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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작가 윤근택이가 신작 및 기발표작 모아두는 곳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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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살신성인(殺身成仁)
    수필/신작 2017. 11. 25. 06:59

     

     

                               두 살신성인(殺身成仁)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둘레에는 악인(惡人)들도 더러 있다. 심지어 흉악법도 있어, 우리를 분노케 하며 인간에 대한 신뢰감마저 떨어뜨리는 예도 있다. 그런데 이따금씩 의인(義人)이나 시민영웅이 나타나, 우리를 행복해하고 감동케 하는 일도 있으니... . 내가 최근에 신문기사를 통해 알게 된 두 살신성인의 주인공에 관한 정보를 내 신실한 애독자들과 공유코자 한다. 두 살신성인 소개에 앞서, 살신성인의 출전부터 살펴보았다.

    살신성인,‘자기 몸을 희생하여 인()을 이룸을 뜻한다. 공자(孔子)가 말했다.

    뜻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살기 위하여 인을 해치는 일이 없고,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바쳐 인을 행할 뿐이다.(子曰, 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

     

    1. ‘또치 선생님

     

    2017.11.11. 그의 환한 얼굴의 영전사진 앞에서 많은 이들이 울고 헌화(獻花)하며, 그의 넋을 기렸다. JTBC는 정규방송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세월호 희생자인 단원고 고창석 교사의 영결식이 열렸습니다. 세월호가 침몰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이들의 탈출을 도운 고창석 교사는 3년여 만에 가족 품에 돌아왔습니다. 가족들은 오늘(11) 마지막 길을 배웅했습니다.

    (중략)

    헌화에 나선 단원고 제자들과 동료 교사들, 그리고 현장에 남은 미수습자 가족들이 마지막 길을 배웅했습니다.

    운구차는 세월호를 돌아 목포신항을 빠져나갔고, 장례식장이 차려진 삼성 서울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짧은 머리카락이 고슴도치를 닮아 또치 선생님으로 불린 고 교사는 단원고 체육교사로 발령받은 지 한 달여 만에 참사를 당했습니다.

    대학생 때 인명 구조 아르바이트를 했던 그는 침몰 당시에도 학생들의 탈출부터 돕다가 결국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중략)

    부인에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는 애들 돌보느라 고생했다. 미안하다.’

    고 교사는 3일장을 치른 뒤 모레(13)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됩니다. >

     

    2. 고 안병하 경무관

     

    2017.11.23. 고 안병하 경무관의 흉상이 제막되었다는 기사를 접했다. 그에 관한 어느 언론매체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올해는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37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197912·12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은 이듬해 517일 확대 비상계엄령을 선포합니다. 계엄령에도 빛고을 광주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는 계속됐고, 신군부는 총칼로 시위를 진압했습니다. 5·18기념재단에 따르면, 168명이 죽고 4,782명이 부상당했습니다. 행방불명자, 암매장, 소각된 사람까지 더하면 5·18 희생자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라남도 안병하 경찰국장(경무관)5·18 ‘숨은 영웅으로 불립니다. 시민을 향해 발포하고 진압에 앞장서라는 신군부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상대는 우리가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시민인데, 경찰이 어떻게 총을 들 수 있느냐고 말했습니다. 안 경무관은 보안사로 끌려가 8일간 고문을 받고, 직무 유기로 옷을 벗게 됩니다. 불행하게도 고문 후유증으로 8년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5·18은 알아도 안병하 경무관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또 다른 언론매체는 이렇게 전한다.

    < 안병하 경무관은 19287월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났다. 평범한 집안에서 자란 그는 양양공립학교와 서울 광신상고를 나온 뒤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학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등과 육사 동기다. 한국전쟁 당시 포병 관측장교로 전투에 임했고, 공을 세워 화랑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군 생활을 하던 안 경무관은 196211월 경찰 총경으로 특채됐다. 부산·강원·경기를 거쳐 19792월 전남 경찰국장으로 발령받았다. 10·26 이후 하나회가 중심이 된 신군부 세력이 들어서던 해였다. 이듬해 5월 광주 대학가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전남대는 병영 집체 훈련 거부 투쟁을, 조선대는 비리 사학 퇴출 시위를 벌였다. 대학가 시위가 확산될 무렵 안 경무관은 부하들에게 지시 사항을 전달했다.>

    아들 안호재 씨가 증언했다.

    아버지는 시위 진압 안전 수칙을 잘 지켜라.’, ‘도망가는 학생들을 뒤쫓지 말라.’, ‘시민 안전에 유의하라.’고 당부했다. 전남대 총학생회장과의 비밀 협상을 통해, 촛불과 횃불을 들도록 유도했다. 시위는 충돌 없이 마무리됐다.”

    그는 끌려가기 전 아내한테 통화로 식구들만이라도 잘 살아라.”라고 전했다. 마침 저녁 식사 중이었는데, 부하 직원에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며 밥 한 그릇 더 달라고 했다. 자기 앞날을 내다본 것이었다.

    고문 받고 나온 안 경무관은 직무 유기 등의 이유로 해직됐다. 부인과 함께 광주를 떠나 서울로 이사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고혈압, 신부전 등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을 다녔지만 차도는 없었다. 안 경무관은 19881010일 생을 마감했다.

    그는 2003광주 민주화 유공자’, 2006순직 판정을 받았다. 안 경무관의 유해는 서울 현충원 경찰 묘역에 안장됐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새롭게 만난 위 두 살신성인의 주인공들. 이제 나는 감히 말한다.

    세상은 참으로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구나! 살다가 보면, 아름다운 이야기도 많이 듣게 되는구나!”

    자기 몸 하나 아끼지 않고 의타적(依他的)으로 살다가 희생한 분들. 아마도 그분들은 전생에도 성인(聖人)이었을 것이다. 거기까지는 결코 닿지 못하더라도, 내 욕심만 채우지 말고, 남을 위한 배려심을 좀 더 가져야겠다.

    삼가 두 분의 명복을 빌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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