데다가 자존심까지 상해서인지 부산의 지방공무원 9급 시험에 합격하여 해운대구청에 근무하게 이르렀다. 사실 그가 그대로 공무원으로 근무했더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는데… . 그는 그 이듬해 제 2한국전기통신공사 초급사원 공채에 기어이 합격하였고, 내가 근무하던 바로 그 전화국의 옆 부서 총무과에 발령되었다. 그는 그 이듬해 시험과목에 영어,상식 외에도 경제원론이 추가되어 자기 전공과목인 경제학(경제원론)을 만점 받음으로써 군대 가산점 5점 손해분을 만회했기에 합격 가능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

    둘은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 선후배가 나란히 황소 판 돈으로 지냈던캠퍼스가 아닌 돈 버는 직장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봄날, 5일장이 서던 날 점심시간에 전화국 앞 장터에 나갔다가 돌아온 그. 나한테 마구 보챘다.

    근택이형, 오늘 나는 천상배필 아가씨를 장터에서 보았어요. 그 아가씨 뒷조사 해 주이소.

    그가 하도 졸라대기에, 나한테 입사원서를 들고 왔던 정의(情誼)를 생각해서라도 그의 요구를 받아들일밖에. 알고 본즉, 내 고향 마을 집안의 질녀 뻘이었다. 윤양은 여고를 갓 졸업하고 교육청에 임시직으로 들어가 있었다. 하루는 윤양이 자기 부친이자 내 먼 집안형님인 분과 달기약수터에 가고 있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뒤쫓아가서 통사정을 하였다.

    ㅇㅇ야, 이 아재(아저씨) 청 하나만 들어 주게. 그 사람 단 한번만 만나주게. 그 사람 말이다. 머리가 아주 명석해. 형제들 네 분 다 공직에 근무하거든. 그 집 형제들 키가 작은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 내가 이처럼 좋은 직장에 들어온 것도 사실 그 사람 덕분인 걸!

    윤양은 이 아재비 체면 때문에 그를 만나주었다고 한다. 그랬는데, 그가 어떻게 구워 삶았는지(?) 앳된 윤양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당시 받았던 봉급 두어 달치를 윤양을 위해 한꺼번에 쏟아 부었을 정도면, 시골 아가씨가 시쳇말로 퍽석 엎어졌을 게 아닌가.

    나는 그 후배한테 전화할 적이면, 그의 아내이자 내 집안 질녀인 그녀,선영이 엄마 안부를 꼭 챙기곤 한다. 그는 후일 KT 본사로 가서 중책을 맡게 되었고, 지금도 건재하다. 그는 내가 중매를 한, 첫 번째 경우다. 그는 나한테 일자리 곧, 은수저를 선물했고, 나는 그에게 이쁜 색시를 맺어준 셈이다.

    6. 자취(自炊) 동기였던 그와 중학교 같은 반에 있었던 그녀

    내가 첫 발령지 고향 청송의 전화국에서 근무할 때 있었던 일. 초년생인 나는 공중전화에서 수거한 동전을 과초금 또는 초과금이라고 하며, 자전거 짐실이에다 싣고 우체국으로 매일 가져가는 일도 하였다. 그날은 자전거 페달을 신나게 밟고 가다가 어느 가게 앞에서 눈에 익은 아가씨를 하나 마주치게 되었다.

    자네 심희자 아닌가? 아마 친정에 온 모양이지? 자네 신랑은?

    그랬더니, 그도 반갑게 인사했다.

    ,남녀 공학반 2학년 4 20번 윤근택? 그런데 나 아직 미혼이야!

    사실 그녀는 43번으로 시작되는 여학생들 가운데 45번이었으며, 공부도 꽤나 잘 했고,참으로 유순한 아이였다. 그랬던 그녀를 나이 스물 아홉이 될 때까지 꿰차고(?) 간 놈이 없다니! 마음 같아서는 내가 그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그녀한테 결혼하자고 조르고는 싶었으나, 이미 나는 지금의 아내와 동거를 하고 있었으며, 동거녀 뱃속에 내 큰딸아이가 이미 자라고 있었으니 .

    그녀는 꽤나 다급한 모양이었다. 체면 같은 거 알 바 없다며, 나더러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해달라고 대뜸 말했다. 숫제, 보채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잠시 둘러보아도 떠오르는 이가 그리 많지 않았다.

    나는 그저 인사치레 정도로 말을 뱉고 말았다.

    친구야, 실제로 딱 마음에 드는 멋쟁이 청년이 하나 있긴 한데, 아직 미취업 상태라 .

    나는 그녀의 연락처를 메모해서 주머니에 넣고는 작별인사를 하고 내 볼일이 급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무실에 돌아온 나는 곧바로 그 친구한테 전화를 걸었다.

    광호 친구, 잘 지내시는가? 내 중학교 2학년 때 같은 반 아가씬데 말이야!

    그는 참고하겠다며, 그녀의 연락처만 알려달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내 살이에 몰두하느라 양인(兩人)에 관해 까맣게 잊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청첩장을 한 통 받게 되었다. 신랑 김광호,신부 심희자가 신랑의 고향인 충북 제천 어느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내용이었다.

    여기까지 미루어 두었지만, 그에 관해서도 독자님들께 조금 소개함이 옳겠다. 그는 대학 학과 동기생이다. 구렛나루가 멋있고, 곱슬머리이고 키가 훤칠한 청년이었다. 그는 클래식 기타연주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그는 고지식한 점 전혀 없지 않았는데, 좋게 말하면 곧이곧대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사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의 가정형편이 나의 그것보다도 못했다. 그는 내 자취방에 들어 얹혀 살다시피 했다. 당시 나는 시골 양친의 형편을 고려하여, 학교에서 꽤나 떨어진 허름한 시골집에 자취방을 구하고, 지게로 나무를 해다 때며,내 선친이 즐겨 피우던 값싼 환희 담배를 피우며 지내고 있었다. 그의 반찬솜씨도 나의 솜씨에 못 미쳤다. 하지만, 비슷한 처지의 그를 나는 무척 좋아하였다. 나는 그러했던 그에게 교수님들의 마음을 움직여 전액 장학금을 받는 방법도 알려준 적 있는데, 그 덕분에 내가 전액 장학금을 한 두 차례 놓친 적도 있다. 그는 나와 달리, 당시만 하여도 취업을 못한 상태였다. 그런 그가 무슨 용기로 세종대왕 왕비, 소헌왕후의 후손인 청송 덕천 심씨 가문의 심희자 낭자한테 그렇게 대시(dash)를 할 수 있었던 건지 도무지 아직도 알 수 없다. 아무튼, 내 남 없이 남정네들은 여자 덕을 많이 본다. 여성의 힘은 대단한 것 같다. 그가 내 중학교 동기인 심희자를 알게 되면서, 철도청 공무원에도 합격하였고,이어 의료보험조합(현 국민건강보험)에도 합격하는 등 경사가 겹쳐 결혼에까지 골인하게 되었으니 .

    문득, 그들 내외가 그립다. 그들의 딸 소연이를 시집 보냈는지? 그의처가가 있는 내 고향 청송엔 자주 다녀 가는지?  사실 위 단락에서는 내 대학학과 동기생의 초라했던 모습을 그린 것 같아, 그에게 다소 미안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나의 모습이기도 하였으니, 혹 이 글을 우연히라도 읽게 되더라도 이해해주리라 믿어 마지 않는다.

    내가 중매한 제 2호의 커플. 그들 가정에 축복이, 행운이 함께 하길 . 사실 살아생전 중매 3건 성공이면, 천당 간다고 했는데, 아직 나는 1건을 마저 채우지 못했다.

     

    (다음 호 계속)

     

    창작후기)

     

    이렇듯 두 편의 연재물을 적고 보니, 나 자신이 아주 대단한 인물 같이 비쳐질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나도 친구의 충고 등으로 인생이 훽 바뀐 사례가 많다. 나는 인복(人福)이 대단히 많은 사람이다. 다음 호엔 그 이야기 중심으로 적어보련다.

    참고적으로, 나의 첫 수필집 <<독도로 가는 길>>당구장에 다녀와서라는 글에 유사 내용 이미 있다.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한국디지털도서관 본인의 서재,

    한국디지털도서관 윤근택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본인의 카페 이슬아지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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