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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먼산 보는 독수리
    수필/신작 2018. 1. 19. 06:25



                                                  먼산 보는 독수리

                           


                                                                                            윤근택(수필작가/ 문장치료사/ 수필평론가)

     

                   나는 다시 모자를 썼다. 이 얼마 만인가. 돌고 돌아 일 년 반 지난 지금 다시 모자를 썼다. 이 모자는 중·고등학교 시절 통틀어 썼던 교모(校帽)가 아니다. 그 교모에는 모교의 로고가 반짝이는 양철로 붙어 있었다. 이 모자는 36개월가량 썼던 군모(軍帽)가 아니다. 그 군모에는 작대기 하나로부터 출발하여 차례차례 장작개비를 쌓듯 네 개의 작대기로 늘어났던 계급장이었다.

                  나는 다시 모자를 썼다. 내 모자에는 맹금류(猛禽類)인 독수리가 흰색 실로 박음질되어 있다. 그 잘나가던 통신회사에서 사무직으로 사반세기 근무하고 명예퇴직을 감행했던 나. 막상 은퇴를 하고 보니, 돌줄이(?) 끊겨 밥벌이가 필요했고, 막노동판도 마다 않고 나섰으며, 인력시장 날품팔이도 해 보았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어느 연수원 사감, 그 연수원 경비원으로 내리 2년여를 근무하였다. 그때에는 모자를 따로 쓰지 않았다. 쥐꼬리 급여였으나, 운신(運身)이 용이하여, 밤마다 수필작품을 퍽이나 빚었다. 그러다가 1년씩 고용계약 끝에 두 번째 해 끝에 가서 해고를 당했다.

                   그런 다음, 그 바닥, 경비원 세계를 알게 되어, 본격적으로 아파트 경비원 자리를 전전하게 되었다. 근무조건 등이 비교적 나은 자리로 도대체 몇 차례나 옮겼던가. 속된 말로, 수틀리면 다른 곳으로 옮겨가곤 했는데... . 그러다가 아주 팔자를 고쳐, 기술력도 꽝인 내가, 간도 크게, 아파트 전기주임 자리에서, 두 군데씩이나 무려 일 년 반 정도씩이나 근무하였다. 24시간 교대근무라고는 하나, 시간이 많아, 본디 밤잠이 없는 나는 밤마다 무진장으로 수필작품을 빚었다.

                   어쨌든, 나는 돌고 돌아 다시 맹금류인 독수리가 수놓아진 모자를 썼다. 오늘 낮에는 경비실에서 잠시 모자를 벗게 되었다. 머리카락은 모자에 짓눌려 엉클어질 대로 엉클어졌음을 잠시 거울을 통해 보게 되었다. 다들 경험하였겠지만, 모자를 계속 쓰고 지내면 비듬 등이 생겨 머리 밑이 가렵기 마련이다. 지금 내 사정이 그러하다. 하더라도, 이 모자가 고맙기 한량없다. 적정 수준의 월 급여를 내 통장에 실어줄 것이고, 더 이상 반백(半白)의 머리카락을 주기적으로 염색치 않아도 되게 할 것이다. 내 나이를 숨겨줄 것이다. 사실 집의 나이 예순 둘에 접어든 나는, 아파트 경비원으로서는 골든 에이지(golden age)이다. 돈에 더 욕심을 부리자면, 이곳저곳 골라서 갈 수도 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할 의향이 없다. 조원(組員)들과 마음을 맞추고, 입주자들과 마찰만 없으면, 일흔이 넘을 때까지 이곳에서 머무르고 싶다. 내 가족이 사는 아파트에서 승용차로 7분여 걸리는 이 아파트.

                  나는 어쩌자고 그 동안 태무심(殆無心)했던 이 모자의 독수리를 찬찬히 들여다보게 되었을까? 무궁화 잎인지 월계수 잎인지 우수우상복엽(偶數羽狀複葉; 짝수 깃털꼴 잎) 두 잎이 양 갈래로 떠받는 무궁화 문양 위에 날카로운 발로 디디고 선 독수리. 그 독수리는 날개를 활짝 펴고 있다. 실물로 본 독수리는 깃털이 검기만 하거늘, 이 독수리를 비롯한 모자의 심벌은 오로지 무채색인 흰 색이다. 한마디로, 가짜 독수리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독수리가 고개를, 모자 차양을 잡은 상태에서 들여다보면, 우측으로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 형상을 보다가 나 혼자서 얼마나 웃어댔는지.

              ‘ 이 독수리는 먼 산 보는 독수리야! 외면하는 독수리야!’

                   아파트 경비원은 그 문양대로 행해야 한다는 것을. 사실 여러 해 경험으로 아는 일이지만, 더러는 모진 입주자들이 입버릇처럼 내뱉는 말이 있다.

              “ 관리소장, 저렇게 꾸벅꾸벅 졸 거면, 뭐하려고 그 비싼 관리비까지 물어가면서 썼어? 저 아저씨 당장 내어보내.”

                  사실 용역회사에 소속되어 있는 아파트 경비원은 파리 목숨이다. , 거슬러 용역회사도 입주민 요구를 거절할 수 없다.

                  또, 어떤 입주자한테 찍히면, 이런 말을 듣기 일쑤다.

             “ 101동 담당 경비원이 누군가요? 화단에 담배꽁초가 엄청 많건만, 도대체 청소를 하기는 해요?”

                  위와 같은 게 고정 메뉴다. 하지만, 실상 그렇게 요란을 떠는 입주자가 매월 무는 관리비 가운데 경비원 등 관리요원 급여분은 불과 오천 원 안팎인 걸 우리는 잘 알고 지낸다. 담배 한 갑 값에 지나지 않는데, 그렇게 유세부릴 것까지야?

                   그분들께 이참에 전할 말이 있다.

               “ 아파트 경비원이란, 먼 산을 보는 독수리인 걸요. 집집마다 이중삼중 잠금장치가 되어 있는 등 보안조치가 잘 이뤄진 마당에... .

                  늙은이들이 측은하지도 않아요? 틈만 나면 잘 졸아야 근무를 잘 하는 거라고 왜 여기지 않으세요? 그래야 화재경보 등이 발생하면, 곧바로 달려갈 게 아녜요?”

                   내 모자 독수리 문양의 특징 하나 더. 새겨본즉, 먼 산을 보기도 하지만, 외면하는 형상이기도 하다는 것을. 가급적이면 입주자들과 말을 섞지 말라는 게 이 바닥의 불문율이다. 너무 멀리도 너무 가까이도 하지 말라는... . 그것이 외면하는 독수리 형상으로 나타났으리니.

                   이곳저곳 옮겨다녀본즉, 아파트 경비원은 줄서기다. 흔히 말하는 꽃보직도 있다. ‘돈 나오는 모티(모퉁이)는 죽을 모티라고 했다. 급여가 나은 곳은 그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다. 눈높이를 낮추면, 덜 고달프다. 이번에는 내가 제법 줄을 잘 선 듯하다. 아직은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첫 느낌은 아주 중요한 거라서... .

                   고등학교 시절, 어느 국어선생님은 꽤나 고상하였고, 감성적이었으며, 문학적 소양도 지니고 있었다. 그분은 교과서에 실리지 않은 옛 시조 등을 잘도 읊어주곤 하였다. 이렇게 까맣게 시간이 흐른 다음에도 그분이 칠판에 적어주던 작가미상(인터넷 검색창에다 아무리 쳐보아도 나타나지 않았으니, 내가 작가미상이라고 할밖에!)의 명시(名詩)가 새삼 떠오를 게 뭐람?

     

                  월만월반월(月滿月半月),

                  승노승소승[僧老僧少()

              

                풀이하면, 이렇다.

              ‘달은 보름달이 될 적에 한 달 가운데에서 반 달이다. 스님은 노승임에도 자신을 언제든지 소승이라고 겸손되이 말한다.’

     

                   내가 왜 전체 흐름에 저해될 성싶은 위 단락을 지었겠는가. 특히, 나는 많은 수필작가들과 수필작가 지망생들한테 단락의 원리가운데 일관성통일성을 종종 주장해 왔으면서.

                  위 시에, 내가 한 연()을 더 보탤 게 있어서다.

             ‘월만월반월이요,

                  승노승소승인데,

                 경비원은 아무리 늙어도 경비원 아저씨로만 불려요.’

     

                   고사리손의 아가가 경비실 앞을 지나치며, “경비원 아저씨, 안능(안녕)하세요?” 할 적에 느끼는 희열과 행복감. 아마도 겪어보지 못한 이들은 그 기분 알지 못하리.

                   끝으로, 동료이자 연장자인 2초소 경비아저씨한테 어제 내가 먼산 보는 독수리 문양 이야기를 하자, 그분이 하던 대꾸를 보태며 글 줄이려 한다.

              “그래도 이 모자엔 금테가 둘러있지 않은감?”

     

     

                작가의 말)

     

                   내 신실한 애독자들께서 며칠 간 나의 글을 읽지 못하였다. 나 역시 급격한 생활 패턴 변경으로, 몸살이 나 있었다. 하던 지랄인(?) 글짓기를 못하여서 그리 되었다. 해서, 비번인 틈을 타서, 이 농막에서 새벽같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러자 온몸이 풀리는 듯하다. 신기한 일이다. 역시 나한테는 글짓기만이 유일한 피로회복약임을.

                  그리고 또 하나. 선인들의 가르침 가운데에는 물은 그릇 모양에 따라 담긴다도 있다. 어디 물만이 그러한가. 이 대한민국의 수필작가 윤근택도 그러하다는 것을. 그때그때 사정에 따라... .

     

     

    오늘의 음악 듣기)

     

    알베니스의 '아스투리아스'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본인의 카페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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