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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 수필가가 쓰는 미술 이야기(19)수필/미술 이야기 2015. 11. 4. 20:09
농부 수필가가 쓰는 미술 이야기(19)
‐ 도시의 벽에다 낙서를 해대던 화가-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요컨대, 어린아이들이 벽에다, 그것도 공공의 벽에다 개발새발 낙서를 하게 되면 어른들한테 혼난다. 그러한데 20대 사내가 자기랑 짝을 이룬 또래의 사내와 함께 도심의 벽이란 벽은 다 찾아다니며 환칠을 마구 해댔다. 아무리 보아도 어린애가 그린 그림 수준밖에 되지 않는 그림. 그것이 ‘낙서화(落書畵)’ 또는 ‘아동화(兒童畵)’란 이름을 얻어 광풍(狂風)을 일으킨 적 있으니... .
나는, 미술에 관한 한 문외한인 나는, 미국이란 나라를 늘 이상한 나라쯤으로 여긴다. 나라가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문화적 후진국에 지나지 않는 그 나라. 그러나 거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해서, 쉽게 말해 돈을 마구 뿌려대며 예술작품 같지 않은 예술작품을 최고(最高)의 예술품인양 포장하여 둔갑시키는 일이 잦았음을, 이 시리즈물을 통해 몇 차례 밝힌 바 있다. 어느 개그맨이 한 때 자주 쓰던 멘트, ‘왜? 쩐이 있으니까... .’가 딱 어울린다. 그리하여 대표적으로 대성한 미술가는 ‘앤디 워홀(Andy Warhol, 미국,1928~1987)’이다. 세상은 그를 두고 ‘팝 아트(pop- art)의 거장‘이라고 한다. 그는 부와 명성을 함께 거머쥔 사내였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이 시리즈물 제 10화에 상세히 적어 두었으니, 한번 살펴보시길 바라며... . 그의 살아생전 어록(語錄) 가운데에는 ‘일단 유명해지라. 그러면 사람들은 당신이 똥을 싸도 박수를 쳐 줄 것이다.’도 있음을 다시 이 글에서 밝히기로 한다. 이 말도 미국이라는 거대 자본시장을 생각게 한다.
이 글 주인공은 바로 그러했던 앤디 워홀을 만나 일약 스타가 된 화가다. 이 글 주인공은 공원이나 길거리에 노숙하며 끼니거리를 장만코자 ‘그림엽서’를 그려 행인 등에게 강매를 하고 있었다. 1980년 어느 날, 나이 20세에 불과했던 이 글 주인공은 그 유명한 ‘앤디 워홀’이 어느 음식점에 들어가는 걸 보게 된다. 그는 자기가 길가에서 손수 그려 팔던 그림엽서를 들고 뒤따라 들어가게 된다. 그러고는 그 명성 자자한 앤디 워홀한테 그 그림엽서를 강매하게 된다. 앤디 워홀은 그가 그린 그림엽서를 보고, 금세 그림 재능을 알아보게 되었고, 함께 작업하자고 곧 동업하자고 제의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 글 주인공은 공동작업장을 갖게 되고,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이 즈음에서 이 글 주인공을 밝혀야겠다. 그가 바로 ‘장 미쉘 바스키아 (Jean Michel Basquiat,1960~1988, 미국)’다. 그를 두고, ‘검은 피카소’라고 부른다. 그가 흑인이되, 추상화를 그렸던 화가임을 나의 신실한 애독자들께서도 미루어 짐작하실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가 가난한 이주민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알고 있지만, 실상은 중산층 자녀로 태어났다고 한다. 그랬던 그가 13세 되던 해 어머니가 정신병을 앓다가 죽게 되자, 슬픔에 빠져 방황하게 되고, 학업도 팽개친 채 맨하탄에서 노숙자로 변하고 만다. 그는 길거리에서 직접 그림엽서를 만들어 파는가 하면 T셔츠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게 된다.
1976년 그가 17세가 되던 해, ‘알 디아즈’라는 친구를 만나 그와 함께 도심의 벽에다 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들은 ‘세이모(Samo)’라는 가공(架空)의 이름으로 그렇게 하였다. 이때 바스키아를 대표하는 <<왕관>>이란 작품이 탄생한다. 그 <<왕관>>이란 그림도 실은 어린아이가 그린 듯 단순하고 어설플(?) 따름이다. 그러던 어느날 ‘Unique’ 잡지의 창업자인 ‘하비 러색(Harvey Russack)’이란 이가 바스키아의 벽화(낙서)에 홀딱 반해, 자기네 잡지에 그의 그림을 실어주면서부터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된다.
바스키아가 요즘 흔히 하는 말로 ‘뜨게’ 된 것은 위에서 이미 밝혔듯,거장 ‘앤디 워홀’과 그러한 운명적 만남을 통해서다. 우리는 그러한 걸 두고,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고 한다. 앤디 워홀의 물심양면 도움으로 바스키아는 돈, 명예, 작업환경 등 최상을 누리게 된다. 한마디로, 팔자가 확 풀린 예술가가 되었다. 가는 곳마다 그의 작품이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으며,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전시회도 갖게 된다. 미술계는 그의 작품을 두고, ‘신표현주의’니 ‘원시주의의 거장’이니 요란법석을 떨기까지 하였다.
그러했던 바스키아. 너무도 젊은 나이에 그처럼 고공(高空)에 올랐기에 신(神)의 미움을 샀을까? 그에게 불행한 일이 생겨났다. 친구이자 동업자(?)였던 ‘앤디 워홀’한테 변고가 생긴 것이다. 1987년 2월 22일, 앤디 워홀이 쓸개 수술을 받다가 갑짝스레 사망하게 되자, 바스키아는 큰 충격에 빠져들게 된다. 그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절망감에 사로잡혀 방황하게 되고, 이때부터 1년 반가량을 마약인 헤로인과 술에 절여 지내게 된다. 그러다가 1988년 8월 12일 스피드볼(speed-ball)이란 신종 마약 과다복용으로 27세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다. 자신의 죽음을 마치 예감이라도 하듯 그는 <<추락하는 천사>>와 <<죽음을 타고(Riding with Death>>란 그림도 남겼다.
미술에 관한 한 문외한인 내가 바스키아의 작품세계에 관해 더 적을 수도 없다. 내 신실한 애독자들께서 그의 많은 작품들을 감상코자 하신다면, 인터넷을 통하면 쉽게 닿을 수 있을 터. 다만, 나는 이 글을 통해 내 신실한 애독자들께 새삼 강조코자 하는 게 있다. 미국이라는 신생국 내지 문화후진국은 거대자본으로 뒤늦게 문화마저도 세계를 지배하려 든다는 사실을 결코 지나칠 수 없다. 실제로, 세계 여러 나라의 우수한 예술가들도 그러한 좋은 환경을 좇아 미국 시민권을 얻어 모여드는 것도 사실일 터. 그러한 점에서 무척이나 그 토양이 부럽다. 살아생전 명성과 부(富)를 한껏 거머쥐었던 앤디 워홀의 말이 다시 떠오른다. ‘일단 유명해지라. 그러면 사람들은 당신이 똥을 싸도 박수를 쳐 줄 것이다.’라던 그 말. 그 말이 ‘억울하면 출세를 하라.’로 들릴 게 뭐람? 사람과 때를 잘 만나야 출세를 함을 잠시 생각해 본다. 다소 논리의 비약이긴 하지만, 어느 돈 많은 이가 자신이 적은 책을 자신의 돈으로 몽땅 사버리게 되면 졸지에 베스트셀러가 된다. 내가 아는 바 그러한 예는 우리 사회에도 많았다. 또, 비평가를 돈으로 매수하여(?) 자기의 작품에 관해 훌륭하게 적어달라고 한다면... .
이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이야기’ 14화의 마지막 단락을 다시 아래와 같이 갖다 붙이는 걸로 이 글을 매듭짓기로 한다.
<하여간, 나는 괴짜 같은 미술작가들을 여럿 보아 왔다. 또다시 고(故) 백남준 선생의 살아생전 말을 떠올릴밖에.
“ Art is just fraud(예술은 사기다). 그 누구도 하지 않았던 것을 그냥 하기만 하면 된다.”
스스로 수필작가라고 내세우는 이들, 당신들은 이 점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스스로 문학평론가라고 내세우는 이들, 당신들은 이 점을 또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마디로, “모두들 X 까고 나자빠졌네!”다.>
(다음 호 계속)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한국디지털도서관 본인의 서재,
한국디지털도서관 윤근택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본인의 카페 이슬아지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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