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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깃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적어도 일주일에 한 차례 이상 색 다른 옷깃을 보곤 한다. 주일미사 참례차 성당에 가면, 언제고 신부님은 로만 칼라(Roman collar)를 하고 계신다. 로만 칼라는 가톨릭 사제의 정복을 일컫기도 하지만, 정확히는 그분들이 입고 있는 복장 가운데서도 ‘옷깃’을 이른다. 로만 칼라는 로마 가톨릭 사제들이 그러한 복장을 했던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목 가운데 하얀 사각형 옷깃을 호크(haak) 등으로 채운 그것. 흰 색이 상징하는 바, 순수와 가난과 단순한 삶을 추구하며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따르려는 사제들의 의지가 그 옷깃에 나타나 있다. 사실 나는 로만 칼라를 대하기만 하여도 숙연해진다.
어제 주일미사 때 다시 본 그 로만 칼라는 또 많은 옷깃을 떠올리게 하였다.
첫째, 내 아버지의 두루마기와 내 어머니 저고리에 달리던 ‘동정’이 오버랩 되었다. 당시엔 잡화점에서 동정을 팔았다. 우리는 어머니의 분부를 받잡고, 그 동정을 가끔씩 사오곤 하였다. 하얀 마분지에다 하얀 옥양목천을 풀로 붙인 동정. 어머니는 그것을 두루마기 옷깃으로 달고서, 화로에 묻어 두었던 인두로 다렸다. 그러면 빳빳해졌다. 아무리 힘 없는 시골 농부일지라도 두루마기나 저고리를 입게 되면, 그 동정으로 인해 고개를 빳빳하게 세울 수 있었다. 아니, 세울 수밖에 없었다. 사실 동정은 목에 스치어 금세금세 풀이 죽고, 때를 잘 타기도 하였다. 바빠서 옷 전체를 빨지 못하더라도, 동정만 새 동정으로 갈면, 그 옷을 입는 이의 자존심은 곧바로 되살아나곤 하였다. 사실 우리네 어머니들은 남정네들의 자존심을 옷깃 즉, 동정으로만 살린 게 아니다. 당신들은 그런 걸 어떻게 배웠던지, 다림질과 ‘풀먹이기’와 다듬이질 등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도 남정네들 기를 살렸다. 나는 자주자주 보았다. 어머니는 새벽에 아버지의 모시적삼저고리, 삼베적삼저고리, 무명적삼저고리 등을 빨랫줄에다 내다 걸었다. 이슬을 촉촉히 맞히기 위해서다.물론 그 옷들은 이미 밀가루죽을 쑤어 풀을 한바탕씩 먹인 것들이었다. 그러는 사이 자루 달린 다리미에다 숯불을 잔뜩 얹어 다리미를 달구었다. 그러고는 그 빨래들을 걷어다가 다림질을 시작하였다. 어머니 곁에는 물 대접이 있었고, 이따금씩 물을 물고 ‘푸!푸!’ 뿜기도 하였다. 광목 이불호청 등을 다릴 적에는 우리더러 한쪽 끝을 잡으라고 한 적도 많았다. 달밤에 신명나게 박자를 맞추어 두드리던 방망이 소리도 새삼 그립다. 그 일련의 작업은 과학적으로도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풀 먹이고, 다리고, 두드리고 하면 섬유에서 일어나는 보풀을 잠 재워, 쉬이 닳는 것을 방지해준다지 않은가. 즉, 섬유간의 마찰을 최소화하여 그 수명을 늘린다는 것이다. 우리네가 어떤 이의 맥 없는 상태를 일컬어, “저 사람, 풀이 죽어 있어.”라고 관용적으로 쓰는 말. 이제야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가 입고 있는 옷이 풀이 죽은 상태를 일컫는 말인 듯하다. 아무튼, 우리네 어머니들은 남편을 비롯한 온 가족의 기를 살리기 위해 풀 먹이고, 다리고, 두드리고 했던 게 분명하다. 아무리 바빠도 저고리에 새 동정을 다는 일만은 빠뜨리지 않았던 거 같다.
둘째, 중고등학교 시절 우리가 입고 다녔던 교복 저고리의 칼라가 겹쳐졌다. 우리는 교복 자율화 훨씬 이전의 학생들이었다. 교복 저고리엔 사제들의 로만 칼라 비슷한 모양의 칼라가 달려 있었다. 그 칼라 안에다 띠 모양으로 덧대는 하얀 천이 있었으며, 그걸 이따금씩 문방구에서 새것으로 사서 붙이곤 하였다. 교칙에 따라, 칼라는 언제고 ‘호크’로 채우고 지내야만 했다. 호크를 열어둔 채 지내면, 불량학생으로 내몰려 정학처분도 감내해야만 했다. 사실 그 호크라는 게 묘하게 생겨 있었다. 옷깃 한 쪽엔 두 개의 철사 수컷고리, 또 한 쪽엔 두 개의 철사 암컷고리로 되어 있었고, 우리는 손 감각만으로도 그걸 풀고 채우고 할 수 있었다. 본디는 ‘haak’가 네덜란드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모르긴 하여도, 네덜란드 사람들은 검소했던 모양이다. 그처럼 호크를 채우면, 가정형편조차도 감쪽같이 감추어 누구네가 더 잘 살고 또 누구네가 더 못 사는지조차 알 수 없게 만들었다. 이 무슨 이야기냐고? 똑 같은 교복이고, 비단 내의를 입었든지 무명 내의를 입었든지 내의를 아니 입었든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빈부격차 등을 크게 느끼지 않았다는 뜻이다. 교복과 교모(校帽)와 명찰이 있었던 시절. 그러기에 우리네는 보다 순박한 학생으로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끝으로, 여학생들의 칼라가 떠올랐다. 사실 남학생들의 교복은 까마귀 모습 같았으나, 여학생들의 교복은 커다란 흰 색 칼라로 하여 까치 모습같았다. 나는, 시골 남녀공학이며 중고등학교가 한 울타리에 있었던 중학교에 다녔다. 더군다나 중학교 2학년 때엔 남녀 공학반이었다. 해서, 그 순결의 상징 같던 흰 칼라를 가까이에서 자주 보며 지냈다. 언제 보아도 아름답던 그 칼라. 그 칼라들은 내 그리움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대체로,여학생들은 몇 장의 칼라를 예비품으로 지니고 지낸다고 하였다. 그들은 때가 타면, 이내 칼라를 새 것으로 바꾸어서 교복에 단다고 하였다. 그 칼라를 빳빳하게 세우려고, 전분(澱粉) 등으로 풀을 곧잘 먹이던 걸 당시 여중생이었던 내 손위 누이를 통해서도 똑똑히 보았다. 당시 여학교마다 독특한 교복이 있었다. 내 기억에, 대구 소재 ‘S.M(신명) 여고’의 교복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해서, 그 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이면, 요즘 말로, 한번 사귀어 봤으면 싶었을 지경이다.
이제 두서 없는 글 정리해 봐야겠다. 나는 신부님의 로만 칼라를 통해, 그 오랜 동안 잊고 지냈던 옛 추억을 하나하나 더듬게 되었다. 가수 이선희의 노랫말 대로다. 참말로, 나야말로 ‘아,옛날이여!’ 인 걸. 또, 가수 ‘메리 홉킨’의 ‘지나간 시절 (Those were the day)’이다. 한마디로, 그때가 참으로 좋았는데… .
사족 하나를 덧붙인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는 말, 그 말의 참 의미를 되새겨 본다. 옷깃을 스쳤다 함은, 포옹 내지 스킨십 정도는 해 보았다는 뜻이다. 왜냐고? 어의적(語義的)으로 옷깃은 목덜미를 감싸는 부위를 뜻하니, 포옹 내지 스킨십을 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서로 닿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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