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새벽에 낫을 간 이유는수필/신작 2015. 8. 8. 12:28
내가 새벽에 낫을 간 이유는
윤근택 (수필가/수필평론가)
닭장 오골계들 첫닭이 울 때에 잠에서 깨어났다. 일러도 다섯 시 반 무렵에야 앞이 겨우 보이건만, 일중독에 걸린 나는 또다시 조바심을 부리게 되었다. 해서, 외등(外燈)을 켜고 '마감숫돌'을 물 담긴 세숫대야에 한참씩이나 담근 후 왜낫을 갈기 시작하였다. 이 왜낫은, 내가 나무를 벨 때 주로 쓰는 조선낫과 달리, 풀을 벨 때 주로 쓴다. 그리고 조선낫과 달리, 그 ‘슴베’가 꽤나 얇아 만약에 반거들충이 농사꾼이 요령 없이 쓰면, 곧잘 이빨을 빠뜨리는 예가 있다. 그러기에 이 왜낫은 내 전용(專用)으로, 심지어 아내조차도 못 쓰게 하는 편이다. 사실 나는 이 왜낫을 하루에도 여러 차례씩 새참술을 마시러 농막에 올 때마다 마감숫돌에 갈아 쓴다. 사실은 여느 농부들 같으면 오늘 새벽에 다시 갈지 않아도 만판 쓸 수 있는 상태의 낫이었다. 하지만, 나는 더 예리하게 갈 요량이었다. 갈고 나니 서슬이 퍼렇게 되어 종아리의 터럭도 물만 묻히기만 하면 면도가 될 듯하다. 실제로 소년시절엔 소꼴베러 나섰다가 이렇게 간 낫으로 종아리 터럭을 면도한 적도 있었다. 나는 이처럼 왜낫이 숫제 면도날이 되어야만 만족해한다. 참고적으로, 나의 ‘낫 갈기’에 관한 수필작품이 따로 있고, 이미 인터넷 매체에 발표되어 있으니, 내 신실한 애독자들께서는 이 글과 곁들여 읽어주셔도 좋겠다.
이른 새벽에 내가 낫을 간 이유는,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를 만들고자 함이었다. 제왕체제(帝王體制)를 과감히 자르기 위함이었다. 과두체제(寡頭體制)도 더 이상 봐주지 않고자 함이었다. 내가 낫을 간 이유는, 제자백가(諸子百家)·삼두체제(三頭體制)·군웅할거(群雄割據)·집단지도체제(集團指導體制) 등을 꾀하고자 함이었다. 한마디로, 독불장군을 없애고 다양성과 공존(共存)을 중시하고자 함이었다.
낫을 든 채 어둠을 헤치고 들깨밭으로 향했다. 지난 유월 말부터 칠월 중순께까지 전체 네 뙈기의 밭, 연면적 2,000여 평에 달할 만치 들깨모를 이식(移植)한 나. 나는 그렇게 심은 들깨밭을 한 바퀴 돌며 들깨의 정수리를 과감하게 날려버리고 있다. 이른바, 적심(摘心)을 하는 중이다. 들깨나 콩을 적심하는 이유는, 저 창망(滄茫)한 하늘로, 그야말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원순이나 원줄기를 가차 없이 잘라냄으로써 곁가지를 더 많이 내어놓게 하여 보다 많은 열매를 얻고자 함이다. 해서, 나는 해마다 장차 적정시기에 적심할 걸 감안하여 들깨모를 본밭에다 이식하되, 당초에는 남들이 흉을 볼만치 성기게 이식하는 편이다.
나의 작업은 이어진다. 낫이나 칼이나 기계로 풀을 깎는 걸 일컬어, ‘예초(刈草)’라고 한다. ‘刈’가 보여주는 바, 풀을 칼[刂]로 베되, 풀 대궁과 직각으로가 아닌 빗당겨[‘㐅(오; 풀을 벰)’] 벰이 효율적임을 여실히 보여주지 않는가. 나무든 풀이든 나름의 결이 있어서, 낫질을 할 적에는 빗당겨 베야 쉽다. 여기서 더해, 낫질을 그렇게 하면 낫의 날 이빨이 웬만해서는 나가지 않고, 돌멩이 등 장애물도 피할 수 있게 된다. 정말 그것뿐이던가. ‘빗당겨베기’는 허리를 약간만 수그려도 가능하기까지 하여 피로를 퍽이나 줄인다. 이러한 사실은, 내 오랜 낫질 경험에서 얻은 거. 하여간, 나의 들깨 적심은 생각밖에 쉽다. 이 이른 새벽, 낫자루를 잡은 오른손의 손목 스냅으로 들깨마다 정수리를 가볍게 치기만 하면, 안하무인격이었던 그 ‘돋난 녀석’의 목이 달아난다.
내가 하필이면 새벽을 골라 이처럼 들깨 적심작업에 나선 데는 특별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참말로, 지금이 혹서기(酷暑期)인 관계로, 한낮에는 작업하기가 어려워서뿐만 아니라는 거. 이 가물대로 가문 계절, 들깨줄기의 모세관 현상, 들깨잎의 증산작용(蒸散作用) 등에 힘입어 밤새 이슬 머금고 들깨가 빳빳하기만 한데, 그 들깨의 햇순을 자르기에는 아주 좋은 시간대라는 거. 사실 어린 날 소꼴을 베러 다녔기에 너무도 잘 아는 사항이지만, 대개의 풀들은 새벽에 혹은 비올 때에 베는 게 효율적이다.
내가 새벽에 낫을 간 이유는, 얼추 다 적은 듯하다. 정말 그럴까? 나는 300여 평 들깨밭에서 들깨를 적심하는 내내 야릇한 쾌감을 가졌다. 오냐오냐 했더니, 민초(民草)들이 뽑아 줬더니, 4년 또는 5년 내내 군림하려 드는 몇몇 선출직들을 ‘국민소환’ 내지 ‘탄핵’으로 끌어내리는 기분 같았다고나 할까? 들깨 적심을 하는 동안, 나는 내내 천문· 역법· 수리· 토목· 건축· 공예 등 여러 분야를 꽃 피웠다는 ‘천추 전국시대’를 떠올려 보았다. 그 ‘천추전국시대’가 그저 혼란의 시기였던 것만은 아니었다는 점. 그 무엇보다도, 유가(儒家)니 도가(道家)니 법가(法家)니 따위의 사상과 문화를 한껏 꽃 피웠던 시기가 아니었던가. 내가 장수(將帥) 격인 들깨의 원순을, 더 늦기 전에 그렇게 ‘댕강댕강’ 잘라버림으로써 얻게 되는 이익이 만만찮다. 농부한테는 들깨든 메주콩이든 돋난 놈은 결코 필요치 않다. 그 돋난 놈들은 마치 권력의 세습화, 재력의 세습화의 후예들 못지않다고 여기니까. 농부한테는 고만고만한 새 순들이 앞다투어 서로 장수가 되겠다고 나오는 것만이 바람직한 일. 그러면 경쟁적으로 내놓은 들깨잎과 들깨줄기로 하여 더 폭넓게 온 밭을 채울 것이다. 프로축구에서 이르는 기술용어이긴 하지만, ‘운동장을 넓게 쓰는’ 이치와 같다. 마치 온 마당에 ‘치알(차양막)’을 치듯. 이 농부는 그렇듯 들깨로 하여금 새롭게, 제로베이스에서 출발하도록 경쟁을 부추김으로써 정말 다양하고도 또록또록한 들깨알을 더 많이 얻는 일만이 중요하다. 지금 당장은 들깨한테 상처를 입혀 안쓰럽지만, 내가 더 이상 늦추지 않고 적심을 하는 진실된 이유다. 나는 들깨 적심에만 그치지 않고, 군데군데 자기 신분을 감춘 채 들깨에 바짝 붙어있는 잡초들도 ‘톡톡’ 낫으로 쳐서 없애버렸다. 명아주, 망초, 비름, 까마중, 방동사니 등이 그것들이었다. 어차피 잡초는 잡초일 뿐이고, 내가 소망하는 작물과 끝끝내 같이 갈 수는 없는 노릇. 위에 열거한 잡초들은 마치 누구한테 빌붙어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이들과 진배없으니... .
요컨대, 내가 새벽에 낫을 간 이유는, 보다 낫고 보다 많은 수확의 가을날을 맞고자 함이었다. 하여간, 낫은 자주 새파랗게 갈아야 한다. 이제 잠방이에 이슬이 함초롬히 맺힌 채 농막으로 돌아와 출근을 서두르는 나, 돌아와 수필작가인 나. 나의 펜끝도 오늘 하루 그렇듯 날카롭게 닳려야겠지!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한국디지털도서관 본인의 서재,
한국디지털도서관 윤근택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본인의 카페, 이슬아지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수필 > 신작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사흘 내내 구슬땀 흘린 이유 (0) 2015.08.13 '대롱(40) -실린더' (0) 2015.08.08 '규모의 경제'에 관해 (0) 2015.08.05 그들만의 리그 (0) 2015.08.01 알레르기에 관해 (0) 2015.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