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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작가 윤근택이가 신작 및 기발표작 모아두는 곳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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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68) - ‘니니(-nini)’ ‘노노(-nono)’ 음악인 -
    수필/음악 이야기 2022. 6. 5. 12:01

    모처럼 반가운 '여름비'에요.

    이럴 때에는 곧바로 루마니아 태생, 게오르그 장피르의 팬플루트 곡, '여름비' 들어야지요.

    듣기:

    Gheorghe Zamfir Pluie DEte 여름 1976

    곧 저는 우의를 입고서,

    들깨씨앗 모도 부어야겠지요.

    옥수수모도 본밭에 옮겨심어야겠죠.

    오이모도 옮겨심어야겠지요.

    '그대 오시라고' 그렇게 할밖에요.

    읽기:

    그대 오시라고 - 추천[0]

    그리고 아내가 가꾸는 농막 뒤란의 '시크릿 가든'에 심을 야생화 모도 이식해주어야겠고요.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68)

                                              - ‘니니(-nini)’ ‘노노(-nono)’ 음악인 -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그의 부친은 오페라 의상 재단사였다. 어린 그는 그 옷들을 보면서, 장차 오페라 단원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게다가, 베르디의 오페라인 <가면무도회> 공연을 보고는 음악인의 꿈을 구체적으로 키워나갔다. 우선, 그는 정규 음악과정을 거쳐 첼리스트가 된다.

        그가 19세가 되던 1886년, 그가 첼리스트로 속해 있는 악극단이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오페라 하우스’에서 베르디의 <아이다(Aida)>를 연주하기 앞서 돌발사고가(?) 생겨난다. 현지에서 섭외한 지휘자는 청중들이 못마땅해서 야유를 퍼붓는 바람에 돌연 사퇴. 지휘봉을 건네받은 다음 지휘자도 고개 절래절래 흔들며 사퇴. 공연이 무산될 위기에 처해 있을 적에 어느 한 단원이 스태프들한테 귀띔해준다.

         “ 우리들 가운데에서 이 첼리스트는 악보를 이미 좔좔 다 외우고 있으니, 한 번 지휘봉을 맡겨보심이?”

        그야말로 대타(代打)로 기용된 그. 그는 ‘암보(暗譜)’를 통해, ‘악보 보면대’도 없이, 지휘봉을 허공에 현란하게 휘둘렀다. 사실 그 점이 여타 지휘자들과는 천양지차의 탁월성. 보면대의 악보를 페이지 페이지 넘기면서 들여다보는 지휘자들보다는 집중력이 나으니... . 청중들의 갈채는 대단했다. 그것이 그가 ‘20세기 불멸의 지휘자’의 첫발자국. 그는 내가 태어났던 해인 1957년,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기까지 줄잡아 70여 년 지휘봉을 잡았다. 하기야, 그는 숨을 거두기 직전, 의식불명 상태에서도 허공에 자기 두 손으로 지휘하는 시늉을 해보였단다.

        잠시 쉬어가기. 이즈음에서 내 신실한 애독자님들께 또 다시 고백할 게 있다. 인터넷이라는 아주 편리한 교재가 있어서, 온 인류가 남녀노소불문하고‘지식의 평준화’를 이뤘다. 심하게 이야기하자면, 굳이 학교에 가지 않아도, 따로 스승을 모시지 않아도, ‘네이버 박사’와 ‘다음 박사’한테 여쭤보면 다 가르쳐 준다. 사실 나는 남의 문학작품을 이날 이때까지 정성들여 끝까지 읽은 책은 달랑 한 권뿐.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를, 그것도 성인이 다 되어서 읽었을 뿐. 그게 무슨 큰 자랑이랴? 이 점은 작가인 나의 치명적(致命的) 약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그 치명적 약점을 , 며칠이 걸리더라도 잠 아니 자고서라도, 한껏 ‘자료챙김’으로 보완해 왔다. 그리하여 3,000 ~ 4,000 편가량의 수필작품을 거뜬히 적어온다. 종이책으로 따지면, 50여 권 될 양을. 특히, 음악은,‘세상의 모든 음악’은 나한테 큰 공로자이다.

        내가 왜 느닷없이 위 단락을 지었을까? 그것도, 평소 내가 신봉하는‘윌리엄 와트’의 ‘단락의 원리’ 네 가지 가운데에서 ‘일관성’과 ‘통일성’을 크게 저해할 듯한 단락임에도 불구하고? 이 글의 주인공도 음악인으로서는 신체적으로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었기에, 그게 외려 큰 힘이 되어 대성공하게 되었음을, 내 신실한 애독자님들께 소상히 공유하고자함이다.

        내 신실한 애독자님들께서는, 나의 이 글을 읽으신 다음, 따로 ‘다음백과’나 ‘위키백과’나 ‘클래식백과’를 통해 그의 생애에 관해 밤을 새워서라도 관심있게 읽어보시면 될 터. 대신, 나는 그와 관련된 일화(逸話)들만 간략간략 전해드리기로 한다.

        일화를 소개하기에 앞서, 여태껏 미뤄뒀던 그의 이름을 밝혀야겠다. 그가 바로 ‘토스카니니(Toscanini, 이탈리아, 1867~1957)’이다. 굳이,내가 위 부제목을 ‘니니(-nini)’라고 삼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 의미는 모르겠으나, 그의 이름이 ‘-nini’로 끝난다는 점. 나는 그의 이름을 생각할 적마다 그이보다 먼저 다녀갔으며, ‘악마의 바이올린니스트 ’로 알려진 ‘파가니니(Paganini, 이탈리아, 1782~1840)’의 이름이 떠올랐다. 하여간, 둘 다 괴짜 예술가였다. 이참에 수필가 윤근택도 ‘윤근택니니’로 개명해버릴까 싶기도 하다. 사실 최근 내 사랑했던 그도, 내 마음 너무 아파 지금은 놓아줬지만, 그도, 내 평소 말버릇을 흉내 내어, 전화상으로,“니는 니는 울보야! 이 바보야, 울지 말어.”했으니까.

     

     

       제 1화)

       ‘위키 백과’에서 따와서 일부 윤색함.

     

       <그는 다혈질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는 리허설 때 단원들의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휘봉을 꺾거나 악보를 찢는 등 과격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지휘봉이 쉽게 부러지지 않으면, 손수건이나 윗옷을 찢기도 했다. 틀린 음이나 어설픈 음을 발견하면, “노(no)! 노(no)!” 불같이 호령을 하여, 그의 목소리는 늘 쉬어 있었다 한다. 단원들은 그런 그를 ‘토스카노노(Toscanono; Toscanini + no! no!)’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위 부제목으로 삼은 ‘노노(-nono)’란 어휘는, ‘악보주의자’ 내지 ‘완벽주의자’였던 그의 ‘예술혼’을 기리기 위함이었음을.

       사실 그는 1926년에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영웅>을 연습하면서, “어떤 사람은 이 곡이 나폴레옹을 가리킨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히틀러, 또 어떤 사람은 무솔리니를 연상한다고 하는데, 나한테 이 곡은 단지 ‘알레그로 콘브리오(악보에서, 힘차게 빨리 연주하라는 말임.)’일 뿐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오로지 악보에만 충실할 뿐 그 밖의 낭만적 해석은 사양하겠다는 그의 음악 철학이 잘 드러난 말. 즉, 위에서 내가 이야기한 대로‘악보주의자’였음을.

       연주 중 화가 치밀면, 시계나 집기를 던지는 일이 있었으므로, 토스카니니의 한 팬은 그에게 연습 때 차는 시계와 연주 때 차는 금시계를 함께 선물하면서, ‘연습용’과 ‘연주용’이라는 따로 표시를 했단다.>

     

       제 2화)

     

       미국이 자랑하는 작곡가,‘사무엘 바버(Samuel Barber, 1910~1981)’는 이 글 주인공인 토스카니니의 요청으로, <현을 위한 아다지오>를 포함한 두 곡의 악보를 부쳐주었다. 그런데 며칠 아니 있어, 그 악보가 바버한테 되돌아 왔다. 바버는 매우 불쾌해 했다. 자기의 곡이 맘에 아니 들어서 퇴짜를 놓은 것으로만 알고서. 그런 다음, 동료 작곡가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그야말로 기절초풍. 이 글의 주인공은 바버의 그 악보를 이미 머릿속으로 다 외우고 있었다는 거 아닌가. 그러했던 이 글의 주인공은 1938년 뉴욕으로부터 시작하여 1940년에 남미 공연을 하는 내내 바버의 그 곡을 지휘, 연주하여, 바버의 홍보대사가 되었고... . 바버의 그 <현을 위한 아다지오>는 미국 여러 대통령을 비롯한 유명인사들 장례 진혼곡으로 연주되게도 한 일화. 심지어 여러 영화의 주제곡으로 쓰였다는... .

       참말로, 왜 그가 바버의 악보를 곧바로 되부쳐주었을까? 이 글의 주인공은 선천적으로 심한 근시안(近視眼). 음악계에 첫 발자국을 들여놓은 첼리스트로서 음악생활을 어어가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자, 밤낮 가리지 않고 악보를 통째로 외워버렸다는 거. 그는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외운 악보가 오페라 100여 편, 관현악곡 250여 곡.

     

       제 3화)

     

       ‘클래식 백과’에서 따와서 일부 윤색함.

     

       < 무솔리니가 집권하는 파시즘의 시대를 살았던 토스카니니는 파시즘에 강한 적대감을 갖고 있었다. 그는 공연 전에 파시스트당의 찬가를 연주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라 스칼라’에 무솔리니 사진도 걸지 않았다. 이러한 행동으로 그는 1931년 파시스트 당원들에게 테러를 당했고, 이후 미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했다. 심지가 굳어, 그 어떤 세속적 욕망도 과감히 버렸던 지휘자.

       미국에 정착한 후 1937년 NBC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로 취임했으며 70세의 나이에도 신생 악단을 맡아,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열정, 특유의 추진력을 바탕으로 17년간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정상급 악단으로 성장시켰다.>

     

       제 4화)

     

       그는 80세가 되었을 적에 어느 파티에서 젊은이들한테 60대 후반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 저 늙은이들이 다 가고 나면, 우리끼리 신나게 한번 놀아보세나.”

       그런 정도로 그는 열정적으로 살았다. 오죽했으면 이렇게까지 탄식했을까?

       “신이시여, 나이가 80 노인인 저한테 어찌 17세 소년의 열정을 주시나이까?”

     

        더 이상 수필작가 윤근택이가 보탤 이야기도 없다.

       “토스카니니, 님의 그 예술혼을 존경하나이다. 저는 집의 나이 66세임에도 아직도 님에 비하면 이[齒]도 나지 않은, 어린아이에 불과한 걸요.”

     

       작가의 말)

     

          제 모자라는 점, 나머지는 님들께서 채워 읽어주시길. 생각은 길게, 쓰기는 잠시잠간.

       '어느 귀인을 위한 환상곡'과 '아랑훼즈 협주곡을 적은 스페인의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였던 '호아킨 로드리고'.

       그는 곡을 적을 적마다 어느 특정한 이를 염두에 뒀대요. 늘 그분한테 헌정을 염두에 두고 작곡을 했대요.

        저도 마찬가지에요. 그러기에 쉼없이, 열정적으로 글을 적게 되어요.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본인의 카페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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