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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에 관해농장소식/'만돌이 농원' 2019. 2. 27. 15:53
‘외로움’에 관해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은 ‘에베레스트’. 그 높이는 해발 8,850미터 혹은 8,848미터. 네팔과 중국의 국경지대에 자리하며, 네팔 사람들은 ‘사가라마타(하늘의 이마)’ 혹은 ‘초롱룽마(세상의 어머니)’로 부른다고 한다. 영국의 측량사 ‘조지 에버리스트(George Everest)’가 높이를 측정했다 하여 그 공로를 기려 붙여진 산 이름이라고 한다.
한편,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은 백두산. 그 높이는 내 고향마을에 사는 백씨(伯氏)의 전화번호 뒷자리 ‘2744’와 정확히 일치하는 터라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은 한라산. 그 높이는 해발 1,950미터. 나는 이 수치 또한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한 번 구경 오십시오.’로 풀이할 수 있기에. 하지만, 60 평생 한 번도 제주도 ‘구경’을 해본 적 없다.
자, 내가 왜 위 세 개 산 높이를, 시쳇말로 뜬금없이 끌어들였을까? 봄이 오는 길목, 내 농막 뒤란 양지쪽에 놓인 흔들의자에 앉아, 멀리 ‘선의산(仙義山)’ 산자락을 바라보다가 ‘어떤 외로움’을 생각해 내었기에. 참, 선의산을 간략히 소개해야겠다. 선의산은 내 농장이 있는 ‘경산시 남천면 송백리’와 ‘청도군 청도읍 운산리’를 가르는 산으로서 그 높이가 해발 757.1미터이며, 명산(名山)으로 알려져 있다. 경산시 지정 등산로이기도 하다.
지금부터 내가 위 단락에서 흘려놓은 어구(語句), ‘어떤 외로움’의 정체를 본격적으로 이야기하려 한다. 에베레스트든 백두산이든 한라산이든 선의산이든 그들 산은 제각기 높아서, 산 스스로는 그 높이만치나 외로울 테지. 그러한데 그러한데... 종종 내가 여러 산 중턱이나 고갯마루를 바라볼 적에 예외없이 그야말로 ‘객쩍은(客쩍은←객적은)’ 나그네가 그곳에 자리하며, 그들은 오로지 타의(他意)에 의해 외로움과 인고(忍苦)를 맛보고 있더라는 거. 바로 고압전선을, 마치 빨랫줄을 바지랑대로 괴듯‘괴어 받친(?)’ 송전탑. 사실 거대한 송전탑은 남들이 거들떠 봐 주지도 않는 그곳 산자락 또는 산마루에 언제고 한 자리에 서 있더라는 거 아닌가. 지금 내가 농막 뒤란 양지쪽 흔들의자에 앉아 바라보는 저 선의산 산 능선에도 일정 간격을 유지하며 송전탑이 서 있다. 외로움 ‘한껏’이 아닐 수 없다. 우리네 인간들한테는 전열(電熱)과 조명(照明)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전해주는 무생명의 구조물이기는 하지만... . 송전탑 사이사이에 늘어진 고압전선도 쓸쓸함과 서글픔을 더해주기는 마찬가지. 내 지난 직장의 선배이자 원로 시조시인인 박기섭(1954~). 그는 198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했다. 그 당선작은 ‘閑秋餘情’으로서 내가 그이로부터 직접 들은 내용이 얼추 기억난다. 시인은 자신의 남동생이 어린 나이에 죽었는데, 그 섭섭함과 그 섭섭함에 이어지는 쓸쓸함을, ‘가을날 마당에 드리워진 빨랫줄을 바지랑대로 받쳐놓은 듯하다’고 노래하고 있다.
閑秋餘情
1
바지랑대 받쳐놓듯 섭섭한 이 가을날
못다 꿰맨 인연 끝에 실밥이 드러나고
서정의 풀씨를 받는 차 한 잔의 그 아미(蛾眉).
2
네 생각 강여울에 먼 인연의 목선 하나
산빛 물빛 무상(無上) 좋은 가을 속을 저어와서
이승의 저자 전전(廛廛)을 기웃대는 전생(前生)의 삶.
3
내 시름의 먼 벗이 와 굵은 테 안경을 닦으면
그 눈썹에 실려 온 산이 윗목에 가서 앉고
가을은 산을 내려와 몇 점 원경(遠景) 다가선 뜰.
저 선의산 산자락에 자리한 송전탑과, 쳐진 고압선이야말로 박 시조시인이 노래했던 대로 ‘바지랑대 받쳐놓듯 섭섭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 일찍이 유치환(柳致環, 1908~1967)은 ‘깃발’을 이렇게 노래했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이념의 푯대’는 아닐지라도, 고압선을 떠받든 저 송 전탑. ‘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은 아닐지라도, ‘맨 처음 저 산자락에 송전탑을 세우고 고압선을 달 줄을 안 그는’ 대체 누구일까? 송전탑, 그것이 만약 산꼭대 기이면, 무수한 등반가들이 앞 다투어 오를 테지만, 그 것을 탐하는 이는 없다. 어쨌든, 송전탑은 남들이 거들 떠보지 않는 곳에서 호젓이 인고의 세월을 맞는 존재임 에는 틀림이 없다. 산술적으로 따지면, 자기가 자리 한 산에서 가장 높지만, 티내는 구석이 전혀 없는 듯하 다. 마치 철로(鐵路) 아래 켠에 자리한 갱목(坑木)처 럼, 송전탑도 숙명인 양 자기 몫을 묵묵히 다 하고 있다는 것을. 저기 선의산 꼭대기에 서 있는 송전탑. 마치 거인(巨人)같기도 하며, 그리스 신화 속 인물‘시지푸스 (Sisyphos)’도 떠올리기에 족하다.
이 호젓하기만 한 산 속 외딴 농막. 양지바른 농막 뒤란 흔들의자에 앉아, 나는 여태 선의산 산꼭대기의 송전탑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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