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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에 관해
윤근택(수필가/문장치료사/수필평론가)
나는 몇 분들한테 거의 매일 한 통씩 e메일로 신작 수필 등을 부치곤 한다. 그분들 애독자그룹(?) 가운데에는 아이디가 ‘crane43’인 분도 있다. 사실 그분은 전주에 사는 ‘김학(金鶴)’ 수필가이다. 그분 함자(銜字)가‘학’즉‘두루미’이니,아이디를 ‘crane(학)’으로 참말로 잘 정한 듯하다. 나는 그분을 지면상(紙面上)으로 알고 지내는 지가 벌써 20년도 넘었으나, 직접 뵈온 적은 없다.
그분께 e메일을 부칠 적마다 ‘긴 목을 지닌 새’의 대명사로 여기는 두루미를 떠올리게 되고, ‘절절한 기다림’을 나타내는 ‘학수고대(鶴首苦待)’도 떠올리게 된다. 참말로, 지치리만치 긴 기다림을 학수고대라고 하지 않는가? 나는 학수고대란 말을 대할 적이면, 하마나 (임이) 올까 하마나 올까 길게 목을 빼고 멀리 바라보는 여인도 상상하곤 한다. 아울러, ‘일각여삼추(一刻如三秋)’도 생각하곤 한다. 고등학교 시절, 한문 교과서에서 감동적으로 읽은 시(詩)도 다시 떠오르곤 한다. <<詩經>> 王風篇에 나오는 ‘采葛(채갈)’이란 시가 바로 그것이다.
彼采葛兮 一日不見 如三秋兮( 저기서 칡을 캐고 있는 그대여. 하루라도 그대를 보지 못하면 석 달 동안이나 못 본 듯 그리워지네)
彼采蕭兮 一日不見 如三秋兮(저기서 쑥을 캐고 있는 그대여. 하루라도 그대를 보지 못하면 아홉 달 동안 못 본 듯 그리워지네)
彼采艾兮 一日不見 如三秋兮(저기서 약쑥을 캐고 있는 그대여. 하루라도 그대를 보지 못하면 삼년을 못 본 듯 그리워지네)
안타까운 기다림에 관한 말은 또 있다.《呂氏春秋順說》에는 ‘延經擧踵(연경거종)’이라는 말이 있다.
‘목을 길게 빼고 발꿈치를 들고 기다린다’는 뜻이다.
다들 살아오는 동안 수없이 경험했겠지만, 누구를 기다릴 적에는 그렇게 지루할 수가 없다. 약속장소에 뒤늦게 도착한 이는 5분 늦어진 것이지만, 미리 와서 기다리는 이는 50분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옛사람들은‘백난지중대인난(百難之中待人難)’이라 고까지 했다. ‘수많은 일 가운데에서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뜻이다.
‘기다림’, ‘기다리다’는 ‘길다’에서 온 말처럼 여겨진다. 실제로 기다림은 언제고 (시간이) 무척 긴 듯 여겨지니까. 심지어, 영어에서도 ‘기다림’을 ‘long’,‘longing’,‘long for’등으로 쓰고 있다. ‘기다림’은 동서(東西) 공히 ‘길게만’ 느껴지는 데서 비롯된 말인 듯하다.
목이 빠지게 기다려도 아니 오는 사람. 우리는 누구나 젊은 날 연인을 그렇게 기다리곤 하였다. 그 많은 명화(名畵)에서도 연인을 애타게 기다리는 장면이 관람자들까지 안타깝게 한다.내가 본 영화 가운데 ‘애수(워털루 브리지)’가 그러했고, ‘기차는 8시에 떠나네’가 그러했고, ‘어톤먼트’가 그러했고... .하지만, 기다림은 애태움이 있어 그런대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돌이켜본즉, 젊음이 있어 행복했다. 그런데 요즘은 막상 애태우며 길게 목을 빼고서 그 누구를, 그 무엇을 기다릴 일이 퍽이나 줄어들어버렸다. 그 동안 내 곁으로도 무심한 세월이 너무도 빠르게 흘러간 탓인지 모르겠다. 이제 환갑이 지났으니, 차츰 늙어간다는 거. 그렇더라도 나한테 ‘비원(悲願)’ 혹은 ‘염원(念願)’으로 이름하는 몇 몇 기다림이 영 없지는 않다. 그 염원 가운데에는, 내가 두루미처럼 목을 길게 빼고 ‘기린아(麒麟兒)’를 기다리는 것도 포함된다는 것을. 그 기린아는 기린처럼 목이 아주 긴 이, 슬기와 재주가 남달리 뛰어난 젊은 사람, 살아 있는 풀은 밟지도 않고 살아 있는 생물은 먹지도 않는, 어질고 매우 상서로운 짐승인 기린 같은 사람. 나는 그를 기다린다. 그는 이 대한민국 윤근택 수필가의 그 많은 작품을 모조리 읽어, 오로지 그 작품들 연구만으로 석사학위, 박사학위까지 받게 될 사람이면 참 좋겠는데... .
끝으로, 기다림이 참으로 많았던 내 젊은 날을 추억하며, ‘메리 홉킨’의 ‘Those were the days(지나간 시절)’의 노랫말을 새삼 음미하면서 이 글 맺을까 한다.
<옛날 어느 선술집이 있었네. 우리는 거기서 늘 한 두 잔 씩 하곤 했다네. 기억해보게나, 친구여. 얼마나 많은 시간을 웃음으로 보내고 우리의 포부를 키웠는지. 지나간 시절. 나의 친구여, 우리는 그 시절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네. 우리는 영원히 노래하고 춤추며, 하고 싶은 대로 인생을 살며, 싸우면 결코 지는 법이 없이 살려고 했다네. 우리는 젊었고 목표가 있었으니까. 라라라. 지나간 시절, 지나간 시절이여. 세월은 빠르게 우리 곁을 지나가고 우리는 지난 일을 잊게 되었지만, 만약에 우연히 그 선술집에서 너를 만날 수 있다면 우리는 서로 웃으며 지난 시절을 얘기하겠지. 바로 오늘 밤 나는 그 선술집 앞에 서 있었네. 옛날과는 너무나 변해 있었다네. 술잔을 기울이며 문득 이런 생각을 했지. 그 외로운 친구가 바로 나였던가 하고 말이야. 문 밖에서 귀에 익은 웃음소리가 들렸다네. 나는 네 모습을 보았고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네. 오, 내 친구여. 우리는 늙었지만 현명해지지는 못했구나. 우리 가슴에 꿈이 예전과 같으니. (어느 분의 맛깔스런 번역 그대로 베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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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re The Days(지나간 시절) - 매리 홉킨(Mary Hopk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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