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윤 수필가, 유해발굴단에 참여하다
    수필/신작 2024. 7. 23. 22:34

    '만돌이농장' 반짝반짝하게 하느라,

    글짓기를 여태 미뤄왔어요.

    저 건재해요.

    그리고 두루두루 사랑해요.

     

     

     

                                    윤 수필가, 유해발굴단에 참여하다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음악 칼럼니스트)

     

     

      그들은 10kg들이 쌀자루에 차례차례 들어 있었다. 갱도(坑道) 안. 새로 개설했다는 레일로드(rail-road). 나는 내가 맡은 구간 20여 미터를, 대략 6분 간격으로, 다음 유해발굴단 요원(?)한테, 손수레로 밀어 인계하곤 하였다. 나를 포함해서 6인이 그렇듯 조(組)를 이뤄, 그들 유해를 갱 밖에 옮겨나갔다. 사실 쌀자루에 담아 갱도에 차곡차곡 쌓아둔 그들 열 두 위(位)가 일회 작업량.

       입구까지 족히 200미터가 될 듯한 수평 갱도.밖은 한여름 더위이거늘, 시원하기만 하였다. 아니, 으스스했다. 손수레가 레일을 타고 굴러갈 적에는 마치 전투기, 전폭기 굉음(轟音)인 듯 굉음이 울렸다. 그들의 울부짖음인 듯하였다. 역산(逆算)해본즉, 2024년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74년 전인 1950년. 6.25발발 초기 이들 3,400여 명은 희생되었다고 한다.

      장화 신은 내 발 아래 철제 레일은 쇠가 녹아, 도랑으로 면면히 붉은 쇳물이 흘러가는데... . 이 쇳물은 우리네 혈액 적혈구 헤모글로빈과 성분이 같지 않은가. 그들 3400여 명 희생자들의 선혈(鮮血)로 느껴지는 것은 어인 일인지? 내가밟고 서있는 갱도 바닥 흙도 ‘정몽주’가 읊었다는‘백골이 진토되어(白骨爲塵土)’의 그 ‘塵土’일 수도 있다고 여겼다. 안전모를 썼으나, 이따금 안전모에 부딪히는 아치형의 천정. 이 좁은 공간에 3,400여 명을 굴비처럼 쇠사슬로 엮어서... . 진즉 이런 줄을 알았더라면, 긴 소매 옷을 입고 나섰을 터인데, 종종 암벽에서는 물방울이 떨어져 내 살갗을, 내 폐부를 적셔댔다. 그 물방울은 74년 여 마르지 않았던 유가족들의 피눈물? 이승을 억울하게 하직한 피살자들의 눈물?

       비극이여, 비극이여, 비극이여! 1950년 6월 25일, 우리 민족한테는 최대 비극이 발생한다. 그딴 이념이 무엇이며 그깟 욕망이 무엇이란 말인가. 전쟁광들은 인류를 ... . 그저 ‘단군의 자손’하나로 뭉쳐 살면 될 것을. 한국전이 발발하자, 초기 전세(戰勢)는 남녘의 이승만이 그야말로 초전박살 위기. 그러자 ‘내부의 적(敵)’으로 여겨, 화약고를 없애겠다며, 보도연맹 등으로 투옥된 이들을 그야말로 선제적(先制的) 조치로(?) 전국 도처 은밀한 장소에 군용트럭에 실어다 몰살시켰다고 한다. 이 무지막지한 나는, 70여 년 살아오는 동안 그러한 내막을 소상히 모르고 지내왔다. 부끄럽기 그지없다.

       이제 속 시원히 밝히겠다. 나는 경산역 앞에 총총 들어선 인력시장에서 부름을 받고, 아파트 경비원 비번날 흔히들 말하는 ‘노가다(일용인부)’에 나섰던 것이다. 일당 140,000원에 환장들여서. 작업장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막연하게 나섰다. 경산시 평산동 652번지에 자리한 코발트 폐광. 그날 퇴근해서 인터넷 ‘나무위키’를 통해‘경산 코발트광산 학살사건’을 비교적 소상히 익힐 수 있었다. 너무도 슬픈 일. 당시 대구를 비롯한 여러 형무소에 수감 중인 이들을 모조리 군용트럭에 실어다가... . 물론, 악질적인 죄인들도 더러는 있었겠지만, 국가의 안위를 우선시하면서 그런 일을 자행했다니... .

       대체, 평화는, 자유는, 공존동생은 우리네 인류가 앞으로도 얼마나 비싼 대가를 치러야할는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제대로 인권도 누리지 못한, 주장하지도 못한, 삼심제도(三審制度)도 제대로 누리지 못했을 영혼들을 위로하며... .

     

      작가의 말)

      사실 그 경산시 평산동 652번지 코발트 폐광 위에는 골프장이 있었다. 우리네 슬픈 역사와는 상관없이 잔디밭에서 골프를 치고 있었다.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유해발굴사업은 이뤄져 왔는데, 수평갱도가 아닌 수직갱도에 쳐 밀어넣어 수장시킨(?) 유해들은 발굴조차도 못하였다고 그날 유족회 회장께서 전해주었다.

      전쟁은 비참하다. 전쟁만은 없어야 한다. 희생은 없어야 한다.

      부디, 부족한 나의 글을 꽉꽉 채워서 읽어주시길.

     

     

      * 이 글은 본인의 티스토리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수필 > 신작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를 보내야 해  (0) 2024.07.31
    어느 괴짜  (0) 2024.07.29
      (0) 2024.07.19
    두루 쓰임 ‘하다(Do)’  (0) 2024.05.20
    비바람 몰아치던 밤  (2) 2024.05.17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