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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 수필가,' 간양록'을 듣다
    수필/신작 2014. 12. 21. 09:44

     

    윤 수필가, ‘간양록(看羊錄)’을 듣다      

    윤요셉(수필가/수필평론가)

     

    이 글을 적기에 앞서 미리 고백하건대, 나는 게으름쟁이이며 교양이 무척 부족한 사람이다. 아는 게 별로 없다는 뜻이다. 그나마 내가 수필작가 형세를, 독자님들의 눈과 귀를 교묘히 속여가면서까지 꾸준히 이어갈 수 있는 동력(動力)은, 인터넷 매체에서 얻게 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네이버 박사(?)와 다음 박사(?)한테 각종 궁금한 사항을 그때그때 물음으로써 내 조각지식을 땜질해나간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문득, 민요풍의 가요가 듣고 싶었다. 특히, 매우 느린 박자 즉 ‘느린 모리’의 노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인터넷 검색창에다 ‘민요풍의 가요’라고 쳤더니, 조용필의 ‘간양록’이 딱 걸려나왔다. 라이브로 흘러나오는 노래. 거듭거듭 그 노래를 들으며 그 노래에 얽혀진 수많은 이야기를 곁들여 읽게 되었다.

    1980년 MBC에서 방영한 사극(史劇)의 주제곡이었다고 한다. 작시 (作詩)는 사극의 대가인 신봉승 선생께서 맡았고, 조용필 가수가 거기다가 곡을 붙이고 자신이 불렀다는데... . 사실 신봉승 선생은 이 노래의 노랫말 말고도 온 국민한테 사모(思母)의 눈물을 자아내게 한 ‘모정의 세월’도 작시한 바 있다. 한세일 가수가 열창한, ‘동지섣달 긴긴 밤이 짧기만 한 것은 근심으로 지새우는 어머님 마음’으로 시작하는 그 노래. 그건 또 그렇다 치고, ‘간양록’ 노랫말을 여기 옮겨본다.

    ‘ 이국 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 서리고/ 어버이 한숨 쉬는 새벽달일세./ 마음은 바람 따라 고향 가는데/ 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으리./피눈물로 한 줄 한 줄 간양록을 적으니/ 임 그린 뜻 바다 되어 하늘에 닿을세라.// ‘

    인터넷을 통해 자료를 차츰차츰 파고 들다니까, 위 시는 ‘이엽(李曄)’이란 분으로부터 출발했다. 진짜 나의 이 글 주인공인 분이지만,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잡혀가 포로상태였던 강항(姜沆,1567명종22~1618~ ~1618광해군 10). 그분은 전라 좌병영 우후(虞侯)로 싸우다가 일본으로 자신처럼 끌려온 이엽이 탈출하다가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동시에, 이엽이 썼다는 시를 전해 듣는다. 그 한 구절은 이렇게 되어 있었다.

    ‘ 어버이는 밤 지팡이를 잃고 새벽달에 울부짖으며... 지켜오던 조상 묘지에는 풀 반드시 거칠었으리!’

    강항은 조선으로 귀환 후 자신이 적은 <<看羊錄>>에다 그 시를 소개한다. <<看羊錄>>의 본디 이름은 <<巾車錄(건거록>>. 이에 관해서도 뒤에 따로 상세하게 소개하겠다. 어쨌든, 신봉승 선생은 강항이 적은 책 내용을 토대로, 위와 같이 아름답고도 슬픈 시를 적었으며, ‘작은 거인’으로 일컬어지는 명가수 조용필은 또 그 시에다 곡을 붙여 구성지게 노래 불렀다. 지금 한국의 현대수필작가 윤근택은 그런 과정을 거친 민요풍의 가요, ‘간양록’을 거듭거듭 듣고 있다. 그러면서 이처럼 작의(作意)를 강하게 느끼게 되었으니... .

    지금부터는 이 글의 진짜 주인공인 강항의 이야기다. 그분은 593년(선조 26년) 26세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부처를 거쳐 좌랑(佐郞)으로 지냈다. 정유년(1597년)에 휴가를 얻어 고향에 잠시 내려갔다가 정유재란(丁酉再亂)을 맡게 되어 분호조판서(分戶曹判書) 종사관(從事官)으로 지내게 되었고, 남원에서 패하자 영광에 이르러 의병을 소집하였으나, 왜병이 그 지방으로 육박해 온다는 소문에 그만 오합지졸이 되고 만다. 그분은 가족 일행과 함께 배를 타고 탈출하여 이순신한테 합류하려다가 왜선(倭船)에 붙잡혀 일본으로 압송된다. 그분은 3년여 포로생활을 하다가 1600년(선조 33년)에 석방되어 귀국하게 된다. 그분은 포로 당시 왜국의 형세, 군사동향 등을 비교적 소상히 적어 인편에 조정으로 보내니 선조가 만족해하였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그 귀중한 정보 등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고 권력다툼에만 눈이 어두워 있었다. 그분은 귀국 후 스스로 죄인이라 하며 관직 등을 일제히 버리고 낙향하여 흙에 파묻혀 후학들만 가르쳤다. 한편, 그분은 자신의 3년여 억류생활 가운데 보고 느낀 점 등을 소상히 적었다. 적지(賊地)에서 임금께 올린 글 <<賊中封疎(적중봉소)>>,귀국 후 조정에 올린 계사 <<詣承政院啓辭(예승정원계사)>>,일본 관직·지도·장수들 인적사항 등이 적힌 <<賊中見聞錄(적중견문록)>>, 귀환할 당시 남아있는 포로들에게 준 격문<<告俘人檄(고부인격)>>, 그리고 적중에서 포로생활의 자초지종을 적은 <<涉亂事迹(섭란사적)>> 등의 기록문을 적었다. 이와 같은 기록문을 두고, ‘실기문학(實記文學)’이라고 한다. 그분은 위와 같은 내용의 글들을 한 권으로 묶어 <<巾車錄(건거록)>>이라고 명명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巾車’는 죄인을 태우는 수레인데, 적군에 사로잡혀 끌려가 생명을 구차스럽게(?) 부지한 자신을 죄인이라고 자처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그분이 세상을 뜬 후 1654년에 그분의 제자들이 책을 내면서 스승을 ‘소무(蘇武)’에 견주어 <<看羊錄>>으로 바꾸었다. 실제로, 강항이 그 책에 수록된 시 가운데는 자신을 ‘소무’의 처지에 빗대는 대목이 몇 곳에 나온다. 소무는 중국 한나라 무제 때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어 흉노족의 회유를 거부하고 양을 치는 노역을 하다가 19년 만에 귀국한 이다. ‘看羊’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양을 돌보다’가 된다. 소무의 충절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게을러터진 수필작가가 ‘다이제스트’ 로 뽑아, 졸속으로 읽은 강항의 글 가운데 몇 가지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8일 동안 먹지 않았으나 오히려 숨이 붙어 있음이 한스럽다. 그러나 죽지 않은 것은 장차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니, 의미 없이 죽는 것은 부끄러움을 씻는 것이 되지 못한다. 예양(豫讓)은 비수를 갖고 다리 아래 엎드려 조맹(趙孟)에 대해 원수를 갚기로 기약했고, 철퇴를 들고 모래밭에 나타나서 장량(張良)의 분을 씻기로 맹세했다.’

     

    ‘좋은 때와 명절일수록 더욱 마음이 슬펐다. 임금과 어버이를 바라보면 모두 만 리의 큰 바다 밖에 있다. 바야흐로 화창한 봄을 맞이하여 초목과 모든 생물이 다 스스로의 즐거움이 있는데, 우리 형제는 눈물이 가득 찬 눈으로 서로 마주하고 있을 뿐이다.’

     

    註1) ‘봄비가 한 번 지나고 나면

    돌아갈 생각 배나 많아진다오.

    어느 때나 우리 집 담장 밑에

    손수 심은 꽃 다시 볼거나‘

     

     

    註2) ‘금장(錦帳)의 명부(名部)가 일본에 떨어지니

    머나 먼 천 리길 바람편에 맡겼다오.

    대궐의 소식은 큰 파도 넘어 아득한데

    학발(鶴髮)의 모습은 꿈 속 희미하도다.

    두 눈은 일월 보기 부끄러운데

    일편단심 옛 조정만 기억되누나.

    강남이라 방초(芳草)시절 뭇 꾀꼬리 요란한데

    우공(寓公)을 돌려보낼 빠른 배 있을는지.‘

     

    사실 그분의 기록문학인 <<간양록>>에 관해서는 많은 학자들의 연구논문 등이 이미 많이 나와 있는 실정이다. 그 책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대단하다. 나의 신실한 독자님들께서도 마음만 먹으면, 많은 자료를 통해 그 책에 관한 사항 등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해서, 더 이상 내가 어줍잖게 분탕질(粉湯질)할 이유가 없다. 대신, 나는 그분을 통해, 그분의 책을 통해, 그리고 그 많은 사극(史劇)을 통해 뼈아픈 교훈 하나를 얻는다. 요컨대, 불행히도 역사는 반복된다는 사실. 그분이 그 책을 통해 보여주는 우국충정(憂國衷情)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행정고사 내지 사법고시에 해당하는 문과(文科)에 당당히 합격해서 정부부처에 있었던 분. 그분은 나라와 백성을 자신보다 먼저 생각했던 게 분명하다. 국록(國祿)을 받는 이로서 무한한 책임감을 가졌던 분 아니냐고? 어쨌든, 그분은 무기력하든 말든 왕실을 도와 나라를 온전히 지켜야 했으며 백성들을 적으로부터 보호하는 등 편히 살 수 있게 했어야 했다고 자탄했음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자신을 죄인이라고 여기며 홀연히 낙향했던 게 아니냐고? 그분은 마치 속죄의 의식을 치르기라도 하듯, 3년여 포로생활에서 얻은 각종 적국의 동태를 빠짐없이 적어서 조정 등에다 전했다는 거. 더 이상 비극적인 사태가 발생치 않았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그렇게 담은 것인데... . 막상 당시에도 나랏일을 맡은 이들은 백성의 안전과 행복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오로지 사리사욕과 붕당(朋黨)의 이익에만 몰두하였으니! 그런 연유로 그분이 세상을 뜬 이후에는 더 비극적인 사태가 발생하고 만다. 그분을 3년여 포로로 잡아가 억류했던 그 도적나라가 이번엔 아예 36년간이나 식민지화하고 말았지 않은가.

    끝으로, 이 게을러터지고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안녕만을 생각해온 윤 아무개 수필가는 두 손 모아 기도하며 글을 접는다.

    “하느님, 제발 우리네 후손들이 더 이상은 불행한 사극(史劇)을 보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더 이상은 ‘간양록’처럼 애절한 노래를 듣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註)

    1) 春雨一番過 / 歸心一倍多 / 何時短墻下 / 重見手栽花

    2) 錦帳名部落海東 / 絶程千里信便風 / 鳳城消息鯨濤外 / 鶴髮 儀形蝶夢中 / 兩眼却慙同日月 / 一心猶記舊鴛鴻 / 江南芳草 群鶯亂 / 徜有飛艎返寓公.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한국디지털도서관 본인의 서재,

    한국디지털도서관 윤근택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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