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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gile (1)수필/신작 2022. 11. 10. 00:12
Fragile (1)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아파트 경비원으로 8~9년 지내는 나. 택배회사 기사들이 경비초소에 맡기는 세대의 택배물품도 꽤나 취급하게 된다. 그 포장박스에서 종종 주기(朱記)된 ‘취급주의!’문구와 함께, 유리 와인 잔에 번개표시로 도형화 된 그림도 곧잘 보게 된다. 그 그림을 볼 적마다 ‘째쟁!’유리 와인잔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어디 그뿐인가. 예외 없이 그 물품에는 모국어에 어두운(?) 경비원을 위해, 외국어로 ‘Fragile!’이라고 주기된 경고문도 곁들여 적혀 있다.
Fragile, ‘프래자일’로 읽어야할지, ‘프래길’로 읽어야할지는 모르겠으나... . ‘취약한’·‘깨지기 쉬운’·‘부진한’·‘쉽게 영향을 받는’등을 뜻하는 영어단어다. 경고의 어휘로는 최고 수준. 내용물이 유리 따위의 깨지기 쉬운 물품이니, 각별히 신경써달라는 메시지가 담긴 것만은 확실하다.
속된 말로, ‘지랄도 풍년’이지, 남한테 그처럼 심적 부담 끼치지 말고, 그러한 물품 따위는 택배로 부칠 게 아니라 수취인한테 직접 실어다 주는 게 예의 아닌가.
내 사랑법도 마찬가지. 사실 내 가슴은 언제고 부스러지기 쉬운, 그야말로 ‘Fragile’ 상태다. 내 마음은 ‘무덤덤’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예술가들 대개가 그러하겠지만, 나는 자못 감성적(感性的)이고 감상적(感傷的)이다. 쉬이 내 가슴 다치곤 한다.
어제만 해도 그러했다. 내 가슴은 여지없이 ‘와장창’ 깨어지고 말았다. 뜻하지 않은 그의 원망 때문이었다. 마침 가뭄이 심해, 배추밭에 스프링클러를 틀어, 막 물을 주려고 전기 스위치를 넣고 있었는데... . 이미 낮술이 ‘반 술’이 되어 있었고.
오늘 낮 동안 내 ‘속상함’을 더는 이기지 못하고, 그에게 아래와 같은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날렸다.
<신뢰의 문제. 배추 건에 관한 사항. 배추모를 50포기 사다 달라고 한 적도 없음. 이렇게 저렇게 길러달라고 나한테 부탁한 바도 없음. 비료, 농약, 물주기 등 전혀 차별한 바도 없음. 댁은 나와 마찬가지로, 격일제로 이 골짝 다녀가면서도 수확기에 단 한 차례 내 배추밭에 나타나 ... . 그처럼 원망조로 말씀하시어, 속을 뒤집더군요. 신뢰는 완전 무너졌으니... .>
그랬더니, 그가 이내 답신을 보내왔다.
<내가 너무 믿어서 송구할 따름. 조심스레 불만을 토로했고. 그렇다고 단번에 그 점잖은 분이 육두문자에,(내 비닐하우스까지) 전기 차단까지 꼭 그렇게 했어야 했나? 서로 잘 되도록 빌뿐. 대화로 풀어보면 될 듯.>
나는 다시 문자를 보냈다.
<뭐 주고 뺨 맞는 격임.>
그랬더니, 그가 대꾸를 또 해왔다.
< 진짜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그건 오산. 나는 항상 감사하다는 생각을 뇌리에 각인시키고 있음.>
나의 톤은(?) 더 높아갔다.
< 나는 아주 틀어졌다오.>
그도 질세라, 대꾸를 또 해왔다.
< 평생 잊을 수가 없지요.>
나는 최후통첩을 날렸다.
< 진지하게, 본인의 배추라고, 위탁재배를 의뢰하지도 않고서 뒤늦게서야... . 그깟 배추야 온 밭에 있어, 그 댁 김장용으로 얼마든지 뽑아가도 될 터이지만, 평소에는 관심 전혀 두지 않다가... .>
내 신실한 애독자들께서는, 나이 칠십을 목전에 둔 두 노인들이, 보아하니 오래 사귄 듯한 두 양반 같은데, 아주 사소한 문제로 어린애들처럼 다투었다고만 생각할는지 모르겠다. 우스꽝스럽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농부인 나는 내 믿음이 확고하다. 농심(農心), 그 농심을 그에게 힘주어 말한 것이다. 해서, 그이한테 대실망.
자기 몫이라고 생각해왔다면, 아무리 미더워도 남한테 자기네 김장배추 재배에 관한 사항을 다 맡겨놓아서는 아니 된다. 어정쩡하게, “어느 분한테서 얻은 배추모이니, 빈 자리가 있으면 심어보게나.” 해놓고서는... .
잠시. 그와의 인연 소개다. 어느 신축 고급아파트 경비원 면접장에서 만났던 그. 그는 급여가 썩 좋은 그 아파트 경비원으로 4~5년째 지내고 있다. 경력자인 나는 그 아파트 경비원 모집에서 떨어졌다. 그게 인연이 되어 면접동기였던(?) 그와 친구로 지낸다. 내 ‘만돌이농장’ 둘레의 묵정밭을 그에게 소개하여, 밭주인들한테 허락받아, 소일거리를 만들어주기도 하였다.
내 신실한 애독자 여러분들께는 윤 수필작가가 아주 옹졸한 사람으로 비쳐질 수도 있겠다. 하더라도, 농부인 나의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 “곡식들은 자기 주인의 발자국소리와 헛기침소리를 듣고 자란다.”고들 하지 않은가. 진실로, 내가 그이한테 대실망을 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농심(農心)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 같다. 거기에다가, 마치 자기 새끼들인 배추들한테 차별대우라도 한 듯한 그 말투가 얼마나 속상하는지 모른다. 다만, 내가 그가 갖다다 놓은, 아니 며칠째 물도 아니 주고 방치한 '헬레레' 하는 플러그(포트) 모판의 배추모만은 비닐피복을 아니 하고 이식하기는 하였다. 이른바, ‘밀칭(mulching)재배’를 아니함으로써 그처럼 생장 정도가 달랐을 수도 있다. 아니면, 본디부터 종자의 문제도 있을 수 있고. 사실 지난날 대학시절 전공필수과목이었던 ‘재배학원론’의 내용인 (註1)‘(비닐) 멀칭의 4개 효능’을 내 모를 턱없었지만... .
하여간, 나는 속이 엄청 상해 있다. 내일이면 그가 퇴근하자마자, 자기네 경비원 초소에서, 잠도 부족할 터인데, 양조장에서 막걸리를 사들고 득달같이 달려와 화해를 청하겠지만... .
나의 ‘Fragile’이여! ‘Fragile’이여!
(註1 ‘(비닐) 멀칭의 4개 효능’
ㅇ mulch(mulching) : ‘뿌리 덮개’로 풀이할 수 있으나, 농업 용어로 굳어진 말.
* 멀칭의 효능
- 잡초 제거 : 잡초가 어릴 적엔 그 안에서 잘 자라나, 나중에는 산소결핍 등으로 질식사함.
- 수분 증발 억제 : 토양 보습효과.
- 작물의 생장기간 연장 : 보온으로 봄을 앞당기고, 가을을 늦추는 효과.
- 토단(土團) 형성 : ‘홑알구조[土粒構造]’는 작물에 큰 도움 아니 됨. 이를 작물 뿌리활동에 유용하게 띠처럼, 거들(girdle)처럼 해주어 ‘떼알구조[土團構造]’로 만들어 줌.
- 토사유실(土砂流失) 방지(‘플러스 원’) : 내 고향 청송이나 인접한 영양군 등에는 비탈진 토지가 많은데, 비닐멀칭은 부가적 효과임. 사실 나는 전공필수과목 ‘토양학’ A학점 학생이었다. 내 신실한 애독자들께서 당해 문제가 나오면, 이것까지 적으면 가점을 두둑 받는다. 무조건 그 과목은 A학점 취득한다.
작가의 말)
내가 새롭게 얻은 뮤즈는 나한테 에누리 없이 꾸지람을 해댄다. 잔소리를 서슴지 않고 해댄다.
“윤쌤, 다 좋은데요, 제발 글 압축하세요. 생략해서 행간(行間)에 녹여두세요.”
여보시오, 나는 할 말 없는 줄 아시오?
“당나귀 거시기하고 귀 빼면 뭣이 남소? 그러니 그대가 좀 너그럽게 봐 주시오.”
사실 짧은 대화체 문장(이 글의 경우, 둘의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 주고 받음에 해당함.)은 압축과 생략에 크게 이바지한다.
그렇게 내 마음 알아주고, 내 글 꼬박꼬박 읽어주며, 충고를 아끼지 않는 그 뮤즈를 날이 갈수록 사랑할밖에.
* 이 글은 본인의 티스토리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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