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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마솥이 그립다
    수필/신작 2014. 12. 15. 21:20

     

    가마솥이 그립다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양은솥을 시쳇말로, 10여년 사이에 벌써 두 개째 해 먹었다. 농막 안에서 분주히 생감을 깎는 동안, 음식물 타는 내음이 진동했다. 아침 일찍부터 아궁이에다 군불도 땔 겸 구내식당에서 얻어온 ‘잔 밥’을 강아지 밥으로도 덥힐 겸 장작개비를 잔뜩 넣었던 터라, 양은솥의 물이 졸아 음식물이 타려니 여겼다. 하지만, 밖에 나서서 양은솥 뚜껑을 열었더니, 양은솥 바닥이 이번에도 뻥하니 뚫어져 있지 않겠는가. 그 정도의 화력(火力)에도 그토록 약하다니, 양은솥은 한심하기까지 하다. 그것이 강아지들 간식이었기에 망정이지... .

    이 밤 내내 양은솥이 아닌 가마솥을 그리워한다. 사실 이 농막 아궁이 위에 걸기에 알맞은 가마솥 구하기도 이젠 그리 쉽지 않을뿐더러, 그 가격도 만만찮은 걸로 알고 지낸다. 참말로, 우리네는 그것을 ‘가마솥’이라고 불렀다. 우리 쪽 어른들은 ‘가매’라고 부르곤 하였다. 부엌엔 고운 황토로 미장한 부뚜막이 있었고, 그 부뚜막엔 각각 크기가 다른 밭솥과 국솥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그것들은 무쇠로 주조(鑄造)한 솥이었고, 부지런한 아낙네들이 들깨기름으로 수시로 옷을 입혀 반질반질하기만 하였다. 아궁이에는 무쇠로 만든 불문[火門]도 있었다. 그 불문의 뚜껑에는 ‘삼림애호’ 란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게 상례(常例)였다. 한편, 사랑채 아궁이에도 짚을 썰어 쇠죽을 끓이는 큰가마솥이 걸려 있었다. 그것 역시 무쇠로 만든 솥이었다. 그러했던 무쇠솥의 내구성은 어지간하였다. 여러 대를 써내려 왔건만, 오늘 내 농막 양은솥 같은 불상사는 생겨나지 않았다.

    사실 마구잡이식으로 과거회귀 내지 퇴행(退行)을 해서는 아니 되겠지만,부뚜막에 가마솥이 걸렸던 그 시절이 마냥 그립다. 아마도 그것이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우리네 추억 한 자락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가마솥에 대한 추억거리는 꽤나 많다. 손잡이가 달린 솥뚜껑은 본디 목적 이외에도 다양하게 쓰였다. 단벌 내의 등을 걸쳐 속히 말리는 데는 그저 그만이었다. 그 가마솥 뚜껑 가운데서도 집집이 따로 간수하는 뚜껑이 있었다. 그것은 대형 프라이팬 내지 대형 번철(燔鐵)이었다. 애경사가 있던 날, 부인들은 한데에다 그 솥뚜껑을 뒤집어 걸고, 장작불을 우겨넣으며 둘러 앉아 진종일 지짐을 붙였다. 또, 그 솥뚜껑을 뒤집지 않고 바로 건 다음, 그 위에다 돼지삼겹살을 굽기도 하였다. 사실 요즘도 그러한 향수가 남아, 음식점에 가면, 우리는 종종 ‘솥뚜껑 구이’ 를 즐기기도 한다. 이처럼 솥뚜껑의 몫이 그저 솥을 덮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큰일을 치르는 날이 되면, 그 많은 하객(賀客)들이나 문상객들이 먹을 밥을 지어야 했기에, 솥의 윗부분의 밥은 쉬이 뜸들 턱이 없었다. 그러면 아낙네들은 아궁이의 잉걸불을 부삽으로 퍼서 솥뚜껑 위에 잔뜩 얹기까지 하였다. 만약에 오늘 내가 해먹은(?) 양은솥의 뚜껑이었다면, 그런 것들이 가능했겠는가. 한편, 부뚜막에 걸쳐진 솥전도 몫을 톡톡히 하였다. 솥전은 ‘솥귀’나 ‘솥발’과 더불어 무거운 무쇠솥이 부뚜막에서 주저앉는 걸 막아주는 게 본디 몫이다. 거기다가 부수적인 몫까지를 하였다. 단벌 양말을 말리는 데 그저 그만이었다. 또, 솥과 솥뚜껑 사이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받아내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떨어진 눈물은 부뚜막으로 지저분하게 흘러내리지 않도록 이내 말려주는 역할을 하였다. 정말로 그것을 ‘눈물’이라고 하였으며, 부인들은 그 눈물을 통해 밥이나 국이 어느 정도 되어 가는지 짐작하곤 하였다. 솥전에다 간장 종지나 소금을 올려놓고, 그것들을 따끈따끈 덥혀 삼킴으로써 편두선염을 치료했던 기억.

    살아생전 내 어머니는 부엌의 가마솥을 색달리 쓴 예가 있다. 바로 시루떡을 찌는 찜통으로도 썼다는 거 아닌가. 당신은 그 큰 밥솥에다 물을 가득 채운 후, 그 위에다 옹기로 된 시루를 올려놓았다. 그러면 제법 아귀가 맞아 틈새가 거의 없었다. 그러함에도 당신은 ‘헛김 샌다’고 하면서, 가마솥과 옹기 사이의 틈새를 밀가루반죽으로 발랐다. 그것이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몰딩’이었다. 그러고는 당신은 삼베보를 시루바닥에 깐 다음, 쌀가루와 팥고물과 콩고물 등을 켜켜이 시루 안에다 채웠다. 그렇게 시루떡을 찌는 과정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조무래기였던 우리가 시루떡을 찌는 날만큼은 아무리 조바심이 일어도 부엌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하였다. 그러면 부정을 타서 시루떡이 갈라지는 등 그야말로 개차반(개茶盤)이 된다고 하였다. 켜켜이 알록달록하던 무지갯빛 시루떡. 요즘의 양은솥이 아닌 무쇠가마솥만이 부릴 수 있었던 조화 아니었을까?

    나의 신실한 애독자님들께서도 나름마다 가마솥과 관련해서 위와 비슷한 추억이 여러 자락 있을 줄로 안다. 해서, 이번엔 우리네 전통부엌이 사라지고 덩달아 무쇠솥이 사라져 간 사정 등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한마디로, 대가족의 해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본디 ‘한솥밥을 먹는다.’는 말이, 큰가마솥에서 지은 밥을 대식구가 함께 먹은 데서 비롯되었다는데... . 그랬던 것이, 점차 입식(立式) 부엌으로 바뀌고, 그 불편스러웠던(?) 아궁이 대신 전기밥솥 등이 나옴으로써 가마솥은 시나브로 사라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의 건물 양식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온돌이 사라져 간 것과 가마솥의 운명은 떼려야 뗄 수 없다. 전통가옥과 그리도 궁합이 잘 맞았다는 가마솥. 아궁이야말로 온돌과 취사를 동시에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멋진 고안품이었는데... . 석기시대에는 돌솥을 썼고, 토기시대엔 토기솥을 썼으나, 주철 곧 무쇠의 주조술(鑄造術)을 터득하고부터는 그 장구한 세월 동안 우리네 부엌에서 주인공처럼 대접받았던 가마솥. 전기밥솥이나 양은솥이나 냄비 등이 감히 따를 수 없는 특장점이 있었다. 그 높은 화력에도 웬만해서는 깨어지는 법이 없어, 내구성이 뛰어났다. 무쇠는 여느 철보다 탄소함량이 많은데다가 두꺼운 무쇠솥으로 만들어졌기에 열전도율이 전기밥솥,양은솥,냄비 등에 비해 현저히 낮다. 바꾸어 말하자면, 뜨거워지는 데 오래 걸리지만, 일단 달구어지면 오랫동안 그 열을 머금고 있게 된다. 그것이 밥이나 국이나 찌개 등을 속속들이 익혀주게 된다. 그리고 밥 등을 비교적 오랫동안 식지 않게 해준다. 가마솥에서 지은 밥이 언제고 구수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 무엇보다도 가마솥의 그 너른 바닥에 눌러 붙었던 누룽지의 고소한 맛을 나는 종종 그리워한다. 마른 누룽지 자체도 좋았지만, ‘우두둑우두둑’ 쇠주걱으로 긁은 물누룽지의 맛도 나는 잊지 못한다. 또 숭늉은 어떠했고?

    무쇠가마솥, 어느새 아련한 옛 추억으로 자꾸만 밀려가는 솥인 것 같다. 차츰 핵가족화 되면서, 온 가족과 함께 어울려 두레상 앞에서 밥을 먹을 기회조차 드물어진 우리들. 숫제, 나도 거의 혼자서 전기밥솥의 밥을 퍼서 먹는다. 과연 이렇게 사는 것이 더 편리해지고 더 나아진 삶일까 하고서 잠시 생각해보는 밤이다. 사실 가마솥도 여러 모양이었다. ‘부(釜)’는 큰 가마솥이며, 밑은 둥글되 옆은 편편한 것을 일컫고 나무로 만든 뚜껑을 썼다. ‘정(鼎)’은 대·중·소의 세 가지 크기의 것이 있으며, 옆을 중심으로 하여 가장 넓고 솥 밑과 뚜껑이 거의 같은 모양으로 둥글다. ‘노구(鑪口)’는 놋쇠나 구리쇠로 만든 솥으로 자유로이 걸었다 떼었다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참말로 바삐 살아가는 우리들. ‘빨리빨리 문화’에서 쉽사리 헤어날 수는 없겠으나, 그래도 무쇠솥처럼 열기에 민감하지 않고 진득함을 애써 갖추어 보아야 하지 않겠나.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 후다닥 요리를 해 먹는 냄비가 과연 편리한 그릇일까도 생각해보는 밤이다. 그러한 요리를 자주 먹게 되어서일까, 우리는 내남없이 냄비근성조차 가진 게 사실 아닌가.

    이번만은 내 농막 아궁이에 바꾸어 걸기 위해, 중고 무쇠솥을 구해야겠다고 벼르며 이 글 접기로 한다.

    “아가리의 지름이 두 뼘 크기가 되는 중고 무쇠솥 가지신 분 어디 없어요?”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한국디지털도서관 본인의 서재,

    한국디지털도서관 윤근택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본인의 카페, 이슬아지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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