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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트라우마(trauma)
윤근택(수필작가/ 문장치료사/ 수필평론가/설치미술가)
젊은 날, 직장동료들과 어울려 고스톱 화투를 곧잘 즐긴 적이 있다. 그 고스톱판에서는 명언(名言)들이 많기도 하였다. 그 명언들은 철학이 묻어나는 것들도 많았다. 오늘은 그 가운데 하나를 소개해야겠다. 바로 ‘집 나간 가시나(가시내;딸), 아(아이) 배어서 돌아온다.’하는 말. 판에 깔린 쌍피(雙皮)를, 자신이 들고 있던 화투장으로 따먹었는데, 하필이면 그 ‘젖힘’이 같은 달[月] 그림이면, 이른바 ‘설사’를 하게 된다. 바로 이때 자신을 위로하는 말이 ‘집 나간 가시나... .’이다. 즉, 그 석 장을 운좋게 다시 ‘젖힘’ 등으로 따오게 되어, 상대 둘로부터 각각 ‘쭉정이’한 장씩을 가져올 수 있다는 자위(自慰)의 말.
이 산속, 내 ‘만돌이농원’에도 며칠 전‘집 나간 가시나, 아 배어 온’일이 있었다. ‘젖꼭지 나옴’으로 보아, 어느 곳에서 아이들을 낳았을 듯한 녀석. 친정에(?), ‘산후 배고픔’을 달래려고 몰래 찾아들어, 뭐 먹을 게 없나 둘러보다가 내 눈에 들키자 슬슬 농로(農路)로 도망가고 있었다. 그 흰 털색이며 몸집이며 슬슬 사람을 경계하는 모습이며... 종합해보면, 본디 내 아이가 분명하다. 정말로, ‘우째(어찌) 이런 일이?’다.
시계바늘은 수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작은딸은, 자기 절친했던 친구, ‘세정’이가 결혼하게 되자, 그 친구가 친정에서 기르던 애완견 한 쌍을 맡아 와서 내 농장에 데려다 주었다.
“아빠가 적적할 테니... .”
해서, 나는 흔쾌히 그 애완견 한 쌍을 내 농장 마당에 목줄을 달아 매어놓고 지냈다. 녀석들은 참으로 온순했으며 사람을 잘 따랐다. 녀석들의 이름은 각각 ‘태풍이’, ‘태순이’. 마침 녀석들을 데려오던 날, 태풍이 몰아쳤기에 내 딸아이들 둘은 곧바로 그렇게 이름 붙여주었던 게다.
그러했는데 일이 자꾸 생겨났다. 그 조그만 몸집의 계집애인 ‘태순이’가, 어쩌자고 숯골못[炭谷池] 암자(庵子)의 그 몸집이 큰 누렁이와 연애를 했던 것인지. 그로부터 정확히 63일 만에 태순이는 ‘몸을 풀었고’, 앙증맞은 아가들은 무럭무럭 자랐다. 그때 태순이는 본능적으로 모성애를 보여주었다. 제 어린것들이 순차적으로 나오자, 탯줄을 자기 이빨로 잘근잘근 끊어주는 등.
세월은 거듭거듭 흘러갔다. 개들의 수효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만 갔다. 그것들 족보도 내가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부녀지간, 남매지간에도 근친상간을 하는 등. 나는 그것들을 통제할 재간도, 통제할 생각도 없었다. 나도 이처럼 산골에 들어와 그 누구의 간섭도 없이 자유분방하게 사는 터에. 그게 화근이었다. 그것들한테 목줄도 아니 채운 채 마냥‘오냐, 오냐’ 했더니, 밭이웃들이 작물을 해치거나 닭장의 닭을 해친다고 원성(怨聲)이 자자해졌다.
일이 그 지경에 이르자, 나는 백방(百方)으로 노력해 보았다. 동물병원에 가서 통사정하여 ‘수면제’ 내지 ‘안정제’를 사다가 멕인 후 목줄을 채워보려고도 했으며, 119에 신고하여 대원들로 하여금 마취총을 쏴보기도 하였다. 한편,‘침 흘리는(?)’ 미식가들한테 공짜로 몰아가도록 한 적도 있고.
그러했음에도 현재까지 그것들 ‘태풍이’와 ‘태순이’의 씨를 지우지 못하였다. 뒷산 울타리 안에는 아직도 그 후손들 세 녀석이 살고 있다. 물론, 목줄이 없는 ‘알 강아지들’이다. 주인인 나마저도 잡을 수 없는 ‘가깝고도 먼 당신들’. 모질게 이야기하자면, 사료값도 못하는 녀석들이다.
한편, 지난해에는 또 종자가 벌어, 네 녀석이 내 농장 둘레에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게 되었다. 왜 다들 그러하지 아니하던가. ‘이녁(자기) 새끼는 아무리 말썽을 피워도 이쁘기만 하다.’는 거. 내가 승용차를 몰고 와서 농장 앞 개울가 농로에 세우면, 어디에선지 마구 쏜살같이 달려와 꼬리를 치던 네 녀석들. 한 동안 그렇게 지냈건만, 나와 그것들한테 불행한 일이 생겨났다. 지난봄에 고인(故人)이 된 개울 건너 ‘김 형님네’ 집으로 그 네 녀석이 가버린 것이다. 주인인 나의 푸대접보다는 그 마음씨 곱던 ‘김씨네’ 융숭한 대접(?)이 나았던 모양. 마침 그 댁에도 개를 기르고 있었고, 질 좋은 먹이를 끼니마다 내어놓고 있었으니, 내 어린것들은 얌체처럼 그렇게 얻어먹으러 가곤 했다. 그러다가 아예 그 댁에 눌러 살았다. 부득이 나는 그 댁에, “형님, 제 어린것들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따금씩 사료를 사다드릴 테니까요.”약조(約條)를 하게 이르렀다.
나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윤 과장(나의 택호임.), 자네가 맡긴 개들 말일세, 오늘도 한 마리 개울가에 죽었어. 포도농사를 하는 마을 사람들이 너구리들이 포도 훔쳐간다고 농약을 놓았다더니만... .”
그리하여 네 마리 가운데 세 마리가 차례차례 죽어나갔고, 나머지 한 마리는 끝끝내 자기 생명을 부지하는 모양. 동물애호가들이 이 이야기 들으면, 나를 ‘동물학대’로 고발할는지 모르겠으나, 그렇게 죽어나갔음에도 오히려 ‘시원섭섭했다.’ 왜? 녀석들은 내 밭 이웃들한테 피해를 곧잘 입히곤 하여 민원을 샀으니까!
자, 이제 다시 ‘집 나간 가시나(나는 그 녀석한테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다.)’이야기다. 이미 위에서 이야기하였지만, 그 ‘김 형님’이 71세를 일기로, 봄날 세상을 떴다. 네 마리 가운데 마지막 남은 한 마리를 끝끝내 거두어주던 분인데... . 그러자 더 이상 오갈 데 없다고 여긴 녀석은 아주 들개가 되어 버렸다. 아니, 거지가 되었다. 아니아니, 어느 집에 가서 첩실(妾室)이 된 듯. 어쩌다 한 번씩 자기 친정인 내 ‘만돌이농장’을 기웃거린다싶더니... . 엊그제 그처럼 늘어진 젖꼭지를 덜렁대며 내 농장 가까이 오고 있었던 게다. 얼마나 가슴이 아프던지. 그래서 나는 내 농막 처마 밑에다 돼지고지며 빵이며 사료며 온갖 간식거리를 담아놓곤 한다. 어제 내 농장에 잠시 들렀던 아내한테도 그 숨겨진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나처럼 가슴 아파했다.
“현지 아빠, 젖꼭지가 나왔던가요?”
내 이야기가 꽤나 장황했다. 모두 내 잘못이다. 그 녀석한테도 어떤 트라우마가 대물림되어 왔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인간으로부터, 아니 자기 주인으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하여... . 녀석이 어느 처마 밑에서 자기 아이들한테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었는지도 여태 살펴보지 못한 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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