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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찬드라굽타의 발
    수필/신작 2014. 12. 5. 08:36

     

    찬드라굽타의 발

     



                                                                             윤근택

     

      나는 지금 인도 남서부의 종교유적지 ‘슈라바나 벨리골리아(하얀 연못의 스승)’에 와 있다. 산등성이에 올라 ‘찬드라굽타의 발’ 앞에 선다. 그의 석조(石彫) 발 곁에는 순례자들이 바친 꽃들과 열매들이 즐비하다. 내가 묵상에 잠겨 있는 동안, 자이나교 사제는 꿇어앉아 그의 발자국 조형물을 두 손으로 연거푸 쓰다듬고 있다. 그의 기도는 절절하다.

      “찬드라굽타, 찬드라굽타 ... .”

      가이드가 일러준다, 자이나교 신자들은 이처럼 찬드라굽타의 발을 숭배한다고. 나는 손수건을 꺼내 몰래 눈자위를 훔친다. 저 사제의 울음 섞인 기도 때문만은 아니다. 때마침 불어오는 찬바람 때문만도 아니다. 한 위인은 이곳에 맨몸으로 맨발로, 참으로 오랜 동안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는 마스크인 양 입에다 헝겊재갈을 물고 단식까지 하면서. 그는 그렇게라도 해서 ‘모크샤’ 즉, 구원을 얻고자 했다. 자리를 옮겨 동굴에서 끝내는 굶어 죽었다. 기근에 허덕이는 자신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그처럼 고행을 했다니... .

      아주 먼 옛날, 기원전 320년경 이곳 인도에는 찬드라굽타라는 사내가 있었다. 그는 마가다 난다왕조의 난다왕자와 후궁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로도 알려져 있다. 왕궁에서 어떤 연유로 궁궐 밖으로 쫓겨난다. 그는 이리저리 팔려 다니다가 공작새를 조련하는 이한테서 길러진다. 그러다가 영리한 힌두 사제 ‘카우틸리아’를 만난다. 카우틸리아는 ‘왕놀이’를 하는그의 비범함을 보고, 진짜 왕이 되는 비결을 넌지시 알려준다. 그는 보병 60만, 기병 3만, 코끼리 9천 마리로 변방부터 공격해 들어가 왕궁을 뺏는다. 그는 인도 역사상 첫 통일국가 마우리아(공작)제국을 세워 광대한 영토를 확보한다. 그는 전쟁터에서, 어릴 적 어머니의 충고를 떠올린 덕분이다.

      “얘야, 접시 중앙의 음식은 뜨거워 입을 델 수 있으니, 음식이 식어가는 가장자리부터 떠먹으렴.”

      그는 이민족 알렉산더가 정복했던 땅도 도로 찾아 조국에 바쳤다. 그는 은인이었던 카우틸리아의 도움으로 나라를 잘 다스렸다. 뛰어난 행정제도를 갖추고, 운하를 만들고, 병원을 짓고, 도로망을 확충하는 등. 한편, 막강한 군사력으로 이민족들이 함부로 넘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가 하면, 잘 무장된 젊은 여성집단의 호위를 받으며 호화로운 궁궐생활을 누렸다.

      그러던 그가 시련을 맞게 된다. 그의 스승인 현자(賢者) ‘바두라바후’는 그에게 단단히 이른다. 장차 12년 동안 가뭄이 들 테니, 미리미리 대비하라고. 그는 갖은 노력을 다해 보았으나 소득이 없자, 난생 처음 절망하게 된다. 그는 왕국을 버리고 홀연히 길을 떠난다. 그가 오랜 편력(遍歷) 끝에 당도한 데가 바로 이곳 슈라바나 벨리골리아다. 이곳은 그의 스승 바두라바후가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그는 스승의 영향으로 독실한 자이나교도가 되었다. 그가 따르고자 했던 자이나교의 가르침 또한 불교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는 불살생(不殺生), 선행, 무소유, 참회, 고행을 통하여 모크샤를 얻고자 했다. 하기야 자이나교를 연 ‘마하비라’와 불교를 연 ‘시타르타’가 동시대의 인물이었다니... .

      나는 이 산등성이에 꼼짝 않고 서 있다. 사제는 여태 그의 발을 쓰다듬으며 구성지게 기도를 바치고 있다. 때마침 불어오는 몬순 바람이 차건만, 그는 발가벗은 채로 아직도 서 있는 듯하다. 난데없이, 그의 환영(幻影)에 ‘꾸뜹미나르’ 뜰에 선 ‘쇠기둥’이 겹쳐진다. 그 쇠기둥 또한 그의 화신(化身)일 줄이야!

      일전, 나는 델리의 꾸뜹미나르 유적군에 있었다. 11세기경 아프가니스탄 노예 출신 ‘꾸뜹우드딘에어백’은 북인도를 제패하여 이른바, ‘노예왕조’를 열었다. 그는 자이나교와 힌두교 사원를 헐고 그 부산물로 술탄국의 승전탑인 꾸뜹미나르를 세웠다. 그날 일행들은 경내를 돌다가 말을 맞춘 듯,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답다’며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내 가슴은 그저 아릴 따름이었다. 그것은 빼앗고 빼앗긴 또 다른 야만의 흔적들이었기에. 나아가, 인도 첫 통일국가 마우리아제국 후손들의 자존심도 생각해보았다. 4세기경 그들은 시조(始祖)를 기리기 위해 ‘찬드라굽타의 쇠기둥’을 만들었다. 그의 수도 ‘파트나’에서나 봄직한 기념물이 그곳에 우뚝 서 있었으니... . 아니면, 그의 영혼이 머물렀던 이 언덕에 서 있어야 옳거늘. 그래, 본디 역사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시금 생각해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무게 6톤, 직경 40센티, 높이 10미터의 쇠기둥이 그곳에 서 있는 게 오히려 찬드라굽타의 격에 맞을 수도 있다. 설령, 이교도들이 그의 영혼을 인질로 잡아둘 요량으로 그렇게 세워두었더라도, 그는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는 세속적 욕망을 다 떨치고 떠난 터이니. 72미터 사암(砂巖)으로 쌓은 꾸뜹미나르가 세월에 겨워하는 동안, 10미터 쇠기둥은 햇볕과 몬순의 모진 비바람에도 녹슬기는커녕 신비로운 빛을 더해 가고 있었다. 줄잡아 1500년 동안 녹이 나지 않는 걸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뛰어난 야금술 덕분이라고, 99.96% 순도 덕분이라고, 청정한 환경 덕분이라고. 심지어, 호기심 많은 어느 과학자는 쇠조각을 떼어다가 공해에 찌든 곳에 두어봤단다. 그랬더니 이내 녹이 나더란다. 그러나 그의 행로를 따라 오는 동안 그 의문이 다소 풀렸다. 쇠기둥에는 그의 영혼이 깃들여져 있기 때문일 거라고, 모진 풍우 앞에 나신(裸身)으로 서서 백성들의 굶주림을 아파했던 영혼이 깃들여져 있기 때문일 거라고, 또한 후일 후손들이 겪게 될 이민족의 침략에서 조국을 지켜주려는 영혼이 깃들여져 있기 때문일 거라고.

      인도 최초의 제왕 찬드라굽타는 모크샤를 얻으러 떠나갔다. 시타르타가 그랬듯이, 마하비라가 그랬듯이, 뒷날 손자 아소카가 그랬듯이, 부귀와 영화를 초개같이 버리고서. 그는 고행 - 금식 - 깨달음 - 죽음으로 이어지는 인도인 특유의 노정을 통해 대승적 구원을 얻었다.

      이교도인 내가, 이방인인 내가 온당한지도 모르면서 그의 발을 쓰다듬는다. 자이나교 사제를 따라 기도문도 바친다.

      “찬드라굽타, 찬드라굽타! 당신 영혼을 기리나이다.”

     

      힌트) 시인 유치환은 울릉도에 가 본 적 없이, '울릉도'란 시를 적었습니다. 미국 포스터는 지도책을 펴서 어느 강을 찍었지요. 그리고는 '스와니강'을 작곡했지요. 수필가 찰스램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면서도, 마치 자기 아들이 있는양 '꿈속의 아이'를 적었지요. 수필가 윤근택은 외국 여행이라고는 단 한번도 한 적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이러한 역사기행문을 적었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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