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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수련(110)문장이론/문장수련(문장이론) 2017. 7. 8. 07:52
문장수련(110)
윤근택(수필가/문장치료사/수필평론가)
이번 호에도 전주에 사시는 ‘김학(金鶴)’ 수필가께서 e메일로 보내주신 어느 분의 글을 텍스트로 삼는다.
원문과 문장치료 후 글과 동시 읽기)
덤벙주초와 그랭이질
꽃밭정이수필문학회 전 ○○
오래된 한옥이나 사찰을 탐방해보면(☞탐방해보면,) 우리 조상들의 자연에 순응하는 지혜와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다. 건물을 떠받치는 기둥과 그 아래 흔히 주춧돌이라고 하는 주초가[☞‘주초(柱礎)’가] 만나는 곳이 있다. 납작한(☞애당초부터 납작한) 주춧돌을 사용하든지 아니면 울퉁불퉁한 주춧돌 상단을 평탄하게 다듬어서 소나무 기둥을 세우면 일도 쉽고 고생도 안 할 텐데(☞텐데, 반대로) 제멋대로 생긴 돌은 그대로 두고 나무기둥의 하단을 돌 모양과 맞게 본을 떠서 정교하게 다듬어 기둥이 수직으로 설 때까지 반복하여 완성되면 올려놓는다. 울퉁불퉁 제 멋대로 생긴 주춧돌을 ‘덤벙주초’라 하고, ‘덤벙주초’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돌과 나무가 한 몸이 될 때까지 다듬고 또 다듬는 일이 ‘그랭이질’이다. 이렇게 오목하고 볼록한 것이 하나가 되게 맞추니 전혀 이질적인 돌과 나무가 바로 하나가 된다.
우리 속담에 배은망덕으로 은혜를 모르는 사람을 일컬어 ‘굴러들어 온 돌이 박힌 돌을 뽑는다.’고 한다.(* 이 부분에 꼭 삽입해야 할 연결어구(連結語句) : 그러나 전통가옥 건축에서만은 위 첫 단락의 내용에 비춰보면, 그 속담이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굴러들어온 못생긴 돌’이 그 몫을 톡톡히 하는 셈이니... . * 하고 많은 어휘 다 두고 위 밑줄 친 ’맞아떨어지지‘를 쓴 이유 : 제재인 ’덤벙주초‘와 ’그랭이질‘이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는‘ 것과 관련된 어휘다. * 이는 문장치료사인 윤쌤이 자주 강조하는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 또는 ’변조(變調)‘와도 관련이 있다. ) 선조(☞우리네 선조) 장인들은[☞장인(匠人)들은] 집을 지으면서도 그 이치를[*어떤 이치? * 모호하다. ☞ ‘요철(凹凸)의 이치’,즉 ‘음양(陰陽) 조화’의 이치를] 적용했던 (☞그대로 적용하고자 했던)것일까? 덤벙대는 (☞이제금 곰곰 새겨보니, 그 ‘덤벙주초’는 ‘엄벙덤벙’에서 온 말인 듯싶다. ‘덤벙주초’의 ‘덤벙-’은) 천진한 어린아이와 같이 제멋대로 생긴 돌이지만 (☞덤벙대는, 천진한 어린아이들을 연상케 한다. 참말로 제멋대로 생겨먹은 돌이지 않던가.)나무보다(하지만, 그 돌들은 그 어떤 나무보다도 먼저, 태고적에) 태어났고(☞태어났으며,) 그곳에도 (☞그 집터, 그 터전에) 먼저 와 있었다. 나무는 나중에 산에서 벌목되어 이방인처럼 그곳에 온 것이다.(☞ 그들 ‘덤벙돌(?)’들 가운데에서도 더러는 장인들 눈에 들어 주춧돌로 뽑혀 가까운 집터로 옮겨갔다. 반면, 재목으로 쓰일 나무는 꽤나 먼 산에서 이방인인양, 그리로, 그것도 덤벙돌보다 훨씬 뒤늦게 그 집터로 옮겨갔을 따름이다. *위에서 ‘덤벙돌(?)’이라고 적은 이유 : ‘덤벙주초’가 있으면, 당연히 ‘덤벙돌’도 있다는 글쓴이만의 상상력을 보탬.)그러기에(☞연결어로서 부적절하다.) '순천 자[☞순천자(順天者;하늘을 따르는 이]는 흥하고 역천자[☞역천자(逆天者;하늘을 거스른 이)는 망한다.‘는(*사실 덤벙주초와 그랭이질을 당하는 재목의 관계는, 순천자와 역천자의 관계가 아니다. 이치적으로 맞지 않은 억지주장의 문장이다. ☞덤벙주초의 원석(原石)으로 볼 수 있는 그 큼지막한 돌들은 그저 하늘이 내려준 대로, 마그마의 분출 대로 만들어진 화강암. 그러니) 하늘의 법칙을 따른 것이고, (☞ 하늘의 법칙을 고스란히 따르는 ’순천자‘라 칭해도 좋겠다.)또 달리 생각해보면 고집불통처럼 생겼고, 덤벙대는 야생마 같이 생긴 돌은 그대로 두고 마음씨 착하고 순종하는 나무를 달래서 덤벙이와 살게 한 것이다. (☞또 달리 생각해보면, ’덤벙주초‘는 ’덤벙-‘이 시사하는 바 덤벙대는 야생마 같기만 하다. 그런데 비해 재목으로 쓰이는 나무는 구부러져 있거나 옹이가 나 있거나 하는 등 ’역천자‘ 같은 구석이 많다. 그러나 장인의 자귀와 대패에 의해 그랭이질과 대패질을 겪으면서 비로소 재목으로 변신한다. 드디어는 덤벙주초와 아귀가 맞아떨어지게 된다. 재목은 아니, 기둥은 목수의 현란한 작업에 순종하여 그랭이질을 겪으면서 순종하게 되니... .)
삶도 그랭이질의 연속이 아닐까?(다시금 덤벙부초와 그랭이질을 새겨보자니,우리네 삶 그 자체와 하나도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인간관계가 형성 되고, 그 와중에 많은 다툼과 시기가 일어난다. 결국 나와 맞지 않거나 너무 달라도 고통을 감내하고 적응하든지,(☞ 바로 이때 그랭이질이 필요하다. 내가 아픔을 감내하고서라도 그 울퉁불퉁한 상대에 아귀가 맞도록 변해야 하는 것이고 ~~ )아니면 헤어지게 된다. 하물며 하루 종일 함께 생활하다시피 하는 부부관계에 있어서는 얼마나 인내가 필요할까? (☞이러한 일은 부부관계에 그대로 나타난다.)화성에서 살다 온 남자와 금성에서 살다 온 여자가 은혼식(결혼 25주년), 금혼식(결혼 50주년), 금강혼식(결혼 60주년)에 이르도록 함께 산다는 게 어쩌면 기적이 아닐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상대방이 나에게 맞추어 주길 바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모난 그가 다듬어져서 나에게 맞춰주기를 바라기 전에 내 마음이 반듯할지라도 모난 그의 마음에 맞추어 나 자신을 그랭이질 한다면 비록 과정이 힘들지라도 아름다운 어우러짐이 될 게 아닌가?
견우와 직녀가 1년에 한 번 오작교에서 만난다는 날은 칠월칠석날이다. 서로가 해로하고 함께 살며 일 년이 아닌 날마다,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소서(小暑)도 지났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더위가 시작될 것이다.
오뉴월에는 부부도 각방을 쓴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각방을 쓰다 보면 서로가 그랭이질은 멀리하게 되고 처음으로 돌아와서 화성남자, 금성여자가 될까 염려된다. 우리나라도 각방 쓰는 부부가 절반이 넘는다고 한다. 그로 인해 대화가 차단되고 자녀들도 부모를 답습하게 된다.
우리 조상들이 천년만년 살아갈 집을 지으면서 어렵고 힘들게 덤벙 주초에 그랭이질을 하여 돌과 나무가 한 몸이 되도록 한 지혜는 무엇일까?(☞ 이제 내 이야기는 다소 논리적 비약으로 이어진다. * 독자들로 하여금 ‘무언(無言)의 양해’를 구하는 효과! 우리 조상들이 ‘다듬주초’ 대신 ‘덤벙주초’를 즐겨 써서 천 년 만 년 살아갈 집을 지은 데는 그밖에도 다른 뜻이 더 있었을 거라는 생각. 아마도 그것은 거기 살게 될 부부가, 덤벙주초와 그랭이질한 기둥이 그러하듯, 서로 ‘아귀맞춤’하여 오순도순 살기를 원함도 녹아 있지는 않았을까?) 그것은 튼튼한 건물을 짓기 위해서 만이 아니라 문턱을 넘을 때마다 부부가 삶 속에서 그랭이질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려니 싶다.
(2017. 7. 7.)
문장치료사 윤쌤(윤근택)의 말]
글쓴이는 분명 무엇을 말하려고는 하고 있다. 그러나 효율적으로 글을 적어버릇하는 데는 아직 미숙하다.
부탁컨대, 양산(量産)도 좋지만, 아직은 한 작품 한 작품을 빚을 때마마 각고(刻苦)의 노력을 기울여 쓰고 고치고를 반복해주기 바란다. 글쓴이의 글이야말로 그랭이질을 퍽이나 자주, 많이 해야겠다.
건필을 빌어마지 않는다.
덤으로, 여러 해 전에 적어 이미 인터넷 매체에 발표한 윤쌤의 아래 ‘덤벙주초(-柱礎)에 관해’를 참고하시기 바라며... .
(다음 호 계속)
‘덤벙주초(-柱礎)’에 관해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업무상 하루 종일 붙어 지내다시피 해도 내 삶에 전혀 도움 되지 않는 이도 있다. 그러한 이는 한마디로 피곤할 따름이다. 환갑을 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루 종일 하는 이야기들은 너무도 저급한 데 머물러 있다. 주식 이야기, 더 이상 욕심 낼 것도 없으련만 작은 조직 내 동료에 관한 험담, 남의 부인들과 노닥거렸던 이야기 등. 숫제, 귀를 씻고픈 적이 많다. 그런가 하면, 간헐적으로 그것도 잠시잠깐씩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이한테서는 얻는 게 참으로 많다. 그의 지식과 교양은 남다르다. 그는 명문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이이기도 하지만, 동양화를 그리는 화백(畵伯)이기도 하다. 나아가서,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유명 통신회사 KT 출신인데다가 종교까지 나와 같으니... .
어젯밤에는 그가, 자기가 근무하는 사감실에서 내가 근무하는 경비실에 잠시 내려와, 끼니거리 곧 ‘오늘의 글감’이 궁해 쩔쩔매는 나한테 ‘한국의 미(美)’에 관해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실은 내가 그의 도움으로(?) 엊그제 신작수필 ‘빨랫줄을 갈고’에서 ‘20세기의 천재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Antonio Gaudiy,스페인, 1852~1926)의 곡선’도 거뜬히 적었노라고 고마움을 표했다. 그랬더니, 그는 덧붙여 ‘곡선’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이다.
“윤형, 전통가옥에는 ‘덤벙주초’가 곧잘 쓰이지 않았던가요? 생긴 대로의 돌을 주춧돌로 삼았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대들보나 기둥이나 서까래도 가급적이면 구부러진 재목이면 구부러진 대로 그 원형을 유지하려고 애쓰지 않았던가요? 우리네 선조들은 그처럼 자연친화적이었어요. 실은 ‘가우디’보다도 훨씬 전에요.”
내가 ‘덤벙주초’라는 게 어떤 주춧돌을 일컫느냐고 되묻자, 그는 아주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어린 날 시골 우리 집을 새로 지을 때 익히 보았던 그 주춧돌이 바로 덤벙주초임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해서, 나의 오늘밤 글감은 자연 ‘덤벙주초’이다.
덤벙주초란, ‘둥글넓적한 자연석을 다듬지 아니 하고 놓은 주춧돌’을 일컬으며, ‘다듬주초’ 내지 ‘다듬주초석’에 대응되는 말이다. 덤벙주초로는 강돌[江石]이 아닌 산돌[山石]이 주로 쓰였다고 한다. 강돌은 미끄럽기도 하거니와 그 성질이 차갑고 음(陰)이라 여겨 꺼려했단다.
‘덤벙주초’의 ‘덤벙-’은 다듬주초인 주초석(柱礎石) 사이사이에 덤벙덤벙 놓은 데서 비롯된 말이라고 한다. 지금부터 적는 이야기는 어린 날 우리 집을 새집으로 지을 때 똑똑히 보았던 것의 재구성이다. 그처럼 생겨먹은 대로의 돌을, 온 동네 장정들이 모여 ‘덜구질’ 하여 흙을 다진 후 기둥 세울 자리에 놓았다. 그런 다음 목수는 주춧돌과 주춧돌 사이에다 먹줄을 튕겨 열 ‘十’이 되도록 하였다. 그것이 기둥을 세울 기준점(基準點)이었던 셈. 목수는 밑면이 반듯한 기둥을 그 덤벙주초에 세웠다. 그런 다음 그 덤벙주초의 요철(凹凸)을 요리조리 보면서, 귓바퀴에 끼운 연필을 오른손으로 빼서 심에다 침을 묻힌 후 기둥의 밑면에 덤벙주초의 요철대로 베껴 그렸다. 그러고는 사정없이 기둥의 밑면을 자귀로, 끌로 연필자국만치 도려내었다. 오늘에야 알았지만, 그렇게 하는 작업을 ‘그렝이질’ 또는 ‘그레질’ 또는 ‘그레발’이라고 이른다. 목수는 자기 맘에 쏙 들 때까지 그렝이질을 했다. 그러고서 기둥을 세웠다. 올록볼록 생긴 주춧돌의 주좌면(柱座面)과 그렝이질을 한 기둥 밑면이 아귀가 딱 맞아떨어졌을 때 그 결합력이란 아주 대단할 거라는 거 미루어 짐작이 되었다. 내가 몇 해 전 손수 창고며 헛간이며 닭장이며 지은 적이 있는데, 편편한 돌을 주춧돌로 삼고 기둥의 밑면을 그렝이질을 전혀 하지 않고 세웠다. 그랬더니, 주춧돌과 기둥이 서로 밀려나 네 기둥이 ‘빙’ 틀어져 기둥들이 단체로(?) 쓰러진 예가 있었다. 그것은 덤벙주춧돌의 위력을 반증하는 일이었다.
우리네 선조들의 지혜는 이처럼 덤벙주초에도 그대로 간직되고 있다. 덤벙주초는 다듬주초처럼 따로 가공을 아니 해도 되는 터라, 일반 살림집에는 거의 다 쓰였다고 봄이 옳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사찰의 대웅전 등 커다란 건물의 주춧돌로도 예외 없이 쓰였다는 거 아닌가. 밀착력과 자연미를 동시에 추구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덤벙주초 외에도 주춧돌은 그 쓰임에 따라 그 모양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다고 한다. 장주초석, 사다리형 초석, 방형초석, 다각형 초석 등. 그리고 주춧돌의 명칭도 몇 된다. 주좌(柱座)는 주초석 위 기둥이 서는 자리, ‘운두’는 다듬초석의 초반(礎盤) 위로 볼록하게 솟은 부분, 초반(礎盤)은 주초석 밑 부분 또는 다듬주초의 밑 부분을 각각 일컫는다.
나는 이 밤 이 글을 적는 동안, 직장동료 ‘김OO’ 화백(畵伯)의 심미안(審美眼)을 새삼 존경하게 된다. 그는 어젯밤 자기 앞에 놓인 대폿잔의 막걸리가 발효가 지나쳐 물이 다 될 지경으로, 우리네 조상들이 생긴 대로의 재료로 집을 짓고 가구를 만들고 생활도구를 만들고 했음에 거듭거듭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자못 진지한 표정과 진지한 말투로 이런저런 우리 조상들이 추구했던 곡선(曲線)에 관해 이야기 들려주고 있었다. 숫제, <<고전미술>> 강의였으나, 전혀 지루하지가 않았다.
다시 온전한 수필작가로 돌아온 나. 나는 덤벙주초를 통해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다시 생각함은 물론이려니와, 새로운 각오를 다진다. 글을 짓되, 지나치게 기교적어서는 아니 되겠다는 점. 너무 다듬다가 보면, 자연스럽지 못하리란 두려움까지 갖게 된다. 일찍이 ‘윌리엄 와트’는 ‘좋은 글 12개 척도’ 가운데 맨 나중에 ‘자연스러울 것’을 들었지 않던가. ‘자연스러울 것’이 곧 ‘덤벙추초’가 보여주는 아름다움과도 같다는 것을. 특히 수필 장르야말로 글쓴이의 생활을 아주 자연스럽게, 생생히 보여주는 특장점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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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벙주초에 관해 2015.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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