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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144) - 음정,‘피타고라스(Pytagoras)의 음률’로부터 -수필/음악 이야기 2023. 4. 2. 11:31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144)
- 음정,‘피타고라스(Pytagoras)의 음률’로부터 -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음악 칼럼니스트)
1.‘피타고라스(Pytagoras)의 음률’
그는 기원전 570년~기원전 495년 활동했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겸 수학자다. 그는 세상만사의 근원은 숫자라고 주장했던 이다.
그는 어느 날, 늘 지나다니던 대장간에서 놀라운 걸 깨닫게 된다.
‘ 저 눔의 소리, 늘 시끄럽고 짜증스럽기만 들렸거늘, 오늘따라 아름답게 들리다니... .’
그는 놀라운 걸 발견하게 되었다. ‘모탕’에 얹힌 가공물 쇠붙이의 용융상태보다는, 내리치는 망치의 무게와 관련 있다는 걸 깨우쳤다. 망치로 모탕 위 쇠를 내리치는 망치무게가 ‘6 : 8 : 9: 12’에 따라 소음이 아닌, 음악으로 들린다는 걸 깨우친 것이다. 현악기에서 현(絃)의 길이와 음정의 관계를 그는 실증적으로 보이게 된다. 물론, 숫자 감각이 빼어난 그는 도식화(圖式化) 하였다. 그는 인류 최초로 음정(音程), 즉 ‘음 높이’를 계량화(計量化)한 음악 이론가였던 셈. 그의 수학적 이론(理論)은 현악기의 조율에 응용된다. 그는 서양 최초의 음계를 고안해낸 셈.
2. ‘귀도 다레초(Guido d’Arezzo)의 손’
그는 991(?)~1050년 이탈리아 사람이다. 이탈리아 베네딕트회 수도원 수도사(修道士)로 지내면서, 어린이성가대를 지도하고 있었다. 그는 <안티포너리(Antiponery)>란 일종의 음악이론서의 초안을 만들었으며, 가수들에게 짧은 시간 안에 새로운 성가를 가르치기 위해 시창법(視唱法)을 고안하게 된다. 특히, 그는 손바닥에다, 마치 우리가 학창시절 커닝페이퍼를 작성하듯, 나름의 기보(記譜)를 하게 된다. 그걸 ‘귀도 다레초의 손’이라고 부르며, 기보법의 시초가 되었다.
그는 서양의 계이름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창안해 내었다. 이를 계명창법이라고 한다. 이는 우연의 발견일 수도 있다. 1025년 그는 ‘성 요한 축일’을 맞아, 그 동안 구전되어 오던 성가를, 어린이 성가대원들한테 가르치고 있었다. 그 노랫말은 80년경 카롤링거 왕조시대에, 파울루스 부사제(Paulus Diaconus, ?~799)가 라틴어로 쓴 <Ut queant laxis(당신의 시종들이)>.
노랫말은 이렇게 되어 있다.
Ut queant laxis(당신의 시종들이)
resonare fibris(자유롭게 찬미할 수 있게)
Mira gestorum(기적을 행하시는)
famuli tuorum,[당신의 역사(役事)로써,]
Solve polluti(정결하게 하소서, 모든 흠을)
labii reatum,(그들의 더러운 입술로부터)
Sancte Iohannes.(성스런 요한이여.)
귀도 다레초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실로 놀라운 걸 발견하게 된다. 한 소절씩 부르다가보니, 신기하게도 그 첫 음들이 한 음정씩 높아감을 깨닫게 된다. 해서, 그는 그 첫 자들을 따서 계이름을 짓게 된다. Ut·Re·Mi·Fa·Sol·La·
Si·Ut. 그가 고안해낸 걸 두고, 계명창(solmization)이라고 부른다. Ut가 Do(Dominus;하느님이란 뜻임.)로 바뀌고,
La 위에 Si가 첨가된 것은 17세기에 와서이다. 1673년 이탈리아 작곡가 보논치니(1670~1747)의 작업이다. 위 노랫말을 잘 살펴보면, Si가 ‘Sancte Iohannes’ 밑줄친 글자의 조합임을 알 수 있다. 보논치니는 Ut보다 발음하기 쉬운 Do로 바꾸었다고 하나, 그는 그 성가를, 그 계이름을 더욱 성스럽게 하였다. ‘Dominus(하느님)께서는 알파요 오메가이시니...’, Do에서 시작하여 Do로 끝나게 한 계이름. 사실 프랑스에서는 아직도 Ut를 그대로 쓰고 있단다.
덧붙여, 위 노랫말에 쓰인 라틴어 몇 개를 풀이하면 이러하다. resonare는 resononance(반향,하느님의 음성),Mira는 miracle(신비스런,기적), famuli는 family(가족, 하느님의 자제들), Solve는 solution( 하느님의 역사), labii는 입술 혹은 스승, Sancte는 sanctus(聖,거룩). 한마디로, 귀도 다레초가 고안해낸 ‘솔미제이션(solmization; 계명창)’은 하느님의 뜻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서야 어찌?
3. 박연(朴堧, 1378~1458,조선조)의 편경(編磬) 12장
나의 작품, ‘농부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31)’에서 따다붙이는 것으로 갈음한다. 자기표절이다.
< (상략) 대신, 우리 조상 가운데 어떤 분은 요한 세바스찬 바흐보다 정확히 307년 전인 1685년에 태어났으며, 바흐보다 정확히 292년 전인 1458년에 세상을 떴음에도, 바흐의 ‘평균율’ 에 앞서 ‘정확한 음정’을 정립했다면? 사실 그 훌륭한 바흐의 업적을 폄훼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우리 조상 가운데는 바흐 못지않게 훌륭한 음악 이론가가 계셨다는 사실. 그분은 충청북도 영동(永同) 어느 산골마을에서 태어난, 촌놈이었다. 어릴 적부터 피리를 어찌나 잘 불었던지 마을 어른들은 그를 피리 잘 부는 신동이라고 불렀다. (이하는 <<樂學軌範>>을 엮은 ‘성현(成俔)’의 <<慵齋叢話(용재총화)>>에 나오는 ‘OO의 피리’라는 수필의 내용을 재편집했음을 독자님들께서 양지해주시기 바란다.) 사실 그분은 유생이었다. 젊었을 때에 향교(鄕校)에서 학업을 닦고 있었는데, 이웃에 피리 부는 사람이 있었다. 그분은 독서하는 여가에 겸하여 피리도 배웠다. 이에 온 고을이 그를 피리의 명수(名手)로 추중(推重;높이 받들어 귀하게 여김)하였다. 그분이 서울에 과거를 보러 왔다가 이원(梨園 장악원)의 피리 잘 부는 광대를 보고 피리를 불어 그 교정(校正)을 청하니, 광대가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소리와 가락이 상스럽고 절주(節奏;리듬)에도 맞지 않으며, 옛 버릇이 이미 굳어져서 고치기가 어렵겠습니다.”고 하였다. 그분이 말하기를, “비록 그러하더라도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라고 하고, 날마다 다니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수일 후에 광대가 그분의 연주를 듣고는 말하기를, “규범(規範;법도)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장차 대성할 수 있겠습니다.”고 하였다.
대체 그분이 누굴까? 위 단락에서 ‘OO의 피리’라고 적었지만, 사실은 ‘박연의 피리’가 원제이며, 이 글의 주인공은 바로 박연(朴堧, 1378~1458)이다. 그분의 생애에 관한 약사(略史)는 ‘인터넷 두산백과’에서 거의 그대로 따다 아래와 같이 붙이려 한다.
‘1405년(태종 5),당신 나이 25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교리(校理)를 거쳐 지평(持平)·문학(文學)을 역임하다가 세종이 즉위한 후 악학별좌(樂學別坐)에 임명되어 악사(樂事)를 맡아보았다.
당시 불완전한 악기 조율(調律)의 정리와 악보편찬의 필요성을 상소하여 허락을 얻고, 1427년(세종 9) 편경(編磬) 12장을 만들고 자작한 12율관(律管)에 의거 음률의 정확을 기하였다. 또한 조정의 조회 때 사용하던 향악(鄕樂)을 폐하고 아악(雅樂)으로 대체하게 하여 궁중음악을 전반적으로 개혁하였다. 1433년 유언비어 유포혐의로 파직되었다가 용서받고 아악에 종사, 공조참의·중추원첨지사(中樞院僉知事)를 거쳐 중추원동지사를 지냈다. 1445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인수부윤(仁壽府尹)·중추원부사를 역임한 후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에 올랐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넷째아들 계우(季愚)가 처형되었으나, 그는 삼조(三朝)에 걸친 원로라 하여 파직에 그쳐 낙향하였다. 특히 저[大笒]를 잘 불었고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 신라의 우륵(于勒)과 함께 한국 3대 악성(樂聖)으로 추앙되고 있다. 영동의 초강서원(草江書院)에 제향되고, 지금도 고향 영동에서는 해마다 '난계음악제'가 열려 민족음악 발전에 남긴 업적을 기리고 있다. 시문집 《난계유고(蘭溪遺稿)》 《가훈(家訓)》이 있다. ((이상 [네이버 지식백과] 박연 [朴堧] (두산백과)에서))
그 뒤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또 거문고․비파 등 여러 악기를 익혀서 정묘(精妙)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세종(世宗)에게 지우(知遇)를 얻어 드디어 발탁 등용(拔擢登用)되었다. 관습도감제조(慣習都監提調)가 되어서 음악에 관계되는 일을 전담(專擔)하였다.
세종이 일찍이 석경(石磬)을 만들고 제학을 불러 교정하게 하였더니, 제학이 말하기를, “어느 음률(音律)이 일분(一分) 높고, 어느 음률이 일분 낮습니다.”고 하였다. 다시 보니 음률이 높다고 한 곳에는 찌꺼기가 붙어 있었다. 세종이 찌꺼기의 일분을 떼어내라고 명령하였다. 또 음률이 낮다고 한 곳에는 다시 찌꺼기 일분을 붙였다. 제학이 아뢰기를, “이제 음률이 바르게 되었습니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다 그의 신묘(神妙)함을 탄복하였다.
그의 아들이 계유의 난(亂)에 관여하여 제학도 또한 이 때문에 벼슬이 파면되고 시골로 돌아가게 되었다. 친한 벗들이 한강 위에서 전별하였는데 제학은 필마(匹馬)에 하인 한 사람을 거느린 쓸쓸한 행장이었다. 함께 배 안에 앉아서 술잔을 주고받다가 소매를 잡고 장차 이별하려 할 즈음에 제학이 전대(錢臺)에서 피리를 꺼내어 세 번 불었다. 그리고 떠났다. 듣는 이가 모두 쓸쓸한 느낌에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상 <<慵齋叢話>>에서 )
이제 나는, 나의 신실한 애독자들께서 그분에 관한 나머지 이야기를 따로 익히시기를 바란다. 대신, 나는 그분의 업적을 두 갈래로 요약코자 한다. 그 하나는, 그분이 ‘절대음감(絶對音感)’을 바탕으로 당시까지는 정리되지 않았던 음율(音律) 내지 음정(音程)을 정리하여 동양의 기본 5음계 ‘궁상각치우‘를 정립했다는 점이다. 위에서도 이미 밝힌 바 있지만, 서양 독일의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평균율‘을 고안해 내기 300여 년 전에 이미 이룩한 업적이 아닌가. 해서, 그분은 빼어난 율사(律師)였다. 또 하나는, 그분이 정립한 ’궁상각치우‘ 오음계(五音階)가 훈민정음 창제에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그분은 ’집현전‘에도 가담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 역사는 기술하고 있다. 사실 여러 학자들은 훈민정음의 기본자음 오음(五音) ’ㄱㄴㅁㅅㅇ‘은 그분이 정립한 ’궁상각치우‘ 오음계를 바탕으로 삼았다고 주장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분의 음정 연구 시기가 한글창제시기보다 다소 앞서거나 한글창제시기와 겹쳐지는 게 사실이다.(하략)>
4. 요한 세바스찬의 평균율, 옥타브 12등분
위 3과 마찬가지로, 나의 수필,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31)’에서 따다붙인다. 이 또한 자기표절.
(상략)헨델과 더불어 바로크음악의 쌍벽(雙璧)을 이뤘던 ‘요한 세바스찬 바흐(J.S.Bach, 독일,1685~1750)’. 그분은 한평생 교회를 떠나지 않고, ‘칸타타’를 비롯한 각종 종교음악을 작곡한 분으로도 유명하다. 그분의 그 많은 음악사적 업적 가운데는 피아노를 비롯한 쳄발로, 클라비코드 등의 건반 현악기 즉, ’클라비어(Clavier, Klavier)‘의 조율(調律)에 없어서는 아니 될 교본을 만든 업적도 포함된다. 바로 <<평균율 클라비어곡집(Tempered Clavier)>>이 그것이다. 그 곡은 현재 세계적 표준음율로 되어 있으며, 옥타브를 12등분하여 1단위를 반음으로, 2단위를 온음으로 균등히 나눈 것을 말한다. ’근사치의 음정을 실용적으로 균등하게 나눈 음(音)‘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하여간, 그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은 피아노 연주를 익히는 이들한테 없어서는 아니 될 교본이라고 한다. 조율사(調律師)들한테도 필수 교본임은 두말 나위 없고. 그러한 귀중한 작품 내지 고안품을 만들어 낸 동기는 더욱 흥미롭다. 그분은 전처(前妻)와 후처(後妻)의 몸에서 난 자녀가 무려 18명이었는데, 그들 모두를 음악인으로 기르고 싶어했다. 그 가운데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만이 음악인으로 성공했다고는 하나, 그 많은 자녀들한테 음감(音感) 내지 음정(音程)을 정확히 가르쳐 주고 싶어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이란 교본을 만들었다는 거 아닌가. 아울러, 그 많은 음악 제자들한테도 교본으로 쓰고자 그러한 고안품을 만들었단다. 그랬던 것이 후세의 그 많은 음악인들한테도 교본이 되었으니... . (하략)
위 3에 소개한 박연은 요한 세바스찬 바흐보다 정확히 313년 전에 편경을 통해 음정 연구를 하였으니,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피타고라스 - 귀도 다레초 - 박연 - 요한 세바스찬 바흐로 이어진 음정 연구가들. 우리는 그분들이 계셨기에, 악보를 통해 해석하는 연주자들의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작가의 말)
죽는 그날까지 ‘세상의 모든 음악’에 관해,음악공부를 해나갈 것입니다.
* 이 글은 본인의 티스토리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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