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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수필/신작 2023. 4. 16. 12:13
* 생각나는 대로 마구 적어댑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음악 칼럼니스트)
1. 영어 속담
영어 속담들 가운데에는 ‘When life gives you lemons, make lemonade.’도 있다. 직역하면, ‘인생이 신 레몬을 줄 때 달콤한 레모네이드를 만들어라.’가 된다. 레몬은 신맛이 강하고 껍질이 두꺼워 까먹기가 뭣하지만, 레몬 가공품인‘레모네이드’는 달콤한 데서 비롯된 말이라고 한다. 그 속담은 곧잘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로 풀이되곤 한다. 후자(後者) 풀이는, 남성이 길 가는 여성을 겁탈(劫奪)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어두웠던 시절, 영국에서도 성범죄가 만연했던 모양. 해서, 딸 가진 부모들은 자기네 딸들의 안위(安危)를 걱정하여 그렇게 일러주었다고 한다. 그러니 ‘피할 수 없으면, (너도) 즐기라.’는 그리 좋은 속담이 못 된다.
2. 키모노(着物,きもの, kimono)
다들 잘 아시다시피, 일본 여인네들의 전통의상은 독특하다. 마치 담요 같이 생긴 의상을 입는다. 그게 바로 ‘키모노’이다. 그 의상의 유래는 불행했던 일본 여인들 성착취와 맞물려 있다. 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 시대. 오랜 내전으로 남자의 씨는 마를 지경이었다. 그러자 천하를 통일한 그는 왕명을 내리게 된다. 후일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라도 남자아이들을 많이 낳아야 했으므로.
“언제 어디서든 남자가 원하면 아랫도리를 벗어주어야 한다. 그러니 모든 여성들은 담요를 늘 입고 다녀야 한다.”
그길로 일본은 모계중심사회가 굳건해진다. 어느 남자의 씨로 태어난 아이인 줄도 모르게 된다. 해서, 불가피하게 아이가 만들어진 장소 등을 성(姓)으로 삼게 된다. 우리나라의 성씨가 286개인데 비해, 그들 성씨는 그들 일본 성씨 대사전에 의하면 대략 30만 내지 40만. 木下(기노시타)는 나무밑에서, 山本(야마모토)는 산속에서, 太田(오타)는 콩밭에서 ...... 山野(야마노)는 산속인지 들판인지 아리송하고 두 남자가 연달아, 犬塚(이누즈카)는 개무덤에서, 小林(코바야시)는 작은 숲속에서, 水上(미나카미)는 온천에서, 皆川(미나가와)는 개천에서 각각 얻은 아이들 성씨. 모두 산모(産母)의 기억에 의존하여 붙인 성씨들인 셈이다.
키모노는 야합(野合)의 상질물인 셈. 들개들을 흘레를 연상케 하는 상징물. 이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 애비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태어난 아이들의 나라가 아닌가. 게다가, 그들은 열렬한 부부간의 정상적 사랑으로 태어난 아이들 후예들이 드물다고도 볼 수 있다.
기왕지사 야합 이야기 꺼냈으니, 공자님 탄생비화도 소개코자 한다. 공자님도 야합으로 태어났다. 공자의 아버지 숙량홀은 첫째 부인에게서 딸만 아홉을 두었다. 이에 두 번째 부인을 얻어 아들을 나았으나 불구였다. 건장한 아들을 원했던 숙량홀은 당인 안씨 집에 딸이 셋이 있는 걸 알고, 안씨댁에 딸을 줄 것을 청하였다. 이른바 청혼을 한 것이다. 안씨댁에는 딸이 셋이 있었는데, 셋째딸 안징재는 그 청을 받아들여 야합으로 공자를 낳았다. 이때 숙량홀의 나이 68세, 안징재의 나이 16세였다. 공자는 자라면서 무당인 어머니를 따라, 장례 일을 돌보며 장례의 규범 내지 예법을 정립했다. 사실 당신의 사상은 무당이었던 모친 덕분에 깨우친 셈.
3. 고쟁이
‘다음백과’는 이렇게 적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속옷이 매우 발달해 여자들은 치마 밑에 다리속곳·속속곳·바지·단속곳을 순서대로 입었다. 가장 밑에 입던 다리속곳은 계절에 관계없이 흰 목면으로 만들어 허리띠를 달아 입었고 다리속곳 위에는 속속곳을 입었다. 고쟁이는 속속곳 위 단속곳 밑에 입었는데 남자 바지와 비슷한 모양으로 밑이 터지고 가랑이의 통이 넓었다. 주로 여름에 입으며, 옷감은 무명·베·모시 등을 사용해 홑으로 박아서 만든다. 입을 때에는 오른편에 아귀를 내고 허리에 달린 앞끈을 뒤로 돌려 앞으로 오게 하고, 뒤끈은 그냥 앞으로 가져다 서로 잡아맸는데 지금은 수의로만 쓴다. 여자들은 고려시대부터 관고와 저상을 입었는데, 저상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여자 고쟁이, 관고는 치마 모양의 바지가 되었다.>
특히, 나는 위 내용 가운데에서 ‘고쟁이는 속속곳 위 단속곳 밑에 입었는데, 남자 바지와 비슷한 모양으로 밑이 터지고 가랑이의 통이 넓었다.’를 주목한다. 고쟁이는 밑이 터져 있었다는 점. 요즘 우리네 남성용 팬티가 앞이 터져 있듯이. 고쟁이의 그 ‘밑 터짐’의 용도를 생각하자니, 가슴 미어진다. 농경문화 시절, 층층시하에서 길쌈에다 들일에다 디딜방아에다 지칠 대로 지닌 아낙. 시어른들과 조롱조롱 달린 새끼들 눈치 때문에 남편과 변변한 사랑놀음도 못 하였단다. 그런데도 남편은 보채게 되고... . 그때 옷을 입은 채로 봉사할(?) 수 있는 걸 우리네 여인네들은 고안해내었다고 한다. 그게 바로 ‘밑 터진 고쟁이’라고 들은 바 있다.
4. 핸드볼
핸드볼 발전 약사(略史)다. 핸드볼의 기원은 그리스의 하르파스탄, 로마의 하르파스톰에서 시작된다. 그 당시의 게임은 공을 서로 빼앗아서 소정의 위치에 던져 넣는 체력본위의 운동종목이었다. 그것이 현재와 같은 형태를 갖춘 것은 1915년 독일에서 여성경기로 등장한 이래다. 그 후 오스트리아, 스위스, 미국, 체코슬로바키아, 벨기에, 덴마크, 스웨덴 등 여러 나라에 보급되어 점차 남자들 사이에서도 하게 되었다.
1919년 독일의 키를시렌츠의 제창에 의하여 경기규칙의 통일이 계획되었고, 1920년 베를린 체조연맹에 의하여 핸드볼로서 정식규칙이 제정되었다.
1921년에는 하노버에서 전 독일 핸드볼대회가 개최되어 현재와 같은 룰에 의한 최초의 경기가 선을 보였다.
1928년 암스테르담의 제 9회 올림픽대회에서는 국제 핸드볼연맹이 창립되었고, 제 11회 베를린 올림픽대회에서는 정식경기종목으로 채택되어 오스트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스위스, 미국, 독일 등 6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독일이 우승하였다.
한편, 7인제는 1819년에 덴마크의 호르가 닐센에 의하여 그 나라의 학교 체육에 채용되었다. 따라서 11인제 보다는 역사는 길지만 경기로서의 발전이나 보급은 늦었다.
위 약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사항. 위 단락에 ‘현재와 같은 양식을 갖춘 것은 1915년 독일에서 여성경기로 등장한 이래다.’라고 적고 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이듬해이다. 독일은 전장(戰場)에서 많은 젊은 남자들을 잃게 된다. 많은 군인들을 얻기 위해서는 건강한 남자아이들이 수없이 태어나야만 했다. 그 일환으로 가임여성들의 신체건강을 신장코자 핸드볼을 장려하게 되었다고 한다. 중학교 시절, 핸드볼 국가대표선수 출신 체육교사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었다.
두서없는 나의 이야기를 정리해보아야겠다.다들 너무도 잘 아시는 사항이지만, 체력은 국력이고, 국민의 수가 곧 국력이다. 전쟁을 일삼았던 일본이나 독일처럼 나라가 들어, 출산을 강요할 수는 없겠지만... . 저출산과 출산기피가 나라의 존망에 직결되는 현실을 생각하면서... . 하더라도, 자기 애비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는 섬나라 후예들에 비하면, 양친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태어나 성장해온 나는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내 사랑하는 애독자님들 여러분께서도 본인 부친의 성(姓)을 온전히 물려받은 점 자랑스러우시리라.
* 이 글은 본인의 티스토리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