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면도를 하며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턱수염이 많고 짙은 편이다. 자고나면 턱에 숫제 구두솔이 하나 붙어 있는 듯하다. 쓰다듬으면 밤송이같이 까칠하기도 하다. 그리고 귀밑머리 아래 양 볼에도 구렛나루가 더부룩하다. 산적(山賊)은 한참 놀다가 오라고 할만치. 나는 세안(洗顔)을 하기에 앞서 면도를 하게 된다. 비누를 양손으로 비벼 거품을 낸 다음, 그 거품을 턱이며 볼이며 이마며 온 데 골고루 바른다. 그리고는 거울 앞에서 외날짜리가 아닌 세날짜리 또는 다섯날짜리 면도기로 말끔하게 수염을 밀어낸다. 사실 우리네는 머리만 감아도 남들한테 한 인물 돋보이게 한다. 세안만 하여도 그리 된다. 면도를 하게 되면 더더욱 한 인물 돋보이게 한다. 면도를 하고 세안을 하고 나면, 기분도 그리 상쾌할 수가 없다. 그렇게 해서 늘 하루를 열어 가는데, 일상이라는 게 그래서 종교만치나 숭엄하다. 면도질은 그 어떤 기도(祈禱) 못지않은 간절한 의식(儀式)일 터. 천주교인인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게 주님께 불경(不敬)을 저지르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러니 나는 거의 하루도 면도를 거를 수가 없다.
경험상 알게 된 사항이지만, 수염도 여느 식물체와 마찬가지로, 베기를 거듭할수록 차츰 굵어져 뻣뻣해진다. 내 신실한 애독자들께서는, 특히 여성 애독자들께서는 이러한 점을 통해서도 일부 작물 재배 때에는 거듭거듭 원줄기를 베 줌으로써 수고생장(樹高生長)보다는 비대생장(肥大生長)을 꾀할 수 있으리란 것을 유추해 내실 것이다. 하여간, 남자들은 소년기에 맨 처음 면도를 시작하고부터는 차츰 터럭이 굵어지는 탓에 면도기를 놓을 수 없으되, 나이가 들어갈수록 외날도 아닌 여러날짜리 면도기를 사용해야만 한다. 그런데 나의 턱수염도 어느새 반백(半白)의 머리카락을 닮아, 세월에 겨운지 반백이 되었다는 거 아닌가. 어찌 생각해 보면, 곱게 길게 기르기만 한다면, 사극(史劇) 속 대감들처럼 위엄이나 위세를 보일 것도 같은데... .
누가 나더러 수필작가가 아니랄까봐서, 아주 일상적인 것에서나 아주 사세(些細)한 사물에서조차 새로운 깨달음 등을 얻곤 하는데, 오늘 아침 면도를 하다가도 예외 없이 생각의 꼬투리를 낚아챘으니... . 터럭 하나하나는 까칠하기만 한데, 그것들이 그룹을 이룰 적에는 부드럽게 되기도 하고, 놀랍게도 새로운 일도 하게 된다는 것을. ‘너무도 당연한 걸 너무도 태연하게 말하는’ 것 같지만, 이는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바늘 같고 송곳 같은 터럭들의 집합체는, 구둣솔· 붓· 풀솔· 쇠솔·칫솔 등일 텐데, 그것들은 참말로 훌륭한 일을 수행한다. 구둣솔의 경우, 제법 뻣뻣한 털을 지닌 어떤 짐승의 털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한 짐승의 털은 또 다른 털 가진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구두나 가방의 겉을 반질반질하게 닦아주지 않느냐고? 그 짐승의 가죽도 더러는 털을 그대로 눕혀 누른 후 가공한 것일 텐데... . 구둣솔 등 위에 열거한 물건들의 공통점은, 마치 젊은 날의 혈기인양 까칠하던 터럭 낱낱의 집합이라는 거, 그것들이 그룹을 이뤄 마치 사회구성원인양 그 틀에 빼곡히 박혀 있다는 거. 그러한 숱들이 갖춰야 할 기본은, 그 키도 균제(均齊)로워야 하며, 그 굵기도 일정해야 함을 알겠다. 칫솔의 경우, 어느 한 숱이라도 그 기본 틀에서 벗어나 뻐드러지거나 돌출행동(?)을 하거나 하면, 잇몸을 다치게 하거나 치아 연마에 지장을 주어, 결국은 칫솔 통째로 버려진다는 것을. 그렇다고 하여, 나는 지금 이탈리아 독재자 ‘무솔리니’가 최초 표방했다는 전체주의(全體主義;totalitarianism)를 신봉하는 것은 아니다. 즉, 나는 ‘ 국가나 집단의 전체를 개인보다도 우위에 두고, 개인은 전체의 존립과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사상’을 결코 지니지 않았다는 뜻이다. 대신, 나는 물리학에서 말하는 ‘힘의 분산’과 ‘힘의 합력’이 터럭들의 집합체인 구두솔이나 칫솔 등에서도 너무도 잘 나타남을 알게 된다. ‘힘의 합력’은 내 턱수염을 효율적으로 깎아주는 여러날짜리 면도기의 날에도 예외 없이 나타난다는 거. 실은, ‘힘의 분산’의 위력을 가장 몸으로 잘 보여주는 이들은 마술사들이었다. 그들은 거꾸로 무수히 박힌 송곳 판에 기합을 넣은 후 맨발로 올라서곤 하였다. 발바닥이 아예 포장마차에서 파는 꼬치꼴이 되거나, 통돼지 바비큐 꼴이 되어야 옳거늘, 그들은 뒷탈 없이 사뿐히 그 송곳 판에서 내려오곤 하였다. 지금에야 생각해보니, 마술사들이 그렇게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송곳들이 키와 굵기가 균일했던 덕분이다. 가령, 난좌(卵座)에 고만고만한 달걀들을 빼곡 채우고 그 달걀 위에다 면(面)이 고른 널빤지를 올려놓고서 또 그 널빤지에 무거운 짐을 올릴지라도 달걀은 부서지지 않을 것이다. 이 또한 ‘힘의 분산’으로 말미암은 결과. ‘힘의 합력’은 ‘힘의 분산’ 반대개념이다. 낱낱 또는 숱이 발휘할 수 있는 힘은 극히 미약하나, 그것들의 합력은 생각밖에 크다는 것을. 잘은 모르겠으나, 그것들의 합력은 요즘 일상용어가 되다시피한 ‘시너지’보다 우위에 놓일 것만 같다. 이처럼 합력의 위력을 안 이상, 앞으로는 더 이상 나 혼자만의 힘만 믿고 독불장군처럼 행동하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짐도 해본다. 하지만, 내가 넓게 많이 벌여놓은 농사일만은 줄일 생각이 없다.
내 신실한 애독자들이시여! 나는 이제 당신들께 덤으로 드릴 게 퍼뜩 떠올랐다. 바로 터럭의 집합체인 칫솔에 관한 사항이다. 제품을 만드는 회사마다 그 기능성을 강조하며 이런저런 모양의 칫솔을 생산하여 소비자들인 우리한테 광고해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오랜 기간 새로운 칫솔이라며 모양만 바꾼 채 출시하는 칫솔의 기본은, 아쉽게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거. 달리 말해, ‘(시골에) 별 반찬 없다.’식이더라는 거. 칫솔에는 숱이 촘촘 박혀 있고 손잡이의 모양만이 약간씩 다를 뿐. 그들은 인체 공학적으로 설계했다고들 하지만... . 이제 감히 내 신실한 애독자들께 권하노니, 하나의 칫솔로만 ‘333(하루에 세 번,3분 동안,식사 후 3분내)’하지 마시라고. 대신, ‘333’을 실천하기는 하되, 거기에다 더해 적어도 세 개의 칫솔은 따로따로 갖추어 ‘하루에 각기 다른 칫솔로 세 번’을 실천할 것을 권한다. 이 무슨 말이냐고? 당신들이 몰고 다니는 승용차의 바퀴가 ‘휠 얼라이먼트(wheel alignment ; 바퀴 정렬)’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편마(偏摩)가 심했던 기억 떠올려 보시라. 그리고 당신은 가끔씩 사포(砂布)를 사용하되, 용도에 따라 그 베에 박힌 모래알갱이들의 크기가 각각 다른 규격의 것을 번갈아 골라 쓰지 않느냐고? 어디 전문가가 따로 있나? 다만, 우리네는 오랜 경험을 응용해서 새로운 지혜를 퍼올릴 따름. 그러니 양치질을 자주 하되, 가급적이면 그때그때마다 제각각 다른 칫솔을 집어들 것을 진실로 권한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하고 있다.
내 신실한 애독자들이시여! 기왕에 보따리 풀었으니, 나는 보너스를 하나 더 드리려고 한다. 이 내용은 첫 수필집 <<독도로 가는 길>>에도 이미 실은 바 있긴 하지만, 재탕(?)으로 적게 됨을 이해해주시기 바라며... . 굳이 근검(勤儉)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는 일회용 면도기를 산 후, 한두 번 쓰고 버린 일이 거의 없다. 그런 연유로 나의 세면 용기 안에는 여남은 개의 일회용 면도기가 늘 들어있다. 나는 새벽마다 그 면도기통에서 맨 처음 한 개를 골라잡는다. 그렇게 골라잡은 면도기로 턱수염을 깎기 시작한다. 날이 닳아 면도가 시원시원 되지 않는다고 여겨지면, 제2,제3,제4로 바꾸어서 면도를 하다가 보면 끝내는 말끔하게 면도가 이뤄지더라는 사실. 제법 제1의 면도기로부터 시작된 면도. 더러는 따갑기는 하였으되, 면도가 어느 정도 진척되더라는 점은 실로 의미롭다. ‘걷는 만큼 목적지는 가까워진다.’고나 할까, 아니면 미국 개척시대의 정신을 대변하다시피한 ‘로버트 리 프로스트’의 ‘가지않은 길’이란 시 구절 같다고나 할까, 그런 것이다. 더불어, ‘요 게 나을까, 조 게 나을까?‘ 마치 제비를 뽑는 듯한 설레임을 그 이른 새벽 세면장에서부터 갖게 되더라는 거. 이것이야말로 공허한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하는, 나의 생활지혜임을 전한다.
끝으로, ‘매일 하는 면도, 오늘 하루 아니 한들... .’보다는 ‘매일 하는 면도, 오늘 하루 더 한들... .’이 바람직하다는 걸 전하면서 이 글 줄이려 한다.
창작후기)
이번 글을 쓰는 내내 아래 뉴 에이지 음악이 거듭거듭 흘렀다. 매번 나는 신작을 지을 때마다 각기 다른 음악을 이처럼 내내 흘려놓곤 한다.
* 이 글은 한국디지털도서관 본인의 서재,
한국디지털도서관 윤근택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본인의 카페, 이슬아지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수필 > 신작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레르기에 관해 (0) 2015.07.31 윤 수필가, 자급자족을 하다 (0) 2015.07.29 꼬리등[尾燈]에 관해 (0) 2015.07.25 '불치기'에 관한 회상 (0) 2015.07.24 잡초를 뽑으며 (0) 2015.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