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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 따먹기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나는 어느 아파트 경비초소에 앉아있고, 저기쯤 아파트 공원 벤치에는 젊은 엄마와 어린아이가 서로 떨어져 앉아, ‘가위· 바위 ·보’를 거듭거듭 한다. 저들 모자(母子)의 한 쪽 손에는 아카시아 잎으로 보이는 잎이 각각 들려 있다. 젊은 엄마는 긴 생머리이고 봄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자주자주 쓰다듬어 올린다. 한마디로, 아름다운 광경이다. 저들 모자는 ‘잎 따기 내기’를 저렇게 하고 있다.
저 광경을 보노라니, 내 과거는(?) 속일 수 없어, 이내 ‘수목학’ 전문용어를 아래와 같이 되뇌게 된다.
‘아카시아 잎은 ‘기수1회 우상복엽(奇數一回羽狀複葉; 홀수한번깃모양겹잎)’. 같은 콩과[荳科]의 회화나무 잎도 ‘기수 1회 우상복엽’. 하지만, 같은 콩과의 자귀나무의 잎은 ‘우수2회 우상복엽(偶數二回羽狀複葉;짝수두번깃모양겹잎)’. 자귀나무의 잎은 짝수이고 밤마다 그 잎들이 일제히 포개서 자기에 부부 금실을 상징한다 하여 음양합일목·합환목(合歡木)·합혼목(合魂木)·합혼수·야합수·유정수라고 두루 부른다.’
어찌 되었든, 저들 모자는 ‘내기’ 내지 ‘겨루기’에 행복해 하는 순간임에는 틀림없다. 내기나 겨루기는 언제고 긴장을 주어 살맛을 더해주는 일.
내 생각은 어느새 유년시절로 되돌아간다. 또래들과 어울려 저 모자처럼 ‘아카시아 잎 따기’도 했다. 진달래 암술, 수술로 ‘고 걸기’내기도 하였다. 그밖에도 구슬치기, 비석치기, 딱지치기 등 여러 놀이를 즐겼다. 그 많은 내기들 가운데에서도 비교적 생산적이며 작업능률도(?) 꽤나 더해주었던 게 있으니... . 그게 바로 ‘꼴 따먹기’였다. 그때는 집집이 마구간에 일소[役牛]가 있었고, 이른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그 일소들의 주식과 간식은 주로 조무래기들인 우리가 장만해야만 했다. 당시에는 ‘꼴머슴’도 더러 있었다. 봄날, 우리는 싸리로 엮은 다래끼를 메고 호미를 들고 꼴을 캐러 들로 산으로 가야만 했다. 냉이 ·꽃다지·지칭개·달맞이꽃 등 보이는 족족 경쟁적으로 캐서 다래끼에 담아댔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불쑥 제의를 하게 이른다.
“우리 이제 꼴 따먹기 하자. ”
지금은 고인이 된 뒷집 ‘태운’이가 주로 그런 제의를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사실 그 녀석은 농땡이 기질이 있었던 관계로.
우리는 저만치 땅 위에다 동그라미를 그리고 이만치에다 금을 그었다. 그리고는 제각각 자기 다래끼에서 한 움큼씩 꼴을 내어 걸었다. 그것들을 한 군데에다 뭉쳤다. 그 다음에는 순차적으로 자기가 들고 있던 호미를,‘금 밟기 없기! 발이 금 넘어가기 없기!’하면서 그 동그라미를 향해 던져댔다. 물론, 호미의 자루든 날이든 상관없이 그 동그라미에서 가장 가까이 날아간 호미의 주인이 그 판에서는 장땡이었다. 꼴을 몽땅 가져가서 자기 다래끼에 담는... . 그것이 피로를 달래는 수단이기도 하였지만,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 판돈을(?) 더 늘리기 위해 좀 더 부지런히 꼴을 캐곤 했던,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는 거. 우리는 여름날 지게를 지고 꼴을 베러 갔을 때에도 꼴 따먹기를 하곤 했다. 우리네가 들고 다녔던 낫이 ‘장두낫’으로 일컫던 조선낫이라 목이 부러지는 등의 사고는 거의 없었다. 대신, 뙤약볕에 풀들이 숨죽는 바람에, 번번이 내기에서 꼴을 따서 지게에, ‘(똥) 장군이 지어’ 실어도 실어도 좀체 불어나지 않았던 기억.
저 아파트 공원 벤치에서 ‘아카시아 잎 따기’를 하던 모자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공동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비해 경비초소를 지키는 나는 ‘시간과 싸움’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다. ‘시급제(時給制) 8,350원’. 온갖 잡념도 속된 말로 모조리‘쩐이 되니까’유년시절의 아련한 추억에 이렇듯 잠겨보기도 한다. 지금 나는 ‘꼴 따먹기’를 하는 게 아니라, 숫제 ‘시간 따먹기’를 하는 중이다.
그래도 이 말만은 하고 내 이야기 접어야겠다. 그것이 ‘정보의 바다’라고는 하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스마트 폰’이 유일하고 획일적인 유희수단인 시대에, 그나마도 그들 모자의 ‘잎 따기 내기’를 통해 내 유년시절 한 자락을 추억하고 있었다는 거 그것만으로도 즐겁다. 그러기에 어떠한 점에서는 시골에서 자라난 내가 그 누구 못지않은 부자.
이참에 암 송아지 한 녀석을 사다가 내 농장에마구간을 짓고 어디 한 번 길러 볼까? 그리고 장차 훌륭한 일소가 될 때까지 정성들여 길들여 볼까? 어느새 환갑 진갑을 다 지난 옛 친구들도 불러 모아 꼴 따먹기 놀이도 다시 한 번 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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