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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작가 윤근택이가 신작 및 기발표작 모아두는 곳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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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17)
    수필/음악 이야기 2014. 4. 15. 13:25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17)                     

     

    - 13세 소녀와 16세 소년-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수원에 사는 13세 어느 소녀가 쓴 동시 한 편이 방정환 선생이 발행하는 <<어린이>> 1925 10월호 입선되어 실리게 된다. 우연히 그 작품을 읽게 된 박태준(朴泰俊) 선생(1900~1986)은 그 동시에다 6/8박자 애상조(哀傷調)의 곡을 붙이게 된다. 내 유년시절, 곧잘 눈물을 흘리며 불렀던  오빠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사실 이 동요는 국민동요로 자리하기도 한다. 13세 소녀가 적었다고 믿을 수 없으리만치 좋은 문장인 것 같다. 뜸북새와 뻐꾹새의 대비도 썩 훌륭하고, 오신다더니의 여운도 아주 뛰어나다. 물론 말없음표(‘……’)가 생략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울건만이란 어휘도 어찌 그리 정확히 그 자리에다 갖다 놓았는지 놀랄 따름이다.

    위 동시를 적은 이는 최순애(崔順愛,1914~1998). 그의 남매들은 다들 문학적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홉 살 많은 오빠,최신복은 최초 수필잡지 <<박문>>까지 발간하였으며, <<어린이>> 발행에도 참여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13세 소녀가 적은 동시에다 곡을 붙인 동요를 자주 듣게 되었고 자주 불러댄 셈이다.

    양산에서 태어난 16세 소년이 쓴 동시가 위에서 소개한 <<어린이>> 잡지에 그 이듬해인 1926 4월호에 당선되어 실리게 된다. 그 동시를 발견한 홍난파(洪蘭坡,1898~1941)가 곡을 붙이게 된다. 남녀노소 불문하고,심지어 체제를 달리 하는 북한 사람들까지도 즐겨 부르는 동요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 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사실 이 동요는,다시 한번 말하지만, 남녀노소 불문하고 즐겨 부르는 동요다. 아련한 향수에 젖게 하는 노래다. 이 동시에 관해서는 내가 왈가왈부할 아무 것도 없다. 16세 소년이, 소년 나름의 순수한 정서로 노래한 것이다. 거기다가 민족혼이니 뭐니뭐니 갖다가 붙여서 말한 이들이 많던데, 그것은 한낱 장식에 불과하다. 위 동시를 적은 이는 바로 이원수(李元壽,1911~1981). 그는 후일 아동문학가가 되어, 우리의 아동문학 분야에 여러 가지 공을 세운 분이기도 하다.

    위 두 사람은 위에서도 보여주듯, 동일 문학잡지에 1년 사이로 동시가 각각 입·당선되어 실리게 되었다. 각별한 관계로 발전될 소지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소년 이원수는 소녀 최순애한테 줄기차게 편지를 써댔다. 최순애도 이에 답장을 써 보내게 되었다. 그들 양인(兩人)의 최초 만남 약속장소는 수원역이었다. 서로 얼굴을 못 알아볼세라, 손에는 무엇을 들고 옷은 어떤 색상으로 입으라는 등 아주 고전적(古典的) 약속을 정한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첫 만남은 불발로 끝났다. 청년 이원수는 1935독서회 사건으로 일제로부터 감옥생활을 하게 되면서 그리 되었다.

    1936 6월 둘은 부부가 되었다. 그들이 문학이라는 아니, 동시라는 중매쟁이가 맺어준 지 10년이 되던 해였다. 이원수가 25세 되던 해이며 최순애가 22살 되던 해다. 둘은 슬하에 22녀를 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들의 문학기념관 등은 수원·창원·양산 등지에 있다고 하며, 해마다 이렇듯 좋은 봄날이면 그곳에는 그들을 기리는 문화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사실 이 글을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 시리즈물에 편입해도 될까에 관해서 영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게 대단한 문제는 아닐 것 같다. 내가, 수필작가인 내가 그들을 한없이 부럽게, 한없이 존경스럽게 생각한다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지 않을까?  사실 나는 이 음악 연재물을 적을 적마다 빼어난 작곡가들은 8세 때부터 교향곡을 적었다거나 5세 때부터 피아노곡을 적었다거나 하며 부러워한 것이 한두 번 아니었다. 그럴 적마다 문학 장르의 특성상 문자(文字) 해득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라 그렇다고 자위(自慰)하였다. 그러나 우리 대한민국 문학계에도 십대 소년소녀가 위와 같이 분명히 존재했다는 거. 그러나 아쉽게도 그들 양인이 적은 것은, 동시(童詩)였다. 어른이 아닌, 어린아이가 적은 동시였다. 이 점 주목한다. 그러한데 어린이가 적은 수필은 여태 세상에 나온 게 없다는 점을 무척 아쉽게 생각한다. 몇 몇 분께서는 동수필(童隨筆) 등을 주창한 바 없지 않지만, 도대체 어떠한 내용의 수필을 어떻게 적는 걸 이르는지 나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 40대 이후의 문학이라고 내세웠던 어느 분의 주장(?)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수필은 젊어져야 한다. 사실 경남의 정목일 수필가와 경북의 윤근택 수필가(본인)는 보기 드물게 30대 초반에 수필문단에 각각 데뷔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늦은 나이다. 적어도 20대에 아니, 10대에 수필문단에 데뷔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내가 그러한 일을 나서서 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그들로 하여금 풋풋하고 통통 튀는 이야기를 적도록 장려하고, 그들의 글을 문학잡지에 받아 과감히 싣도록 하면 일은 아주 간단해진다. 앞으로 내가 간여하는(?) 문학잡지 관계자들을 적극 설득해보아야겠다. 위에서 소개한 소년,소녀의 동요가 나한테 이러한 생각을 하도록 부추겼다.

     

     

    (다음 호 계속)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한국디지털도서관(http://yoonkt57.kll.co.kr/)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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