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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승(怪僧)의 거시기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우리의 옛말에, ‘중[僧]이 고기 맛을 알면, 빈대도 남기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 ‘암탉이 울면 집안 망친다.’고도 하였다. 신라의 진성여왕의 남성 편력, 당나라 측천무후의 남성 편력... . 그들은 남자를, 아니 성교를 밝힘으로써 국정(國政)에 소홀했던 게 분명하다. 그들은 그러한 일로 나라를 망하게 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제정 러시아를 무너뜨린 괴승, ‘그리고리 라스푸틴’의 거시기도 있었으니... .
이하는 내가 최근에 자주 취했던 ‘꼴라주 형태의 수필’로 펼쳐간다. 사실 내가 직접 재편집하기보다도, 이미 적혀 있는 글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독자님들한테 더 어필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아래는 인터넷 ‘위키백과’에서 그대로 옮겨온 글이다.
1. 입궁
시베리아의 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8살 때부터 떠돌이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1903년 당시 제정 러시아 수도인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나타났고, 혈우병으로 고생한 황태자를 기도 요법으로 병세를 완화시켜 신망을 얻었으며, 귀족 대접을 받게 되었다.
2. 폭정
당시 극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리는 알렉산드라 황후는 라스푸틴 없이는 하루도 견디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자 라스푸틴은 이를 이용하여 니콜라이 2세를 사실상 허수아비로 만들며 폭정을 일삼았다.
이러한 라스푸틴을 니콜라이 2세의 딸들은 별로 탐탁치 않게 여겼으며, 특히 장녀 올가 로마노바는 라스푸틴을 죽여 없애야 러시아가 평화로워진다고 하면서 라스푸틴을 몰아내려 하였다. 하지만 라스푸틴은 알렉산드라 황후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올가가 쉽게 건드릴 수 없었다.
라스푸틴은 러시아의 농민들에게 생계유지조차 어려울 만큼 가혹한 세금을 거둬들여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웠으며 이에 항의하는 농민들에게 총탄을 퍼붓기까지 했다. 이를 후세의 사람들은 ‘피의 일요일’이라 부르고 있다. 특히 1915년 니콜라이 2세가 제1차 세계대전에 직접 참전하게 되자 러시아는 완전히 라스푸틴의 천하가 되었는데 이때 라스푸틴의 폭정은 전무후무한 수준이었다. 이 때문에 러시아의 모든 일반 농민들은 물론이며 심지어는 황제파의 귀족들마저 황제에게 등을 돌리고 만다.
3. 최후
라스푸틴의 반대 세력이던 펠릭스 유스포프 공작,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푸리쉬케비치가 라스푸틴의 전횡으로 인해 반란이 일어날까 두려워 그를 처치하기로 모의하고, 궐석재판을 집행하여 라스푸틴에게 사형을 언도한 후 라스푸틴을 잔치로 초대했다. 그들은 준비한 독극물을 라스푸틴에게 먹였다.
그러나 라스푸틴은 독약을 먹었음에도 기타에 맞춰 춤을 추었는데, 그의 기행은 2시간 반 정도 계속되었다. 그러자 황족 펠릭스 유스포프가 그를 총으로 쏜 뒤 강철 지팡이로 머리를 마구 때리고 양탄자에 싸서 얼어 붙은 네바 강 물에 빠뜨렸다. 이 때 라스푸틴의 몸에는 실탄이 4발이나 박혔다.
나중에 황비 일행이 라스푸틴의 상태를 보니 그는 독살도, 총살도 아닌 익사로 죽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더군다나 라스푸틴의 영구를 네바 강에서 건져올릴 당시 네바강 표면에 얼어붙은 얼음에서 라스푸틴의 손톱자국이 발견되어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라스푸틴은 처형되기 전에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내용은 그의 예언이었고, 그 예언은 ‘나는 이제 곧 죽을 것이고 나를 죽이는 장본인이 황제의 친구(황족 혹은 인척)이면 황실도 머지않아 몰락할 것이고 러시아 귀족에게 죽는다면 차르는 25년후에 러시아에서 자취를 감출것이며 농부의 손에 죽는다면 차르는 수백 년 동안 이 땅을 다스릴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라스푸틴의 예언대로 몇 달 뒤에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 제정 러시아는 붕괴되었으며 로마노프 왕조도 단절되었다.
4. 라스푸틴의 페니스
그의 죽음 이후 라스푸틴의 페니스와 관련해서 많은 이슈거리가 생산되었다. 라스푸틴이 1916년에 귀족들에게 살해됐을 때, 몇몇 연구가들은 그가 성적으로 불구가 된 상태였으며, 그의 페니스는 절단되었다고 언급하였다. 상당히 큰 페니스를 가지고 있었던 그는 수많은 귀족들로 부터 시기를 받았으며 한국 역사에도 역사 기록가 ‘김병수’가 쓴 ‘러시아사’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 이후, 다수의 사람들은 그의 절단된 페니스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공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이 라스푸틴의 페니스라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가. 증명된 특징
러시아 혁명을 연구한 몇몇 역사학자들은 라스푸틴의 성적 기교와 그의 페니스의 크기, 그리고 그것의 비정상적 특징에 대해 언급하였다. ‘올랜도 피지즈(Orlando Figes)’는 이렇게 적었다.
‘한 여성이 고백하기를, 그녀는 처음으로 그와 성교를 나눴는데, 그 오르가즘이 너무 강렬해서, 결국 기절했다고 한다. 아마도 성교를 나누는 상대로서 느끼게 되는 그의 매력은 신체적 측면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라스푸틴을 살해한 펠릭스 유수포프(그의 동성연애자라는 추측도 있음)가 주장하길, 그의 용맹은 그의 유별난 크기를 가진 페니스에 전략적으로 생긴 대형 사마귀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의 페니스 크기는 평상시에도 30cm에 다달랐으며 발기시에는 40cm가 넘었다고 한다.
라스푸틴의 암살과 관련된 다른 설명에 따르면, 라스푸틴의 일원 중 한명은 그를 ‘페트로그라드(Petrograd)의 악명 높은 사람’이라고 묘사하였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살인 공모자들은 명확하게 이미 죽은 라스푸틴의 페니스의 실제 크기와 그 특징을 발견하였다.”고 제시되어 있다.
러시아의 귀족들은 라스푸틴의 의미심장하면서도 점차 증가하고 있는 황후에 대한 영향력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었다. 1916년 12월 29일에 라스푸틴은 결국 살해되었다. 몇몇 전문가 들은 그의 살인자들이 그를 죽이면서 성적 불구 상태로 만들었고, 그의 페니스를 절단하였다고 말한다. 그의 부검과 관련된 공식 보고서는 스탈린 시대동안 사라졌다. 물론 그 보고서를 본 적이 있는 몇몇 전문가들 또한 사라졌다.
몇몇에 따르면, 한 하녀가 라스푸틴이 살해된 장소에서 절단된 페니스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것은 깊숙한 곳에 보관되어 오다가, 웬일인지 1920년대에 프랑스 파리에서 추방 생활을 하고 있던 여성들에게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 여성들은 그의 페니스를 나무 상자 안에 넣어 소중히 보관하였다. 그 페니스를 숭배하는 여성들에게 라스푸틴의 딸 마리(Marie)는 아버지의 신체 일부인 그것을 돌려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녀는 1977년 캘리포니아에서 사망할 때까지 그것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마리 라스푸틴의 사후, 마이클 어거스틴(Michael Augustine)은 ‘산타 크루즈(Santa Cruz)’라는 이름의 개인 창고 판매점에 있는 그 ‘물건’을 사게 된다. 그는 진열되어 있는 마리 라스푸틴의 다른 개인 소장품을 확인하던 중에 해당 ‘물건’을 구매하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본함(Bonham) 경매장에 이것을 경매로 부쳤으나, 경매장 측에서는 그 ‘물건’이 페니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재빨리 알아차렸다(그것은 사실 해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해삼으로 밝혀진 그 ‘물건’이 1920년대 러시아 여성들이 숭배했던 그 페니스와 같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거스틴은 전문가들의 그러한 결론에 대해 동의했다. 그 경매장은 후에 마리 라스푸틴의 재산 중에 포함된 원고, 편지, 사진, 그리고 이상하게 보이는 ‘페니스 오이(penis cucumber)’ 등을 경매로 내 놓았다.
2004년도에 러시아 자연과학재단의 전립선 연구 센터 소장인 이고르 크냐즈킨(Igor Knyazkin)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성인물 박물관을 개장했다고 밝혔다. 이 박물관에서 크자즈킨은 몇몇 라스푸틴의 편지등[5]을 출처로 제시하면서, 그리고리 라스푸틴의 ‘보호된’ 페니스가 있다고 주장하였다.(그것은 약 30cm 정도의 크기라고 한다.)[10] 또한 그는 자신이 그것을 프랑스의 유물 수집가로부터 €6,600 (US $8,000)에 구매했다고 언급하였다. 크나즈킨은 단지 그 페니스를 보는 것만이 '남성의 중요성'을 보호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그것이 라스푸틴의 것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자, 다시 내가 전하는 이야기다. 위 첫 단락에 적은 문장은, 많은 수도승과 많은 여성들한테는 참으로 미안한 이야기다. 도매급으로(?) 말했으니, 더욱 미안하다. 하더라도, 제정러시아 말기에도 얼빠진 왕후가 그렇듯 있었으며, 나라를 망치기까지 했음을 주시한다. 자고로, 색(色)에 너무 빠져들면, 비극적 사태를 맞게 된다는 걸 우리는 위와 같은 사례를 통해서도 다시 한 번 깨우쳐야 할 줄로 안다. 참말로, 우리는 역사에서 삶의 지혜를 배우게 된다. 그러나 서글프게도, 역사는 반복된다는 거. 그리고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면, 자기 눈에는 피눈물이 나게 되어 있다는 점. 그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나아가서, 늙더라도 곱게 늙어가야 한다는 거 잊어서는 아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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