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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보람(5)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우선,이 글은 ‘어떤 보람(1)’,’어떤 보람(2)’, ‘어떤 보람(3)’,’어떤 보람(4)의 후속작임을 밝혀둔다. 그러기에 지난 번 제 11화(話)에 이어 제 12화부터 시작된다.
12. 대학입학원서 ‘취미란’에다 자신의 장래 운명을 정확히 적었던 청년
재수 없는 재수(再修)를 하고 조치원역에서 야간열차에서 내려 물어 물어 시내버스로 청주를 찾아갔던 나. 그렇듯 타향인 청주의 충북대 농과대학 임학과에 입학시험을 보게 되었다. 사실 중학교 일학년 때에, 아니 정확히 말하면, 국민학교 삼학년 때에 이미 놓쳐버려 나머지 공부까지 했던 수학 실력으로 인해, 전국 어느 하류대학 어느 커트라인 낮은 학과든 합격하기가 난망(難望)했다. 76년도 당시만 하여도 대학본고사에 어김없이 수학 과목이 있었던 관계로. 내 마음 같아서는 1차 필기시험에 합격한 학생들만 대상으로 면접고사를 봤으면 좋겠던데, 막상 그렇지 않았다. 학교 당국은 필기시험이 끝나고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았건만, 수험생 모두를 끝까지 붙들어 놓고 면접고사와 신체검사를 시행했다. 후일 모교 대학병원이 된 도립병원 돈벌이들 도와주려고 그랬을까?
면접고사장이었다. 같은 방에 두 분의 면접관이 각각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아마 그분들이 교수님들이신가 봤다. 편의상 ‘ㄱ석(席)’,’ㄴ석’이라고 칭하자. 나는 차례를 기다려 ㄱ석 맞은편에 앉게 되었다. 백발이 성성하고 돋보기를 꼈던 분. 그분은 말이 참으로 어눌했다. 후일 그분은 수목학을 강의하였던 ‘이OO’ 노교수님(老敎授 님)이셨으며, 우리들은 A학점이 후했던 그분을 존경해 마지 않았다. 특히 나는 석학(碩學)이시며 인자로우셨던 그분을 모델로 삼아 ‘이파리’, ‘꽃차례’ 등의 수필도 적은 바 있다. 심지어 ‘이파리’는 후일 캠퍼스 현상문예에 당선하게 이른다. 하여간, 그분이 내 면접관이었다. 그분은 나의 입학원서 취미란에 적힌 사항을 찬찬히 훑어 보시는 것 같았다.
“학생, 취미가 문학작품 창작이라고요? 그 가운데도 수필이라고요? “
나는 “네!” 했다.
그러자, 그분은 ㄴ석 면접관을 향해 말씀하셨다.
“어이, 김선생, 이리 와 보게. 여기 당신 같은 학생 또 왔구먼.”
김선생이라고 하는 ㄴ석 면접관은 마치 주인의 부름을 받은 하인인양 발딱 일어나서 ㄱ석으로 왔다. 그분은 단신(短身)인 분이었고, 비교적 젊은 분이었다. 그분은 나한테 덕담을 한마디 해 주었다. 나중에 합격하면,따로 한번 만나자고.
사실 나는 참으로 맹랑한 청년이었다. 입시원서 취미란에다 ‘문학작품 창작(수필)’이라고 적었으니까. 갓 스물이었던 청년이 ‘수필’에 관해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버젓하게 구체적으로 괄호까지 쳐서 적었다니 말이 되냐고? 사실 기껏 해 봤자, 처녀작이라로 할 수 있는 ‘가로등’이란 글 한 편을 어느 지상(紙上)에 발표한 것밖에 없거늘.
그 일이 있고 난 다음,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ㄴ석 면접관을 캠퍼스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봄날 내가 그 학과에 입학하고 난 뒤였다. 그분은 학과 선배이자 학과 조교수이자 캠퍼스 내 문학서클 창시자이자 학보사(學報社) 주간(主幹)임을 알게 되었다. 그분은 나와 마찬가지로 ㄱ석에 앉아 계셨던 교수님과도 사제지간이었다. 학창시절 그분도 꽤나 문학한답시고 청춘을 허비했던 모양이다.
둘은 제법 죽이 척척 맞았다. 나는 그분 연구실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원고지에다 적은 글을 들고 가면, 그분은 연필로 눈가는 부분이라면서 온데 낙서(?) 해대곤 하였다. 그러는 한편, 매번 나한테 꾸지람도 잊지 않았다.
“자네 말이야, 나 꼴 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혀. 반듯한 직장에 취직부터 해야지!”
사실 그분도 당시 아마투어 수필가에 머무르고 있었다. 내가 3년간 군대생활을 하고 1학년 2학기로 복학을 했을 때에 그분은 비로소 수필문단에 정식 데뷔했다. 한국문인협회 기관지인 <<월간문학>>을 통해서. 사실 나도 그 잡지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 끊임없이 노크를 해왔으므로 그분과 경쟁자였던 셈이다.
어찌 되었든 그분은 나의 롤 모델이었으며, 조력자(助力者)였고, 선배였으며, 스승이었다. 나는 내심 이런 생각을 하곤 하였다.
‘저 선배도 하는 걸 내가 왜 못해?’
꽤나 시간이 흐른 다음, 사제지간이자 선후배지간인 우리 둘의 신작수필이 어느 수필전문지에 나란히 실린 적이 있다. 참으로 행복했다. 사실 그런 일이 있기 전에도 수시로 문안전화를 주욱 드렸던 편이지만,나는 그러한 사항을 그분께 확인시켜 드렸다. 그분도 기뻐하며, 나더러 이런 제안을 했다.
“자네 말이여, 글은 일단 작가의 손을 떠나면 독자의 것이잖은가? 나의 그 글 눈가는 데 없던가? 어디 한번 꼼꼼히 살펴보아 주게.”
순진했던 나는 그 말씀을 곧이곧대로 들었다가 낭패를 당했다. 우리 두 사람 사이를 너무도 벌려놓고 만 사건이었다. 수필가 두 사람을 서로 건널 수 없는 루비콘강 앞에 각각 내세운 사건이었다. 나는 지난 날 그분 연구실에서 되[升]로 받은 걸 말[斗]로 갚는다는 순수한 마음에서 작업을 시작해 보았다. 한마디로, 그분의 글은 겉은 번지르르 하나, 알맹이도 부실하고 비문(非文) 일색이었다. 그 동안 얼마나 문장훈련을 게을리 했는지 내 눈에 훤히 보였다. 수필잡지 3쪽에 해당하는 그분의 글에 관해 내가 눈가는 곳을 친절히 지적하여 적은 것이 A4용지 5매 분량이었으며, 그렇게 적은 걸 그분께 편지와 더불어 부쳐 드렸다. 대오각성하여 제대로 된 글을 적기 바라면서 그렇듯 극약처방(?) 하였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냐고? 독자님들 상상에 맡기겠다.
이제 나는 감히 나의 애독자 여러분께 말씀 하나 드리고 이 글을 맺도록 하겠다. 나는 나의 자리를, 지금이라도 당장 내 후진들에게 선하게 내어줄 수가 있다. 우리한테는 일찍부터 ‘후생가외(後生可畏)’니 ‘청출어람(靑出於藍)’이니 하는 아주 좋은 교훈이 있으니까. 그것이 역사 발전의 밑거름이라는 점 절대 놓칠 수가 없다. 문학을, 특히 내가 즐겨 하는 수필 장르를 적극 공부코자 하는 분이 계신다면, 충고 드릴 게 있다. 결국은 글 스승의 수준을 뛰어넘어야 한다. 결코 아류(亞流)에 머물러서는 아니 된다. 기초는 글 스승을 통해 닦더라도, 결국은 홀로 가는 게 문학인의 진정한 자세다. 그렇게 하는 것이, 결코 그분 권위에 도전하는 것도 아니며, 비인격적이고 싹아지 없는 태도도 아니라는 것.
(다음 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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