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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거운 나의 집'의 여자(2)수필/신작 2017. 3. 1. 22:02
‘즐거운 나의 집’의 여자(2)
윤근택(수필가)
이 글은 <‘즐거운 나의 집’ 여자(1)>의 후속작임을 미리 밝혀둔다. 앞의 글 말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그 여자의 집 전화 (02-863- 75XX)에다 전화를 걸면, 전화벨소리가 색다르다. 수십 년
째 그 벨소리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 피고 새 우는 집 내 집뿐이리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나의 벗 집 내 집뿐이리
그랬던 그 여자는 우리 나이 66세, 비교적 젊은 나이에 그러한 자기 집을 두고 홀연히 떠났다. 위암으로 시작된 암이 전이되어 발병 2년여 만에 온갖 내장 다 들어내고 약액으로만 견디다가 떠났다. 그 여자는 이승에서 마지막 날 말없이 뜨거운 눈물만 흘리다가 숨을 거두었단다. >
이 글의 주인공인 내 막내누님이 떠난 지 며칠째 된다. 이제 외기러기가 된 매형과 생질과 생질녀들의 슬픔과 허전함을 생각하자니, 가슴시리다. 사실 지난날 내 양친을 여의고 겪었던 그 허전함은 꽤나 오래 지속되었으니... . 일찍이, 지혜로운 우리 조상님들은, 이러한 때에 쓸 수 있는 적절한 말씀을 남겼다. “든(들어온) 사람은 몰라도 난(나간) 사람은 안다.” 가 바로 그것이다. 얼마 전 내 농장 ‘만돌이농원’에서 겪었던 일도 마찬가지다. 자기 부인이자 남매지간이었던 ‘이쁜이’를 두고 어디로 사라졌는지,‘누렁이’가 보이지 않았다. 몇몇 날을 기다려도 끝내 ‘누렁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며 남의 집 농작물조차 해쳐 민원을 사곤 했던 녀석. 아무리 잡아 묶으려 해도 아니 되어 골치 아팠지만, 막상 그렇게 실종(失踪)이 되자, 내내 섭섭하다. 모르긴 하여도, ‘하룻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하더니, 지난번처럼 또 멧돼지한테 ‘맞짱’을 뜨다가 잡아먹혔을 듯하다. 집에 기르던 개에 대한 정(情)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피붙이인 누님에 대한 정이야 오죽하랴!
나는 막내누님을 추억한다.
나보다 다섯 살 많고, 이승에서 누린 나이가 우리 나이로 66세인 이. 그는 열 남매 가운데 일곱 번째, 딸로서는 다섯 번째였는데... . 어릴 적엔 지지리도 지지고 볶고 싸우며, "가시나야!" 한 적도 많았다. 그의 콧잔등엔 내가 할퀸 손톱자국도 2~3센티 남아 있었는데... . 이번에 문상(問喪)가서 여쭤봤더니,막내매형은 자기 아내의 콧잔등 흉터도 여태 모르고 있었다. 내가 갓난애기일 적에 그와, 그의 바로 아래 남동생이며 내 바로 위의 형인 ‘영택’이가 장난을 치다가 내 가슴팍을 지질러 밟은 일이 있다고 한다. 해서, 내 가슴의 양늑골이 합쳐지는 새가슴 부위가 부러져 그때부터 움푹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어느 손위 남매분이 은근슬쩍 알려준 바 있다. 그때 간난애기였던 내가 ‘노란 물똥’을 싸는 등 죽음 직전까지 갔다고도 한다. 자칫, 동생을 밟아 죽일 뻔했던 누님. 함께 자라는 동안, 그를 따라가 다슬기를 잡은 적도 많다. 그는 비오는 날엔 ‘날궂이’를 한다며,항아리에서 ‘보리겨’를 퍼내서 ‘가는 체 [細篩]’로 쳐서 소오다를 넣고 쪄서 함께 먹곤 했다. 그것이 ‘개떡’이었다. 한편, 겨울이면 당시 초가지붕 처마에 기어드는 참새를 함께 잡기도 하였다. 그러나 숯불에 참새구이를 한 후에는 ‘안면몰수’였다. 그의 몫은 없었다.
“딸아(가시내)는 참새구이를 먹으면, 방정맞게 사발을 잘 깬다카던데(깬다 하던데)?”
그는, 그의 손위 남매들과 달리, 특혜를 받아 시골의 중학교까지 다닐 수 있었다. 든든한 후견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후견인은 당시 19세 안팎이었던 내 중씨(仲氏). 그는 곧잘 말하곤 했다.
“나무를 져다 팔더라도, 막내 여동생 ‘말자(末子)’만은 중학교까지라도 공부시킬끼라.”
공부에 포부가 진 내 중씨는 실제로 그리하였다. 다음 장날에 내다팔 장작을, 부엌 아궁이 앞에 세워 조바심을 부리며 말리던 내 막내누님. 그는 후일 그 오라버니한테 ‘기워갚기’를 특히 잘 했다. 해마다 한여름에 그 오라버니댁으로 내외가 내려와 홍고추따기를 돕는 등 각별했다. 그가 세상을 뜨자, 내 중씨가 장례가 끝날 때까지 남았던 것도 우연은 아니다. 남매들 가운데에서 가장 슬피 운 이도 내 중씨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자, 대구에 소재한 직물공장에 취업했고, 적응이 아니 되는지 낙향했다. 그리고는 읍내 미용실에서 조수로 미용기술을 익혔다. 그런 다음 ‘고데기[こて機]’와 퍼머액을 싸들고 명절 전후 이 마을 저 마을로 돈벌이를 나선 일이 많았다. 그것이 흔히 말하는 ‘야메[やめ]’였다. 그는 좀 더 시간이 흐르자, 서울로 가서 구로공단 가발공장에 취직하게 된다. 무슨 인연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그곳 ‘구로동’이 고향인 총각을 만났으며, 그와 중매결혼을 하게 된다. 매형은 기상대 아니, 기상측후소 아니아니, ‘중앙관상대’에 근무하는 공무원이었다. 이 곳 저 곳 남편을 따라 지방의 측후소로 옮겨 다녔다. 그러다가 또 무슨 인연인지, 이 세상을 뜰 때까지 그곳 구로구에서 살았고, 그 구로구에 소재한 어느 대학교 부설병원에서 투병하다가 숨을 거뒀다.
내 추억의 타래실을 솔솔 풀다 보면, 대구 칠곡동 누님네 가족이 살던 셋방도 딸려나온다. 갓 제대한 열 번째 ‘수택’이도 그 댁에 기숙(寄宿)하며 직장을 다녔다. 대학을 갓 졸업한 나도 그 댁에 신세를 크게 진 일이 있다.
“동생, 일단 ‘통신공사(KT의 전신)’ 1차 필기시험에 합격한 걸 축하해. 하지만, 면접 때 입을 양복 한 벌도 변변히 없으니... .”
본디 애살이 많은 그는, 자기가 간직하던 옷감을 양복점에 내다 맞겨 양복 한 벌을 지어줬다. 그 덕분에 당시 짱짱하게 나가던 통신회사에 기어이 합격할 수 있었다. 사실 그는 점(占)도 마다않고 보았고, 복채도 두둑하게 내어 놓았을 것이다.
사실 우리 열 남매 모두가 양친의 솔선수범 덕분에 생활력이 강하다. 그 가운데에서도 그가 으뜸이었을 것이다. 어찌나 알뜰살뜰 자기 가족들, 친정식구,시댁식구,동기생들을 챙겨나갔는지 모른다. 이번에 문상을 가서 내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사항인데, 영안실 복도에는 조화(弔花)도 조화도 어찌나 많던지. 그는 사회 봉사활동도 엄청 많이 해왔음을 알게 되었다. 문상객들 가운데 그의 ‘재경동창회(在京同窓會)’ 회원들이 탄식조로 하던 말이 떠오른다.
“동생, 우리 동창회는 이제 쪽박 깨진 셈이야! 자네 누님이 여태 ‘무수리’ 역할을 다 해 왔거든.”
그는 살림은 또 얼마나 불려나갔던가. 그는 억척으로 벌고, 재테크도 잘 해서 아파트를 몇 채씩이나 가지고 있었다. 그 아파트를 자녀들한테 한 채씩 나누어줄 만치.
그러했던 여인. 그는 66세 아까운 나이에 이승을 떠났다. 우리 남매들끼리 하는 말로, ‘너무 극성스러움’이 그를 병나게 만들었음이 분명하다. 만병의 원인이 스트레스라는데, 그는 수년 전 몇 가지 가정사(家庭事)로 말미암아 지나치리만치 신경을 썼다. 해서, 나는 시외전화로 문안을 겸한 충고를 한 적 있다.
“누님, 다윗왕의 반지에는 ‘그 또한 지나가리라(Soon it shall also come to pass).’하고 적혀 있다지 않아요? 그리고 누님이 좋아하는 비틀즈의 노래 ‘Let it be(순리에 맡기세요).’도 있잖아요? 그 놈이(?) 저지른 일 스스로 책임지도록 놔두세요.”
그 말을 그는 크게 유감으로 삼더니... .
하여간, 그는 갔다. 자기 가족과 친정 남매들한테 나름마다 추억거리를 고스란히 남겨두고서 가고 없다. 다시 말하거니와,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고 했는데, 쓸쓸함만 남겨두고 가고 없다. 해마다 정월 초에 가지는 ‘남매계취(男妹契聚)’에 그도 셋째누님, 둘째매형에 이어 다시는 참석하지 못하리. 그는 참말로 다시는 바리바리 선물 사들고 나타나지 못하리.
올해 회갑을 맞은 나. 그처럼 성했던 28개 이빨 가운데 아래 위 통틀어 3개의 어금니가 빠져 달아나 허전하기만한데, 거기에 더해 3남매까지 잃었으니... .
아무쪼록, ‘즐거운 나의 집’의 여자여, 부디 명복을 누리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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