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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보람(3)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우선,이 글은 ‘어떤 보람(1)’,’어떤 보람(2)’의 후속작임을 밝혀둔다. 그러기에 지난 번 제 7화(話)에 이어 제 8화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어떤 보람(2)’ 말미(末尾)에다 ‘창작후기’라면서 독자님들께 이미 다음과 같이 밝혔음을 상기해 주었으면 한다.
‘이렇듯 두 편의 연재물을 적고 보니, 나 자신이 아주 대단한 인물 같이 비쳐질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나도 친구의 충고 등으로 인생이 홱 바뀐 사례가 많다. 나는 인복(人福)이 대단히 많은 사람이다. 다음 호엔 그 이야기 중심으로 적어보련다.
참고적으로, 나의 첫 수필집 <<독도로 가는 길>>에 ‘당구장에 다녀와서’라는 글에 유사 내용 이미 있다.’
약속한 대로 이번엔 내가 남의 충고를 곧이곧대로 들어 팔자를 고치거나, 인생진로가 확 바뀐 사례 중심으로 이야기 꾸려가겠다.
8. 거름지고 친구 따라 장에 갔던 청년
나와 그는 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또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 내내 같은 반이었다. 그러다가 나는 대구 소재 인문계 고등학교 문과반에, 그는 고향 청송 소재 인문계 고등학교 문과반에 각각 다니게 되었다. 둘 다 파평 윤씨이며 항렬상 내가 아재비다. 둘은 거랑(개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았다. 내가 ‘초막골(금곡2리)’, 그가 ‘굿바들(금곡3리)’.
국민학교 6학년 때는 중학교 입학시험(우리가 마지막 중학교 입학시험 세대였다.)을 앞두고, 경쟁을 부추겼다. 3학급 담임 선생님들간에도 경쟁이 치열했다. 6학년 2반이었던 우리들. 과외수업이라며 담임 선생님은 거의 매일 도회지로부터 학습지를 사다가 우리들한테 이른바 모의고사를 치도록 하고, 그 석차에 따라 좌석 순서를 정했다. 이제금 생각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얼마나 비교육적인지 모르는데, 일선 교사들이 그것을 버젓이 행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정원 관계상 거의 전원이 읍내 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할 판이었는데… . 나는 70여 명이었던 학급에서 4등 정도를 하였고, 그는 7등 정도 하였다. 나는 국어 과목만은 학급에서 1등이었고, 그는 역사 과목만은 학급에서 1등이었다. 그가 역사적인 사실을 좔좔 꿸 때면, 담임선생님도 놀랄 정도였다.
중학교 2학년 시절, 나와 그는 5학급 중 유일한 남녀공학반 4반이었고,책상짝이었다. 내가 19번 그가 20번. 물론 내가 그보다 매번 성적이 좋았다. 그러나 나한테는 치명적 약점이 있었다. 수학 성적이 참말로 형편 없었으니까. 아직도 인수분해를 못한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세칭 따라지 고등학교이긴 하였지만, 반에서 2등을 하거나 600여 명 전체에서 19등을 하거나 하였다. 단, 국·영·수 세 과목만을 시험 보게 되면, 성적은 내리 곤두박질 하였다. 수학이 꽝이었던 관계로. 반면, 그는 한 학급짜리 시골 고등학교에서 3년 내리 1등을 했다. 그는 전과목 골고루 잘 하는 편이었다. 특히 수학 실력이 나보다 월등히 좋았다. 막상 객지에서 쓸쓸하기만 하였던 나.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그와 편지 주고받기를 하였다.
그러다가 대학입학시험 시절이 되자, 서로 연락을 끊었다. 당시는 요즘의 수능 시험에 맞먹는 예비고사가 있었고, 대학별 본고사가 따로 있었다. 물론 그도 나처럼 예비고사에야 무사히 통과했겠지만, 어느 대학에 시험을 쳤는지 합격은 했는지 등에 관해 물어볼 처지가 못 되었다. 특히나 나는 가정 형편상 국립대학을 지망했던 데다가 학과(전공)를 중시했던 관계로,장차 국어국문학을 전공코자 경쟁률 19.1:1인 문과계열에서 보기 좋게 낙방을 먹은 상태였다. 본고사 과목이 국어·영어·수학·역사(한국사)였는데, 수학과목과 역사과목이 깡통이었으니… . 나는 아예 등록금이 두 배나 비싼 사립대학교 2차 시험에 도전해볼 엄두도 못 내었다.
2월말 무렵, 보아 가며 군대에나 자원 입대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예고도 없이, 그가 꽁꽁 언 개울을 까만 고무신을 신은 채 건너 시골 나의 집에 당도했다. 사전에 입을 맞춘 바 전혀 없었다. 그는 내 아버지 앞에 죄인인양 무릎을 꿇고 아뢰었다.
“근택이 아버님, 저희한테 한번만 기회 더 주이소. 택이랑 재수하러 가렵니다.”
내 양친과 내 백씨(伯氏) 내외분은 그의 진지함에 감복하여 나더러 보따리 싸서 그와 함께 입시학원가가 있는 대구 시내로 가라고 보냈다. 털털대는 비포장도로 시외버스를 타고 길을 떠났던 우리들. 서로 말은 없었으나, 만감이 교차했다. 차창엔 겨울눈이 부딪혔다. 2월 28일었다. 우리들한테는 영원히 2일 내지 3일이 모자라는 달이었다.
같은 하숙방, 같은 학원에서 함께 공부하였다. 그와 달리, 나는 오월을 넘기지 못했다. 술에 빠져 허우적댔다. 그는 눈물 흘리며 나한테 호소했다.
“이 자슥아, 우리 이렇게 하려고 나선 게 아니잖나? 어디 니만 힘 드는 줄 아나?”
그는 그러면서 정신 차리라고 내 따귀를 손바닥으로 한 대 때렸다. 그게 잘못 되어, 설상가상으로 내 고막이 뚫어져 … . 이 이후의 긴 이야기는 생략토록 한다.
그는 국립 경북대 문과계열에 당당히 합격하여, 후일 도서관학과(문헌정보학과의 옛이름)에 다니게 되었다. 나는 <<進學>>이란 잡지에서 전국 각 대학의 입학요강이며 과거 년도 커트라인 등 각종 정보를 취득하여 갖은 고생 끝에 국립 충북대 농과대학 임학과에 입학하게 이른다. 입학 시험 가운데 수학2가 아닌,수학1이 있었으며, 어차피 과락(科落)을 적용하면 낙방 먹을 게 뻔했지만… .
나야말로 거름지고 친구 따라 장에 갔던 사람이다. 그 이후 둘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냐고? 그는 서울의 어느 대학교 관련 전공을 계속 공부하여 ‘도서관 행정’에 관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나이 서른 여섯 될 때까지 시간강사 등 속된 말로 보따리 장사를 하다가 대구대학교 문헌정보학과 정교수, 학과장 등을 역임하고 지금은 국립중앙도서관관장을 지낸다. 나는 제법 잘 나가던 국영기업체 초급사원에 입사하여 과장 직위에까지 올랐으며, 명예퇴직을 하고, 농학도 내지 임학도로 돌아와 있다. 농사를 한다는 말이다. 대신, 나는 철철 넘치는 감성으로 인해 잃어버린 학습시간들을 되찾고자 서른 초반에 수필문단에 올라 두 권의 수필집을 낸 바 있으며, 요즘도 쉼 없이 창작활동을 한다. 나는 책을 쓰고, 그는 나의 수필집을 국립중앙도서관 등의 서가(書架)에 고이 꽂을 사람이니… .
9. 자기 속을 다 까발라댔던 청년
나는 그제나 이제나 변하지 않는, 치명적 약점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치부(恥部)를 남들한테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점이다. 좋게 말하면, 솔직담백한 행위이지만… .
한 해 600여 명씩이나 졸업하는 모교 대구 청구고등. 첫 해 4년제 대학에 무사히 합격한 이는 거의 없는 줄로 알고 지낸다. 내가 마지막 입학시험 세대였고, 속칭 따라지 고등학교였던 관계로. 학교 당국은 재수생이 워낙 많아 진학지도를 제대로 할 형편이 못되었던가 보다. 재수생인 우리는 서무과(요즘은 ‘행정실’이라 한다.) 앞에서 은사님들의 지도도 없이 대학 입학원서에다 직인을 찍고 졸업증명서를 발부 받고자 장사진을 이뤘다.
그 가운데 ‘원우’라는 친구가 있었다. 서로 지난 해 원서를 썼던 대학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는 나의 입학원서를 보고자 하였다. 나는 부끄럽게시리 원서를 펼쳐 보였다. ‘충북대 농과대학 축산과 1지망, 임학과 2지망’이라고 자필로 적어두었다.
그가 말했다.
“나도 지난 해 그 학교 시험을 봤어. 그런데 말이야. 니가 농과대학 축산학과를 지망한 것 보니까, 예비고사 성적이 별로 안 나온 모양이지? 기왕지사 커트라인을 생각했다면 말이야… .”
그는 1지망,2지망은 그저 요식행위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니 화끈하게 1지망을 임학과로, 2지망을 축산학과로 고쳐 적으라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즉시 실인(實印)을 쳐서 희망학과를 고치게 되었다. 요즘 흔히 하는 말로, 나는 눈치작전을 펼쳤던 것이다. 내 운명은 고등학교 동기생의 말 한 마디로 그렇게 바뀌게 되었다.
그 친구는 지금쯤 무엇하며 어디에서 지낼까? 나는 나이를 먹어갈수록 임학 즉 ‘수풀[林]’을 전공했던 걸 자랑스럽고 보람있게 여긴다. 더욱이 수필작가가 된 이후 그 전공은 무한한 글감을 나한테 준다는 걸 느낀다.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준 그 학문.
10. 어차피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던 청년
그는 대학 학과 동기생이며, 나보다 한 살이 더 많고, 수학적 두뇌를 갖추었던 ‘최세용’이란 이다. 그는 남들이 취직공부를 한다며 토플 등의 영어책과 경제원론 등을 꿰차고 중앙도서관에 다닐 때에 반대로(?) 가고 있었다. 기사 자격증을 딴다고 하였다. 전공과목 등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때에 눈치 빠르게 커닝도 잘 하던 청년이었다. 그의 생글생글 웃는 모습과 걸쭉한 육담(肉談) 아직 생생하다.
“니미(너에미), 따라지 지방대학 따라지 학과 졸업하여 할 게 전혀 없어. 취직할 곳이 없단 말이여! 해서, 나는 되든 말든 환경기사 시험 준비혀.”
사실 우리가 익힌 전공 과목엔 환경과 관련해서는 ‘목재이용학’이란 게 달랑 하나 있었고, 거기엔 펄프 제조 때 쓰이는 산화제 환원제 등의 화학약품과 플라이우드(합판) 제조 때 쓰이는 합성수지 정도가 화학방정식과 함께 소개되었을 뿐이다. 그러기에 그 과목을 강의하신 민(閔) 아무개 노교수(老敎授)마저도 그 친구를 보면, 코웃음 아닌 코웃음을 쳤다지 않은가. 그 친구는 그 교수님을 특유한 목소리로 험담했다.
“그 민대가리(민 씨이면서 대머리임을 그가 그렇게 별명으로 불렀음.) 말이여,환경기사 아무나 따냐고 비웃던 게 아니여!”
그러했던 그. 그가 한번은 학교 앞 학사주점에서 막걸리를 나눠 마시며 나더러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근택아, 니는 내가 보기에 딱 하나밖에는 답이 없어. 언론계 진출 뿐이여! 어차피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해야 되니까!”
그는 제법 그럴싸한 논리를 폈다. 언론계 시험은 국어·영어·상식·논문(‘작문’이라고 하는 언론사도 있다.) 네 과목인데, 이미 아마투어 수필가 내지 아마투어 시인으로 알려진 나는 국어와 논문에 능할 것이고, 영어는 어차피 남의 나라 말이니 너나 나나 샘 샘(same same)이며, 상식은 그야말로 답이 없는, 지식 위의 지식 즉,’상식(上識)’이니 도전할 만하다는 것 아닌가.
나는 1학년 2학기 복학과 동시에 그의 충고 대로 하였다. ‘한국일보’를 시작으로 서울의 각종 언론사 시험을 아니 본 곳이 거의 없다. 그러기를 13 차례. 그러다가 안동의 어느 네트워크 프로듀서 시험에 1차 필기고사에 합격해 본 적은 있지만… .
시험을 거듭거듭 보면서 얻은 지혜 남 다르다. 자꾸자꾸 떨어져야 문제 해결 능력이 생기더라는 거. 자기와 궁합(?)이 맞는 시험이 꼭 있기 마련이다. 이 점은 나 이후에 세상에 온 독자님들께 힘주어 말하고프다. ‘붙고자 하는 이는 계속 떨어지라.’고. 나는 그 친구의 충고에 힘 입어 언론사가 아닌 국영기업체에 합격을 끝내는 하게 된다. 내가 몸 담았던 한국전기통신공사 (요즘은 개명에 개명을 거듭하여 KT라고 한다.) 초급사원 제 1기생 모집에는 공교롭게도 영어와 상식 두 과목이 전부였으며, 언론계 그 잦은 낙방이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
물론, 그 친구 ‘최세용’이는 환경기사에 당당히 합격했으며, 졸업식 하기 전에 이미 이 직장 저 직장에 스카우트 되어 가서 벌이가 좋았다. 사실 두고두고 감사해 하고 자주자주 연락하고 만나고 해야 함이 옳겠는데, 내가 유학(遊學)했던 그 곳이 내 고향 경북 청송과 너무도 멀리 떨어진 충북 청주라서… .
요컨대, 위 사례를 보더라도, 나는 행운아이며 인복(人福)이 많은 이고 둘레에 귀인(貴人)들을 많이 둔 이다.
(다음 호 계속)
창작후기) 다음 이야기도 내가 귀인(貴人)을 만난 내용이 펼쳐질 것이다. 오랜 동안 써 왔던 연애편지가 1톤 용달차 한 대 분은 될 나. 그것이 수필작가가 된 원동력이었으며, 변형된 연애편지가 내 지난 직장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저력이었으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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