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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중앙역은'수필/신작 2019. 4. 10. 01:28
‘프라하 중앙역’은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위키백과’는 그에 관한 일화를 이렇게 적고 있다.
<철도광(鐵道狂)이었던 그는 딸의 연인이었던 요제프 수크(그의 제자로, 후에 프라하 음악원 원장. 바이올린니스트인 수크는 그의 손자.)에게, 새로운 기관차의 제조 번호를 조사해 오도록 부탁하였지만, 기관차에 익숙하지 않은 수크는 잘못된 번호를 보고하였다. 그는 진지하게 화내, 딸에게, “너는 이런 멍청이와 정말로 결혼할 생각이냐?”하며, 진심으로 결혼을 반대하였다.>
한편, ‘다음백과’는 그의 생애를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보헤미아 지방의 민속자료를 19세기 낭만음악 양식 속에 바꿔 넣은 것으로 유명하다. 주요작품에는 〈슬라브 무곡〉(1878), 교향곡 9번 〈신세계〉(1893), 〈유모레스크〉(1894) 등이 있다.
그는 보헤미아(지금의 체코) 지방 프라하의 북부 블타바 강변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1857년 그의 음악선생은 그의 비범한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고서 아버지에게 프라하에 있는 오르간 학교에 입학시킬 것을 권했다. 1875년 신진 예술가에게 주는 오스트리아 정부의 국가 보조금을 받았고, 이것을 계기로 만나게 된 브람스와 계속해서 두터운 우정을 맺게 되었다. 〈모라바 2중창곡〉(1876)과 피아노 2중주 〈슬라브 무곡〉으로 세계적인 관심을 얻었고, 이것을 계기로 보헤미아 음악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음악은 당시 주요평론가들과 연주자·지휘자들로부터 찬탄을 받았고, 그의 명성은 계속해서 외국으로 퍼져나갔다. 그의 음악적 매력은 주로 풍부한 선율,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소박함, 단순미에 있다. 모든 음악 장르를 섭렵해서 골고루 명곡들을 남겼으며, 오페라에서만 지속적인 성공을 거두는 데 실패했다.>
그가 대체 누구? 바로 ‘안토닌 레오폴트 드보르자크(체코어: Antonín Leopold Dvořák, 1841 ~ 1904)이다. 그는 51세가 되던 해에, 미국 뉴욕에 새로 설립된 국립음악원 원장직으로 초빙되어 가게 된다. 그는 그곳 미국에서 여름휴가를 얻어 어느 한적한 곳에서 쉬면서, 흑인영가와 두고온 고향에 대한 향수, 그밖의 요소들을 버무리어 그 유명한 <교향곡 9번(신세계로부터)>을 적게 된다. 또한, <현악4중주곡(아메리카)>도 적게 된다. 나는 그 현악4중주곡 가운데에서도 제2악장 렌토(Lento)를 들을 적마다, 눈물이 날 지경이다. 그가 향수를 그렇게 적었던 모양이다. 한편, 그는 위 첫 단락에서 이미 소개하였지만, 열차광이어서 열차 여행을 곧잘 즐겼다고 한다. 그는 열차 바퀴 소리에서 영감을 얻어, <유모레스크>도 적게 된다. 사실 그가 3년 여 미국이라는 신세계에 머물며 적은 위 3곡이 대표작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 .
그에 관해 내가 취득한 추가정보는, 아침마다 산책을 즐겼는데, 귀가하면 자기 아내의 구두와 딸의 구두를 반질반질 닦아주었다는 거. 그러한데 ...... 일전 내가 즐겨듣는 KBS F.M. ‘전기현의 세상의 모든 음악’에서는 그에 관한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었다는 거 아닌가. 그는 매일 자기 고향집과 가까운 ‘프라하 중앙역’에 나가곤 했단다. 그것이 일상이었단다. 그는 그곳 역 대합실 의자에 앉아, 유럽 각지로 떠나는 기차와 유럽 각지에서 도착하는 기차를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심지어 모든 열차의 시간표도 좔좔 꿰고 있었단다. 모르긴 하여도, 그는 모든 열차의 도착과 출발 순간을 오선지 속 음표로 차례차례 바꿔치기 한 듯. 그는 또 낯선 곳으로 기차를 타고 떠나고 싶었을까? 아니면 미지(未知)의 연인을 끝끝내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전기현의 세상의 모든 음악’에서 그 새로운 사실을 전해 듣자니, 문득 겹쳐지는 장면이 셋 있다. 그 한 장면은 ‘곽재구’시인의 ‘사평역(沙平驛)에서’다.
사평역(沙平驛)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또 한 장면은 나의 첫 수필집 <독도로 가는 길>에 실린 짧은 수필,‘플랫폼에서’다. 어느 여류 수필가는 나의 작품 ‘플랫폼에서’가 ‘사평역’을 능가한다고 평한 적도 있다. 그녀는 심지어 그 작품을 통째로 외우기까지 하였다. 울릉도에서 2년 여 근무하던 중 잠시 육지로 나와 어느 기차역 플랫폼에서 서성대던 내 심정을 그대로 노래한 것이었다. 마땅히 가야할 곳도 없는 ... 철로에 파찰음(破擦音)을 일으키며 달아나던 기차. 지면(紙面) 관계상 나의 그 작품 소개는 생략키로 한다.
‘드보르자크의 프라하 중앙역’에서 겹쳐지는 마지막 한 장면. 바로 내 농장이 자리한 경산시 남천면 송백1리의 동구(洞口). 그곳에는 시간당 한 대 다니는 시내버스 승강장이 있다. 그곳 승강장에는 벤치가 있다. 비와 바람과 햇빛을 대충 가려주는 지붕이 있긴 하다. 마을 ‘성호 형님’ 모친이 청려장(靑藜杖)을 잡은 채 종종 그 벤치에 앉아 계시곤 한다. 그분은 구순(九旬)이다. 그분은 왜소하지만, 흔히들 말하는 치매기(癡呆氣)는 전혀 없다고 들었다. 정작 그분 아들 내외도 자기 모친이 왜 틈만 나면 그곳에 나가 앉아 계시는지 모른다고 한다.
“윤 과장(나의 택호임.), 우리 내외인들 어머니의 그 속마음을 어떻게 알겠어?”
그 할머니는 먼저 저승에 가 계신 영감님이 시내버스를 타고서라도 돌아오기를 내내 기다리는 걸까? 아니면, 내려가는 시내버스를 잡아타고 도심(都心)으로, 아니 젊은 날로 천장만장 떠나고 싶은 걸까?
다시 ‘드보르자크의 프라하 중앙역’ 이야기로 돌아온다. 그곳은 거의 매일 드보르자크가 머물렀던 관계로, 요즘은‘드보르자크 기념관’몫까지 톡톡히 하고 있단다. 나는 인터넷을 통해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그곳에 잠시 가볼 수 있었다. 0층은 버스정류장 및 주차장, 1층은 기차 플랫폼, 2층은 지하철 플랫폼, 3층은 매표소로 각각 되어 있는 역. 그곳에서 드보르자크는 매일 만남과 헤어짐을 목도(目睹)하였을 터. 그는 반가움의 순간과 슬픔의 순간과 섭섭함의 순간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포착하여 오선지 위에다 그대로 옮기지나 않았을까? 그야말로 그 많은 영감을 그곳 프라하 중앙역에서 얻었을는지도 모르겠다.
관련 음악 듣기)
드보르자크 현악 4중주 제12번 [아메리카] [제2악장]
2016.12.03.
in G flat Major Op.101-7(드보르작 유모레스크)
2019.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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