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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생긴 아소카
윤근택(수필가/문장치료사/수필평론가)
지금 아소카를 만나러 옛 마우리아 제국의 수도, ‘파트나’에 와 있다. ‘아감 우물’ 앞에 당도한다. 막 여러 쌍의 결혼식이 성대히 열린다. 지금은 상서로운 곳으로 여겨, 많은 이들이 이처럼 축제를 위해 모여들지만, 아소카 시절엔 이곳이 고문장이었으며, 아소카 스스로 ‘지상의 지옥’으로 불렀다.
가이드는 전설을 한 자락 들려준다. 어느 봄날, 아소카는 500여명 하렘의 젊은 미녀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한 미녀에게 은근한 눈길을 보낸다. 가뜩이나 추남인 터에, “못생긴 아소카!” 모멸을 당한다. 두꺼운 구리판으로 싸서 불태워버리라고 명한다. 이에 신하 하나가 왕의 품격에 맞는 고문장을 지을 것을 아뢴다. 아소카는 왕명을 어기는 이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이 ‘아감 우물’에서 고문을 하게 된다. ‘찬드 아소카(잔혹한 아소카)’라는 별명을 얻는다. 아소카의 어머니는 어린 왕자가 칼을 가지고 놀 때마다, 생명에 대한 외경을 일러주곤 했다는데….
아소카는 마우리아 제국을 연 찬드라굽타의 손자이며 그 제국의 3대왕이다. 잠깐이나마, 찬드라굽타를 소개하고 넘어가자. 그는 어떤 위인인가. 그는 본디 마가다의 왕 다나난다의 군인이었다. 그의 자랑스럽지 않은 출생 비밀과 얽혀진 일로 여겨지나, 어떤 갈등으로 왕궁에서 쫓겨난다. 영리한 힌두 사제 ‘카우틸리아’는 그에게 왕이 되는 비법을 알려준다. 그는 보병 60만, 기병 3만, 코끼리 9천 마리로 변방부터 공격해 들어가 왕궁을 뺏는다. 그는 인도 역사상 첫 통일국가를 세워 광대한 영토를 확보한다. 그는 전쟁터에서, 어릴 적 어머니의 충고를 떠올린 덕분이다.
“얘야, 접시 중앙의 음식은 뜨거워 입을 델 수 있으니, 음식이 식어가는 가장자리부터 떠먹으렴.”
여행자를 위한 영화가 상영 중이다. 이곳으로 떠나오기 전 제법 사전지식을 익혔지만, 이처럼 생생하지는 않았다. 아소카는 위에서 소개한, 조부가 이룩한 통일국가를 유지하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남동부 ‘칼링가 제국’을 잔혹하게 공격하여 수도 ‘도살리(오늘날 오릿사)’를 함락한다. 생포자가 15만명, 살해자가 10만명. 아소카는 폐허가 된 들판에 나섰다가, 화살촉이 꽂힌 채 축 늘어진 칼링가 아이를 양팔에 받쳐들고 몹시 괴로워한다. ‘못생긴 아소카’의 얼굴이 한층 일그러진다. 그 길로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그는 독백한다.
“전쟁은 모두를 괴롭게 한다. 전쟁은 사랑하는 이를 앗아가고… . 나는 이제부터 설득으로 정복해 나갈 것이다. ”
아소카는 속죄의 추모탑을 짓는 한편, 순례자가 되어 스승을 찾아 인도 전역을 누비게 된다. 그는 저 갠지스 강가에서 바라나시 출신 승려를 만난다. 승려는 석가께서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 아래로 가라고 이른다. 그는 순례하면서 빈민층과 병자들에게 자선을 베푼다. 그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그들의 애환을 가슴으로 익혀나간다. 이 점 또한 자기 조부 찬드라굽타를 꼭 빼어 닮았다. 찬드라굽타는 말년에 이르러, 자신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12년 동안 굶주림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벌거벗은 성자가 되었다. 산마루에 맨발로 서서 찬바람을 맞는다. 그리고는 단식하여 깨달음을 얻고 죽는다. 그러고 보면, 조손(祖孫)은 ‘아르샤(부와 성공)’를 지나, ‘카마(쾌락추구)’도 지나, ‘다르마(미덕, 法)’도 지나, 최종목적지 ‘모크샤(계몽, 구원)’에 닿고자 했다. 그는 비폭력과 평화를 추구하며 윤리에 의한 통치를 원했다. 이는 곧 다르마(법)의 실현이다. 곳곳에 절을 세우고 경전을 정비하는 한편, 실론, 태국, 타이, 미얀마 등지에 불교를 전파하게 된다. 그렇더라도, 그는 편협하지 않았다. 조부의 비폭력적 자이나교 정신과 자신의 자비적인 불교 정신을 융합하여 진실, 연민, 정에 바탕을 둔 국민통합을 이루어낸다. 이는 118개 민족의 다양한 사상을 지극히 인도의 방식으로 통합한 사례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3,300의 신을 모시는 나라에서 전무후무한 관용이기도 하다.
일행들이 생각에 골똘한 나를 채근한다. 나는 이제 아소카의 돌기둥 앞에 서 있다. 가이드는 돌기둥에 빼곡히 적힌 산스크리트어의 내력을 일러준다. ‘찬드 아소카’는 죽었고, 그의 역사도 저 명문(銘文) 속에 무려 2,000여 년 동안 감춰져 있었단다. 그러다가 1837년 영감이 뛰어난 영국인, ‘제임스 프립센’이 두 개의 열쇠문자를 해독해냄으로써 드디어 ‘진실의 보고(寶庫)’를 열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거꾸로 선 ‘T’는 ‘누군가의 선물’ 즉 ‘다남’이요, 흠집낸 듯한 ‘C’는 ‘~의’ 즉 ‘처소격 조사’ 임을 밝혀낸 것이다. ‘신의 총애를 받는 라자피아다시가(아소카)는 ... ’으로 시작되는 아소카의 칙령이었다. 못생긴 아소카는 재임 중 인도 전역의 돌과 기둥에다 자신의 칙령을 새기도록 한다. 그 내용은 실로 엄청난 것들이다.
그는 ‘모든 인간은 내 자식이다.’라고 한다. 그가 순례 중에 많은 부류의 사람들을 만났음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들려준다. ‘우리 인간들은 … 그 지위가 어떻든 모든 인간의 도리를 나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연장자를 섬기며….’, ‘…. 시종과 노예에게도 그래야 한다.’ 그의 이러한 생각이 먼 뒷날 UN 인권선언의 본보기가 된 듯하다. 한편, 그는 그리스, 마케도니아, 북아프리카, 시리아, 바빌로니아 등지에 칙사를 보낸다. 그가 인류의 형제애와 세계의 평화를 얼마나 갈망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그의 사랑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그치지 않는다. ‘짐이 법률 조항을 마련하노니, 동물 몇 몇 종의 도살을 금한다.’라고 한다. 지난 번 코스에서 둘러봤던 동물병원에서 여성 치료사는 병든 라마를 가리키며 자랑스레 말했다. 그 곳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병원이라고 했다. 그녀는, 아소카가 따로 경찰관을 두어 동물을 보호하였고, 현재도 그 지시대로 한다고 덧붙였다. 아소카는 단순한 동물 애호가가 아닌 듯싶다. 살생을 금하라는, 아니 모든 생명체를 어여삐 여기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한 듯하다.
우리 일행은 차를 타고 달려 오릿사(도살리)에 닿았다. 이곳은 이미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칼링가 제국의 옛 수도다. 아소카가 무자비하게 공격했던 전쟁터이기도 하다. 차로 달려오는 동안 내내 자동차 바퀴와 법륜(法輪)과 인도의 국기 문양이 한데 어우러져 신비스러움을 자아냈다. 실은, 인도가 영국의 오랜 통치에서 독립을 할 때 국기의 문양을 법륜으로 정했다고 한다. 이들 인도인들은 ‘부처님의 법륜’이란 말보다는 ‘아소카의 법륜’이란 말을 즐겨 쓰는 듯하다. 그뿐만도 아니다. 이곳 인도에서는 ‘아소카’라는 단어를 유난히 즐겨 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오는 동안 ‘아소카’ 간판도 여러 개 보았다. 주민들은 ‘아소카’가 ‘슬픔이 없는’ 또는 ‘근심이 없는’의 의미라고 들려주었다. 비록 아소카왕은 인간적인 고뇌에 싸여 있었더라도, 국민은 태평성대를 누리며 근심도 슬픔도 없었다는 데서 유래되었을까? 아무튼, 거침없이 굴러가는 ‘아소카 법의 바퀴’는 여러 세기 후의 나를 이곳 문서고(文書庫) 앞에까지 데려왔다. 기록문이 즐비하다. 관리인이 들려준다. 아소카의 이야기는 줄잡아 20개 버전이 있단다. 그 가운데는 왕자 시절, 깨끗하고 하얀 눈을 가진 애마 ‘파완’을 타고 밀림 속으로 갔다가 ‘기우리와키’ 공주를 만났다는 동화같은 이야기도 있다. 사랑하는 왕비를 잃고 고독과 번민 속에서 죽어 아라한의 자리에 올랐다는 버전도 있다.
못생긴 아소카는 모크샤를 얻으러 떠나갔다. 시타르타가 그랬듯이, 마하비라가 그랬듯이, 찬드라굽타가 그랬듯이 부귀와 영화를 초개같이 버리고서. 그는 고행 - 금식 - 깨달음 - 죽음으로 이어지는 인도인 특유의 노정을 통해 대승적 구원을 얻었다. 잘 생긴 이들이 많은 이 시대를 살면서, 못생긴 아소카를 거듭거듭 생각해본다. 정녕, 그는 ‘영혼의 제국’을 건설하였다.
이제 그의 ‘기둥 칙령’은 노을진 갠지스 강가에서 나를 울린다.
* 이 글은 2011. 4. 적었습니다. 전자도서관(네이버> 윤근택>전자도서관> 미발표작)에서도 다시 읽을 수 있습니다.
* 힌트 : 시인 유치환은 ‘울릉도’에 간 적도 없이 ‘울릉도’란 명시(名詩)를 적었다고 합니다. 미국의 포스터는 지도책을 펴서 이곳저곳을 찾다가 ‘스와니강’을 작곡했다고 합니다. 윤근택은 해외여행이라고는 간 적이 없습니다. 전통적인 기행수필에 대한 도발이기도 합니다.
* 작가의 상상이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지 시험해 본 것이기도 합니다.
* 작가는 그 시대의 아픔을 변죽을 울리듯, 암시로써 고발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