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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gile (2)수필/신작 2022. 11. 12. 00:46
하여간, 저는 그 무엇이 되었든 적어야 해요.
아니 적으면, 살아있는 것 같지가 않거든요.
두루두루 사랑해요.
아름다운 꿈들 꾸고 계시는 거 맞죠?
잊고 계실세라, 또 한 번 말씀드려요.
저는 이날이때까지 정성들여 끝까지 읽은 책은 단 한 권뿐이에요.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
그것도 성인이 다 된 이후에요.
Fragile (2)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나는 이 글 전편(前篇)인 ‘Fragile (1)’에 어떤 절친한 이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받은 이야기를 적은 바 있다. 그 글 가운데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상략) 내 사랑법도 마찬가지. 사실 내 가슴은 언제고 깨어지기 쉬운, 그야말로 ‘Fragile’ 상태다. 내 마음은 ‘무덤덤’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예술가들 대개가 그러하겠지만, 나는 자못 감성적(感性的)이고 감상적(感傷的)이다. 쉬이 내 가슴 다치곤 한다.(하략)>
나만이 그러한 게 아니다. 대체로, 겉보기에는 '강강(剛强)'인 사물이 한낱 보잘것없는, 아주 유약(柔弱)한 사물로 하여 여지없이 깨어지는 걸 종종 체험했다. 유리제품이나 수정(水晶)제품은 자잘한 모래알 하나와 부딪혀도 ‘쨍그랑’ 박살나곤 하였다. 여름날 팥빙수를 만들어 먹으려고 ‘각진 얼음’을 샀을 때의 체험도 마찬가지. 그 ‘각진 얼음’을 작은 알갱이로 잘게 부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였다. 아주 가느다란 바늘 끝을 얼음장 표면에다 대고, 망치 따위로 ‘톡톡’ 가볍게 내리치면, 얼음은 원하는 대로 ‘좍좍’ 갈라지지 않던가. 산길에서 마주친 그 커다란 암석들. 그 암석들도, 나이는 들었으되, 아주 왜소한 나무의 그 가는 실뿌리로 하여 여지없이 ‘좍좍’ 갈라져 있음을 본 예도 많다. 내가 젊은 날 직장생활 관계로, 2년여 머물렀던 울릉도. 그 ‘도동’의 절벽에는 나이가 2,000년가량 되는 향나무가 서 있었는데, 그 향나무는 실뿌리로 그 견고한 암석을 뚫으며 그 틈새에 고인 우로(雨露)와 먼지를 자양분 삼아 살아온다고 들었다. 그 향나무는 2000여 년 거쳐오면서 오늘도 암석을 쪼개고 있는 셈. 사실 나무들의 실뿌리가 그 육중한 암석을 쪼개는 메커니즘은 크게 두 갈래로 추정된다. 그 하나는, 나무의 실뿌리에서 암석을 미세하나마 서서히 녹이는 미량물질을 내어놓음으로써. 또 하나는, 겨우내 나무의 실뿌리가 ‘얼음세포’를 형성하는 등 얼었다 녹았다를 교대로 하면서 쐐기역할을 하여, 암석을 끝내는 ‘쫙’ 쪼개는 것으로. 실제로, 옛사람들은 커다란 암석을 쪼개어 절편(切片)으로 만들고자 할 적에, 겨우내 나무쐐기를 박고 거기에다 물을 부어 부풀리고 가라앉히고, 얼리고 녹이고를 거듭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작은 나무쐐기로도 그렇게 하면 암석을 쪼갤 수 있음은 과학적으로도 입증된 사실. 중국의 전설적인 명의(名醫)인 편작(扁鵲,BC401~BC310)과 화타(華佗, 145년 ~ 208년)도 동양의술의 으뜸으로 알려진 침(鍼) 하나로 환자의 그 딱딱한 고름덩어리 따위를 깨었을 듯. 물론, 우리네 허준(許浚, 1539~1615) 선생도 편작과 화타와 마찬가지로, 침으로 환자들의 그 딱딱한 어혈 등을 다스렸을 터.
다시금 이야기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강강(剛强)’한 이들은 아주 미미한 사물한테 약한 구석이 있다. 그리스의 전설적인 전쟁영웅인 아킬레스(Achilles)가 어디 힘이 부족하여 트로이전장에서 적장(敵將)으로부터 화살 맞아 죽었느냐고? 그는 발꿈치 뒤쪽에 치명적 약점이 있었다지 않은가. 바로 ‘아킬레스 건(腱)’. 분명 우리네 속담에도 있다.‘차돌에 바람 들면 썩돌보다 못하다.’
‘Fragile 이여! Fragile이여! 겉보기에 그지없이 강해보이는 이들의 약점이여!’
그런데 일찍이 기원전 6세기경 춘추전국시대 의 노자(老子)만은 ‘Fragile’의 개념을 정확히 깨우치고 있었다는 거. 그는 ‘柔能制强’ 과 ‘弱能勝强’과 ‘以柔克剛’을 이야기하였다. 세 어휘는 각각 ‘부드러운 것이 능히 단단한 것을 이기고 약한 것이 능히 강한 것을 이긴다. 그리고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긴다.’는 뜻을 품고 있다.
겨울날 산 속에 살던 노자가 설중(雪中)에 잠시 산길을 내려오고 있었던 모양. 그는 ‘와지끈’ 소리가 들리자, 큰 나무의 가지들을 올려다보게 된다. 눈[雪]을 잔뜩 실은 나무의 굵은 가지가 그처럼 ‘와지끈’ 부러지는 걸 보게 된다. 대신, 잔가지들은 눈을 ‘털털’ 털고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이 스프링처럼 본디 자리로 돌아감을 보게 된다. 거기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한다.
(이하 본인의 수필작품, ‘고무 이야기 (2)’에도 있음. 다소 편집함.)
<(상략)후일 그는 그의 스승인‘상종’ 문병(問病) 자리에서, 임종(臨終)에서(?), 그 깨달음을 굳힌다.‘치폐설존(齒弊舌存)’ 또는 ‘치망설존(齒亡舌存)’의 고사성어(故事成語)가 바로 그것이다.
노자는 병석에 누운 스승 상종을 찾아뵙고 말씀드렸다.
“선생님께서는 병이 깊으시니, 이 제자에게 남기실 가르침은 없으신지요?”
이에, 상종은 문답(問答) 형태로 하나하나 깨달음을 주었다. 총명한 노자는 스승의 말씀을 다 알아차렸다. 그 가운데에는 이런 대화도 있었다.
상종은 또 자기 입을 벌려 노자에게 보여 주며, “내 혀가 아직 있느냐?” 물었다.
노자가 답했다.
“스승님, 그렇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이번에는 “내 이가 아직 있느냐?”하고 물었다.
노자가 “다 빠지고 없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상종이 “왜 그런지 알겠느냐?”하고 되물었다.
이에 노자는, “스승님의 혀가 남아 있는 것은, 그것이 부드럽기 때문입니다. 이가 다 빠지고 없는 것은 그것이 강하기 때문입니다(夫舌之存也, 豈非以其柔耶. 齒之亡也, 豈非以其剛耶).”
그러자 상종은 매우 흐뭇해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이와 같으니, 너한테 더 해 줄 말이 없구나.”(하략)>
위에서도 이야기하였지만, 나는 자못 감성적(感性的)이고 감상적(感傷的)이다. 쉬이 내 가슴 다치곤 한다. 하더라도, 노자의 충고 내지 교훈을 다시금 생각하면서, 내 절친했던 그를 너그럽게 받아주어야겠다. 이미 어제 양조장에서, 나한테 농주(農酒)를 열병씩이나 사와서, 흔들의자에 앉아 이미 반 술이 된 나한테 혼잣말처럼 하고 간 마당에.
그의 혼잣말이다.
“ 모두 내 불찰이었어.”
사실 나는 그가 쓸쓸한 뒷모습 남기고 어둠 속으로 자기 농막으로 떠날 때까지도 그이한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의 모습은 이미 ‘반 술’이 된 나한테는 실루엣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나의 옹졸함이여!’
작가의 말)
‘Fragile (1)’의 작중인물인 그이한테도 이 글을 더 늦기 전에 헌정한다. 어쨌든, 그는 내가 새롭게 얻은 뮤즈의 말마따나, 그녀의 휴대전화 위로 문자 메시지 대로, 글을 쓰게 하였으니 고마울밖에.
그리고 내가 새롭게 얻은 뮤즈께서는, 절제되지 않고 정제되지 않은 이 글도 맘에 아니 들면, 개작(改作)하여 본인의 작품으로 발표하여도 좋다. 이젠 내 곳간의 쇳대(열쇠)마저도 맡기고프다.
* 이 글은 본인의 티스토리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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