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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P3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요즘 농부들은 MP3를 들고 다니는 게 유행이다. 대체로, 많은 농부들은 내외간에 혹은 혼자서 진종일 들에서 일을 하게 되는데, 말 벗만 있어도 힘이 난다. 그러기에 지게에다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달고 다닌 예가 많았다. 그러했던 것이, 손바닥만한 MP3로 바뀌어가는 추세다. 내 밭 이웃 ‘이성호’ 형님 내외만 하더라도 그러하다. 그들 내외는 이른바 뽕짝가요가 수 천 곡 담긴 그 음향기기를 복숭아나무에 매달아두고 복숭아 알솎기 등을 한다. 일의 능률이 오를 뿐만 아니라 무료함을 달래기에 충분하다. 사실 내 고향 백씨(伯氏)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난 명절에 고향에 들렀더니, 그 음향기기를 통해 음악을 듣고 있었다. 마치 이 아우한테 뻐기기라도 하듯. 그 곁에서 어린 종손(從孫)들은 휴대전화기를 조몰락대며 게임을 즐기고 있었고. 한마디로, 조손(祖孫)은 죽이 척척 맞았다. 백씨는 당신의 맏아들이자 내 장조카인 이한테 말했다.
“애비야, 이 ‘엠피쓰리’를 ‘업그레이드’해 주어야겠어. 너무 많이 들었는데다가 곡이 적어서… .”
장조카는 요 다음에 업그레이드 해다 드리겠다며, 그 음향기기를 건네 받았다. 장조카가 자발적으로 자기 어른한테 사다 드렸거나, 남들도 다 가지고 있던데 하나 사다 달라고 했거나 둘 가운데 하나일 터. ‘격세지감(隔世之感)’은 바로 그러한 때에 쓰는 말이리라. 나의 백씨도 꽤나 세련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성호 형님 내외는 오늘도 저 건너편 복숭아밭에서 MP3를 틀어, 뽕짝을 듣고 있다. 아예 그의 부인은 이미자 노래를 따라 부르기까지 한다. 라디오가 농부의 벗이었지만, 어느새 그 자리를 MP3에게 건네주었음을 생각하게 된다. 사실 손바닥만한 트랜지스터 라디오 한 대만 있어도 천만 원군을 얻은 듯하였는데… . 문득, 우리 집 오디오의 발전사(發展史)를 떠올리기에 족하다.
내 유년시절, 시골에는 집집이 라디오가 없었다. 면소재지의 부잣집에서는 어쩌다 라디오를 가진 집도 있었던 모양이다. 선생님이 가정실태조사인가 뭔가 하면서, “집에 라디오 있는 사람?” 하면 손을 번쩍 들던 아이가 있었으니까. 대신, 우리 마을에는 집집이 ‘앰프’가 하나씩 달려 있었다. 면소재지 ‘홀쭉이’란 별명을 지닌 분이 ‘삐삐선’으로 가설하여준 것이었다. 그분은 요즘으로 말하자면, 유선방송사업자였던 셈이다. 봄 한 철 보리 몇 되, 가을 한 철 벼 몇 되가 청취료로 청구되었다. 참, 여기서 말하는 ‘삐삐선’에 관해서도 소상히 밝혀야겠다. 본디 충청남도 당진에서 쓰던 속어(俗語)로 알려지며, 군대용 전화선을 일컫는다. 사실 그 안에는 강선(鋼線)도 몇 가닥 들어 있어서,아무렇게나 포설(鋪設)하여도 웬만해서는 끊어지지 않는다. 나는 이날 이때까지 살면서 그렇게 튼튼한 전선(電線)을 본 적이 없다. 그 삐삐선은 바구니를 엮는 등에 요즘도 유용하게 쓰인다. 다시 우리 집의 오디오의 발전사 이야기로 이어간다. 고가(高價)였기는 하나,한 집 두 집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들여놨기에 채산성(採算性)이 떨어지자, 면소재 ‘홀쭉이’네는 유선방송,아니 앰프 사업을 접게 되었다. 자연,우리 집은 적막강산이 되었다. 그러자 웬일로 내 아버지는 당신의 맏이인 내 백씨한테 라디오 사는 걸 허락하였다. 백씨는 당시 거금인 30,000원을 꾸러 재 너머 ‘행갯들’ 내 친구 병국이네집에까지 다녀왔다. 줄잡아 왕복 한 시간 걸리는 산길을 걸어서. 우리는 네모진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신주단지 모시듯 하였다. 어느 기계든 쓰다가 보면 탈도 나는 법이건만, 몇 차례 탈이 나자 우리는 이종사촌 ‘해진이 형님’을 원수처럼 여겼다. ‘소리사’에 직원으로 있던 그 형님이 고물을 우리한테 팔았다고 믿었기에. 사실 그 일로 인하여 그 형님의 종적도 우리는 모르고 지낸다. 내 중씨(仲氏)는 오디오에 무슨 한이라도 맺혔던지, 자신의 결혼예물을 사러 가서 전축(電蓄) 한 대를 가족들 몰래 끼워서(?) 사왔다. 아버지는 그 비싼 전축을 사왔다고,며칠간 식사도 거절하였다. 그 덕분에 마을에서 전축을 가진 집은 우리 집뿐이었다. 그것은 진공관 전축이었는데, 백씨네 건넌방에 골동품인양 여태 남아 있다. 추억서린 전축이다. 그 전축을 왕왕 틀어놓으면, 이웃들이 그렇게 부러워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때부터 ‘LP(long playing record)’의 개념도 알게 되었고, ‘음반 사기’가 생활의 일부가 되어 갔다. 좀더 시간이 지나 대학생이 되자, 나는 생활비 즉, 우리의 은어였던 향토장학금(?)을 아껴 야외전축을 사게 이른다. 속된 말로, 개뿔도 모르면서 남들한테 교양 있는 듯 보이고자 클래식 음반이며 팝송 음반이여 온갖 것들을 사 모으게 되었다. 그러한 일도 익숙해지니까 귀가 차츰 열리게 된 것도 사실이다. 내가 최근 들어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 시리즈물을 엮는 것도 우연은 아닌 셈이다. 그러했던 우리 집 오디오의 역사도 어느새 MP3로 바뀌었으니!
이번엔 우리 인류의 오디오 발전사를 더듬어 보아야겠다. 사실 그 역사가 오래인 듯하나 그렇지 않다. 내가 생각하기에, 전자제품 가운데 오디오의 발전속도가 가장 빠른 듯하다. 발명 순서와 기기 등은 뒤죽박죽 되더라도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1902년 영국인 프레밍은 최초로 2극 진공관을 개발한다. 그것이 오늘날 오디오 앰프 증폭소자를 낳은 원동력이란다. 1906년 미국인 포레스토는 3극 진공관을 개발한다. 1857년 프랑스인 ‘L. 스코트’는 최초로 축음기를 고안해 낸다. 1887년 프랑스인 ‘C.크로’도 축음기의 전신(前身)을 개발한다. 같은 해인 1887년 에디슨은 ‘포노그래프’란 이름을 지닌 축음기를 개발하고, 그 해 2월에 축음기 특허를 획득한다. 역사는 에디슨의 손을 번쩍 들어주었다. 즉, 축음기의 최초발명은 에디슨이 하였고, 그 발명은 에디슨의 위대한 업적이라고 기록한다. 그가 최초로 녹음한 음악은 동요였다는 사실. 알아두면 보약이 될지 모르니 소개한다. ‘메리에게는 어린 양 한 마리가 있어요(Mary had a little lamb)’였단다. 이 참에 인류 최초의 전화통화 내용도 곁들여 익혀두면 좋겠다. ‘알렉산더 그라암 벨’은 자신이 만든 전화기가 통화가 되는 줄도 몰랐다. 그는 조수를 불렀다.
“와트슨군, 이리 건너 와 보게.”
이것이 인류 최초의 통화다.
아래층 조수(助手)가 2층으로 올라왔다. 자기가 큰소리로 부르지도 않았건만, 어떻게 알아들었느냐고 묻게 된다. 그러자 조수가 대답한다.
“선생님, 조금 전에 이 기계에서 그 말씀 들렸어요.”
다시 오디오 발전사에 관한 이야기다. 1915년 아마투어 무선기사 ‘데이비드 사알로프’는 무선 전신 수신기를 변경하여 ‘라디오 뮤직 박스’를 개발한다. 그것이 ‘라디오’라는 말의 기원이다. 1927년 2월 16일 우리나라 최초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었다. ‘경성방송국’이었다. 1석 라디오,2석 라디오… 6석 라디오… 등으로 말하는 것은, 그 안에 쓰인 ‘다이오드’ 수를 일컫는다. 1948년 미국 컬럼비아사가 최초로 LP판을 출시하였다. 회전수는 매분 33회전이다. 1900년 덴마크인 ‘발더바르 폴젠’ 박사가 최초로 녹음기를 개발하였다. 1947년 미국 벨 연구소에서 진공관 대용(代用)의 트랜지스터를 개발하였다.
그처럼 빠르게, 다양하게 발전해온 오디오. 어느새 어른 엄지손가락 하나 크기의 오디오면 ‘딱’이다. 그것이 바로 이 글의 제재로 삼은 MP3다. 살펴본즉, ‘MPEG-1 Audio Layer-3’의 약칭이다. 다시,‘MPEG’은 ‘Moving Picture Experts Group’의 약칭으로, 국제규약에 따른 표준이며, 우리말로는 ‘동영상 전문가 그룹’으로 풀이한다. MP3란,’동영상과 동영상에 포함된 오디오에 대한 압축과 복원 프로그램’으로 알면 되겠다. 어쨌거나, 반도체가 우리네 인류한테 선물한 오디오이다. 그러한 기계를 칠순의 내 백씨와 그 나이쯤 되는 내 밭 이웃 성호 형님도 아주 유용하게 사용한다. 밤새 충전을 하여 들에 나설 때 호주머니에 넣어 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진종일 중단없는 뽕짝을 들을 수 있다. 어려웠던 지난날 그분들은 초동(樵童)이었고, 나무를 시장에 져다 팔았던 이들이 아닌가. 그분들은 들일을 하는 동안, 흘러간 옛노래를 그렇게 들으면서 자신들의 젊은 날도 곧잘 회상할 게 분명하다. 어쨌든, 역사는 발전한다. 그 발전 속도가 가장 빠른 분야가 오디오가 아닐까 싶다. 앞으로 MP3도 불편하다며, 몸 속에다 ‘칩’ 하나를 묻게 될는지도 모르겠다.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자동적으로 음악이 흘러 가슴을 위무(慰撫)하게 될는지 누가 알겠는가. 다시 말하거니와, 역사는 발전한다. 아름답기 그지 없는 음악들. 그 음악들을 발전되고 성능이 좋은 음향기기로 듣지 못하고 이승을 뜬 선조(先祖)들이 측은할 따름이다. 반대로, 나날 발전하는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사는 우리들은 무척 행복하다.
끝으로, 나의 애독자님들께 당부하고픈 말이 있다. 여태 농촌에서 농사를 하고 계신 어버이들한테나, 바다에서 고기잡고 계신 형제들한테 MP-3를 선물하지 않았다면, 이 기회에 그분들이 평소 즐겨 하는 노래를 수천 곡 담아 선물로 부쳐드리길. 그러면 그 어떤 선물보다도 좋아들 하실 것이다. 그러나 나한테까지 MP3를 선물로 부쳐주실 것까지는 없다. 나는 수백, 수천 곡의 노래를 알고 지내며 곧잘 콧노래를 부르며 농사를 하기에, 그 기계가 크게 필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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