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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set at ( )수필/신작 2014. 5. 15. 07:43
Sunset at ( )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미리 밝혀두건대, 위 제목 가운데 ‘( )’의 표기는 그 괄호 안에다 여러 지명(地名)을 바꾸어 넣을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굳이 ‘ㅇㅇ 에서 일몰(日沒)’ 또는 ‘ㅁㅁ에서 석양’ 따위의 제목을 정하기가 싫다. 그러면 내 절절함을 나타내기엔 너무 약한 듯하여서.
나의 특이한(?) 증세는 쉬이 낫지 않는다. 매일 서산으로 해가 넘어가는 순간, 그렇게 견딜 수가 없다. 눈물이 마구 솟구친다. 그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도 없다. 이미 15년여 전에 펴낸 두 번째 수필집 <<이슬아지>>의 ‘책을 내며’에도 그러한 이야기를 적은 바 있다. 참말로, 하루 가운데 해질녘은 내가 가장 견디기 힘들다. 한마디로, 슬프고 서럽다. 그리하여 벌써 여러 차례 나의 애독자들께 해질 무렵 힘듦에 관해 호소하는 내용을 담은 e메일을 띄운 바도 있다. 어제는 ‘시인 신석정은 이렇게 노래 했는데요’란 제목으로 시작하는 e메일을 부치기도 하였다. 1933년,시인 신석정은 ‘어머니 아직은 촛불을 켜지 마세요’란 시를 적어 조선일보에 발표한 적이 있다. 첫 행과 둘째 행이,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 해의/엷은 광선들이 섭섭해 합니다/’인 시. 나는 그 e메일에다 첨부파일을 하나 붙여 보냈다. 바로 ‘제임스 라스트(James Last) 악단’의 음악여행 실황 동영상 중에 연주된 ‘Sunset at Flamingo park’였다. 여기를 클릭하면 당해 연주곡이 나온다. James Last - Sunset at flamingo park 2015.07.24 살펴본 바, ‘플라밍고 공원’은 미국 어느 곳에 자리한 공원이었다. 어느 단원의 ‘리코더 연주’가 이끌어 가는 애잔한 곡인데, 해질녘 내가 느끼는 그 기분을 그대로 표현한 듯하다. 그 리코더 연주자 이름이 ‘Startt’라고 물결 모양으로 화면에 흐르기에, 그의 연주에 매료되어 그의 이름으로 인터넷 검색창에다 이미 여러 차례 입력하고 엔터키를 쳐보았으나 애석하게도 아직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단지 그 악단의 일원인 모양이다. 반주를 맡은 리드기타 주자(奏者)도 어느 곳에 이르러서는 아예 눈을 지긋이 감고 상체(上體)를 뒤로 젖히는 등 도취해버린다. 나는 그러한 동영상의 연주곡을 애독자들한테 부쳤던 것이다.
세계적으로 일몰이 장관인 곳은 ‘에게해의 진주’로 일컬어지는 그리스의 산토리니(Santorini)라고 한다. 오죽했으면 ‘폴모리아 악단’은 ‘에게해의 진주’라는 연주곡을 만들었겠는가. 오죽했으면 ‘야니(Yanni)’는 자기 고국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에서 ‘산토리니’를 연주했겠는가. 그들 양인(兩人)은 음악으로 환상적인 산토리니의 일몰을 표현했다고 생각된다. 한편, 위에서 소개한 바 있지만, ‘플라밍고 공원에서 일몰’도 독일 음악의 거장 ‘제임스 라스트’를 숫제 녹여버렸다는 말 아닌가. 그러한데 그러한데… 그밖에도 또 어느 예술가가, 아니 어느 뮤지션이 일몰에 환장들린(?) 적은 없는가 하고 마구마구 인터넷 검색창에다 대고 이런저런 어휘로 물어보게 되었다. 이 지독스러우리만치 끈질긴 수필작가의 의지를 그 누가 말리리오? 우선,다 젖혀두고, 검색어를 ‘Sunset’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그러다 보니, 음악과 관련된 그 무엇이 하나 발견되었다.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었다. 그랬더니 뭔가 또 걸려 나왔다. ‘Sunset at ( )’으로 된 게 무려 20여 개나 되었다. ‘Bing 이미지’와 ‘Bing 동영상’을 통해 찾아 들어갔더니, 글쎄 이러한 글이 있지 않겠나. 아직 국내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지, 번역하여 옮긴 블로그나 카페 등이 없어 아쉬웠다. 영어 콘사이스를 놓은 지도 30여 년 되는 나. 해서, 불가피하게 원문대로 옮겨 온다.
‘Hi. I'm Gabriele a lover of every kind of music. I play violin and piano and I like writing music, often inspired by images. My first work is "Sunsets" and "Sunsets part 2" (http://www.myspace.com/gabrielesaro for music and photos - on ITunes and most common digital stores) for violin cello and piano where the 35 sunsets that have amazed me these years are became music. My influences are Einaudi, Allevi, Tiersen, Glass, Nyman, Mertens, Sakamoto, Satie. Now I'm working on "Sunsets part 3", more melodic and romantic then the firsts. I hope in a nice present. Thanks.’
그의 이름이 ‘가브리엘 사로(Gabriele Saro)’임을 알 수 있었고,이탈리아 국적이며, 뉴에이지 뮤지션임도 알 수 있었다. 위 소개문에서 보여주듯 그 의 첫 앨범은 ‘Sunsets’임도 알 수 있었다. 즉, 시리즈물임을 암시한다. 그는 그것도 부족하다며 두 번째 앨범을 내게 되는데, 그것이 위에서도 소개되었듯 ‘Sunsets part 2’임도 알 수 있게 되었다. 거기서도 끝내지 않고 ‘Sunsets part 3’을 작업 중이란다. 그는 일몰에 환장들린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찌… . 그는 곳곳마다 일몰의 광경을 다 보러 다녔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곳마다 색다른 일몰을 음악으로 표현했다는 말이 된다. 나의 이 작은 노력으로 말미암아 국내의 음악 애호가들도, 특히 일몰의 광경을 즐겨 하는 음악 애호가들도 그의 음악에 관심을 더욱 갖게 되기를. 다는 들어보지 않았으나, 그의 ‘Sunset at ( )’ 시리즈물은 나를 매료시켰다.
사실 나는 이 글 첫 단락에서 해질녘 미칠 지경으로 견디기 힘들다고 하였다. 그러나 해질녘은 슬프고 아려서 좋다는 말이기도 하다. 왜 그러한 정서를 갖게 되느냐고? 이제 진실로 말하여야겠다. 해질녘은 낮과 밤이 교차하는 경계(境界)다. 관찰력이 있는 나의 독자들께서도 잘 보셨겠지만, 서산으로 막 넘어가려는 해가 그렇게 붉게 탈 수가 없다. 하루 가운데 가장 붉은 순간이다. 숨 거두기 직전 내 아버지의 모습과 그렇게 비슷할 수가 없다. 장렬하게 전사(戰死)하던 군인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마지막 열정을 불태운 위인들 모습 그대로다. 그러기에 너무도 아름다워 눈물이 나는가 보다. 그 광경을 바라보노라면, 내일이면 태양이 다시는 솟구치지 않을세라,두려움에 떠는 마음 또한 없지 아니하다. 사실 나만이 그러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고대인들은 그러한 생각들을 하였다. 옛 멕시코 마야인들은 해가 어둠 즉,밤의 세력한테 힘이 부쳐 넘어가는 걸로 보았다. 그러기에 ‘치첸이사(Chichen ltza)’ 등 위가 편편한 피라미드를 짓고, 그 상단에다 제단(祭壇)을 마련하였다. 그렇게 피를 철철 흘리며 넘어가는 해한테 피를 보태주고자, 밤의 세력과 싸워서 이기도록 하기 위하여 노예를 잡아 다가 피를 제물로 바쳤다지 않던가.
끝도 밑도 없는 나의 이야기 그냥 정리하도록 하겠다. 하루 가운데 가장 붉은 태양일 적은 환혼녘이더라는 사실. 우리네 삶의 여정도 그러할지니. 그러나 이 믿음만은 절대로 버릴 수 없다. 바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귀중한 복음이다. 당신은, “너희는 무얼 먹을까 무얼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저 들녘의 백합화도 솔모몬의 영광보다도 … 저 하늘을 날으는 새들은 집이 있느냐… 길쌈도 하지 않고도 … 내일은 내일이 걱정하도록 내버려 두어라.” 하셨다. 나는 특히, ‘내일은 내일 가서’가 아닌, ‘내일은 내일이’로 적혀 있음에 유의한다. 번역상의 오류가 아닐 거라고 확신한다. ‘自然’ 내지 ‘자연스레’ 즉, ‘스스로 그러하게’란 뜻을 지녔다는 것을. 예수님의 가르침은 현세에 와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마지막 대사로도 쓰였으며, 어느 대중가요 가수의 노랫말에도 공교롭게도 쓰였다. ‘내일은 내일 또 다시’라고.
끝으로, 독자님들께 은근하게 권해 보고픈 게 하나 있다. 저마다 위 제목의 괄호’( )’ 속에다 어느 지명을 넣어보시라고.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한국디지털도서관 본인의 서재,
한국디지털도서관 윤근택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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