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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분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어젯밤 제법 늦은 시간이었다. 수원에 사는 생질(甥姪)한테 안부전화를 참말로 오래간만에 걸었더니, 그 늦은 시간임에도 회의 중이라며 자기가 다시 전화하겠다고 하였다. 한참 후 그의 전화를 받았다. 나는 그가 늘 대견하다고 여기며 지내왔기에 인사치레를 또 하게 되었다.
“내가 무척 아끼는 목사님(성령이 충만한 걸 두고 내가 붙인 애칭이다.)! 자네는 학사 출신이면서도 박사들과 어울려 연구팀에서 일하고, 해외출장도 잦아 이젠 자주 연락도 할 수 없으니… .”
저쪽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제가 무척 존경하는 외삼촌! 요즘도 글 많이 쓰고 계시겠죠? 죄송해요. 요즘은 바빠서 인터넷에서 외삼촌 글을 찾아 읽어볼 겨를도 없어요.”
그렇게 시작된 통화는 제법 길어졌다. 그 통화 내용 가운데는 전주의 ‘김학(金鶴) 선생님’이란 분이 70 노인임에도 나의 글을 매일매일 당신의 개인 블로그와 당신네 문학회 블로그에다 꼬박꼬박 올리고 계신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생질은 그 이야기를 듣더니, 그분 김학 선생님이 ‘인텔리’이신 것 같다고 존경심까지 표했다. 즉, 그 연세에도 컴퓨터를 자유자재 운용하고 계시며 그처럼 열정적이시라는 것이다. 특히나 그는 세계적인 전자회사에 근무하는 터라, 컴퓨터며 휴대전화며 전자장비 운용에 능한 분을 더욱 존경할 터.
사실 내가 그 동안 수필작가로서 스스로 외롭다는 생각을 무척 많이 해 왔다. 내가 쓴 글을 읽고, 그에 대한 메아리를 보내 온 이도 거의 없었다고 심술 아닌 심술을 부린 적도 많았다. 그 숱한 문학잡지 등에서도 원고청탁을 가뭄에 콩 나듯 하였다고도 생각해 왔다. 그런데 생질의 말을 듣고, 그분 김학 선생님께 무척 죄송하다는 생각을 이내 하게 되었다.아울러, 그분께 내가 인간 구실을 제대로 못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분의 도움으로 하여 여러분한테서 두루두루 사랑 받는 이가 바로 나라는 사실도 까맣게 모르게 지내왔다. 그분에 관한 이야기는 일단 잠시 미루어두도록 하자. 대신, 나의 살붙이와 피붙이에 관한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내 어머니에 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여러 작품에서 적었다. 그 요약본에 해당하는 작품은, 이미 인터넷상에 발표한 ‘어머니가 가르쳐 준 노래’다. 독자님들께서는 그 작품을 검색하여 읽으시면 수필작가 윤아무개의 어머니가 어떤 분이었는지 대충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 글에서도 중요한 사실을 하나 빠뜨렸다. 말년에 어머니는 양면괘지에다 육필(肉筆)로 편지를 써서, 그 편지를 열 개로 복사하고 코팅까지 해서 지니고 있었다. 그 편지의 사본은 우리 열 남매한테 각각 나누어주고자 했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나는 그 편지사본을 챙기지 못하였다. 어깨너머로 배운 국문(國文)이라, 받침도 더러는 틀리고 소리나는 대로 적은 부분도 많았다. 그러나 노파(老婆)가 문방구에서 복사할 생각은 어떻게 하였으며 또 그것들을 코팅할 생각은 어떻게 하였을까? 그 내용은 당신의 남편인 내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주를 이루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여간 대단한 분이었다. 시대만 잘 탔으면 훌륭한 작가가 되었을 분이다. 하기야 외할머니는 부잣집에서 무남독녀로 자랐으며, 외할머니의 양친은 가정교사를 데려다가 당신네 딸한테 사서삼경 등도 가르쳤다니… . 그러한 환경에서 자란 내 어머니도 예술가 기질이 있었을 것은 뻔하다. 사실 내가 글 나부랭이를 적어대는 것도 어머니의 유전형질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모계 쪽 유전형질은 나로서 끝난 게 아니다. 위에서 소개한 생질은 넷째 누님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군대에 가서 적성검사를 받을 때에 “‘피아노를 쳐본 적 있느냐?’’는 말에 큰소리로 “네!”했단다. 사실은 음악과는 전혀 인연을 맺지 않았던 전자공학도다. 그랬던 이가 3년 동안 군악대에서 ‘클라리넷’만 불고 나왔다. 그런 거 보면 우리네 군대는 젊은이들에게 잠재능력을 발굴하는 일도 한다. 그의 클라리넷 연주솜씨는 아마투어 수준을 능가한다. 뿐더러 오카리나 등 여타 악기도 금세 연주하는 걸 똑똑히 보았다. 내 ‘만돌이농원’에 와서 클라리넷을 연주한 적도 있는데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그의 결혼식은 내가 본 결혼식 가운데 가장 이채로웠다. 그는 신부가 입장할 적에 엘가(Edward Elgar, 1857~1934)의 ‘사랑의 인사’를 연주하여 신부를 맞았다. 이쁜 생질부는 참 좋겠다. 남편이 요즘도 자신과 아이들을 위해 클라리넷도 연주해줄 거라고 상상을 한번 해보는 것이다. 사실 나는 친조카,종질(從姪),생질, 종손(從孫) 등이 엄청 많다. 그들 나름나름 사랑스러운 구석이 있지만, 그 가운데도 위에서 소개한 생질을 무척 사랑한다. 종교도 같지만, 그가 외가(外家) 쪽 피를 받아 나와 마찬가지로 예술가라는 점으로 하여서 더욱 사랑한다.
사실 또 한 명의 예술가가 있다. 그는 내 둘째누님 맏이이며 내 고향 청송의 군청에서 축산계장으로 지내는 이다. 나보다 서너 살 아래인 그. 그는 평소 나더러,“예술가는 하나같이 ‘똘아이’이던데, 외삼촌도 그러해요.”하면서 비아냥대던 이다. 그랬던 그가 몇 해 전 어느 문학잡지에 시 부문 신인상을 받아 시인이 되었다며 데뷔작이 실린 책과 함께 축하해달라는 연락이 왔던 것이다. 사실 축하해야 할 일이었지만, 내 속내는 제법 복잡했다. 나 하나만으로도 이렇듯 벅찬데, 내 피붙이 하나가 또 그 불구덩이에(?) 빠져들었는가 싶어서. 아무튼, 그도 그의 외할머니인 내 어머니의 피를 물려받아 눈부신 문업(文業)을 닦아가길 바랄 따름이다.
이제 잠시 미루어 두었던 그분, ‘김학’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를 마저 들려드려야겠다. 그분을 안 지는 꽤 오래 된다. 내가 대학 재학시절이었던 1970년대로 시간은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문인협회 기관지인 <<월간문학>> 신인상에 수없이 도전했다. 물론, 최종심에 오른 일도 빈번했다. 모르긴 하여도, 한국 수필계에서 신춘문예나 신인상 등에 투고한 회수가 가장 많고 최종심에 오른 적도 가장 많은 이를 꼽으라면 윤아무개 일 것이다. 이는 빈말이 아니다. 그런데 나의 경쟁자(?) ‘김학’이라는 분이 ‘전화번호’라는 수필로 신인상을 받은 걸 알게 되었다. 당시는 요즘과 달리, 이사를 하면 전화번호가 자연 바뀌게 되었는데, 애지중지했던 전화번호가 바뀌게 된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적은 글이었다. 무생명체인 전화번호에다 생명을 불어넣어 적은 것이 특징이었다. 나는 그 비싼 장거리전화요금 아랑곳 않고 그분께 축하전화도 드린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분을 알게 된 것은, 내가 후일 <<월간문학>> 잡지를 받아보게 되면서부터다. 그분은 월평에다 내 이야기를 거지반 적어 두었던 것이다. 대체로,지난 호에 실린 글에 관해서 평을 적는 게 관습처럼 되어있으나, 그분은 정작 그 잡지에 실리지도 않은 나의 글, ‘문장수련’에 관해 ‘수필계에도 몰래 카메라가 있다’ 요지의 글을 적으신 것이다. 그 ‘문장수련’이란, 지금도 어느 매체에 연재하는 일종의 문장이론이다. 기성수필가들의 발표작에서 잘못된 문장을 찾고, 거기 합당한 문장이론을 제시하며, 그 글을 바로잡아보는 형태로 되어 있다. 나는 그렇게 하는 일을 두고, ‘문장치료’라고 부르며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문장치료사’라는 직함(?)을 스스로 붙여쓰기도 한다. 아무튼, 그렇게 알게 된 분이다. 그러고서 나는 잠적 아닌 잠적을 한 수필가였다. 거의 10여 년 동안 글쓰기를 하지 않고 지냈다. 그러나 어느 날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글 한 편이 어느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린 게 계기가 되어, 어떤 사명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때부터 거의 신들린 사람처럼, 거의 하루에 한 편의 수필을 쏟아내게 이르렀다. 나는 그렇게 적어대는 글을 매일 새벽 몇 분한테 e메일로 부치게 되었는데, 김학 선생님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당신의 개인 블로그와 당신네 문학회 블로그에 올리신 것이다. 오늘은 그 수효 등에 관해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마로니에 샘가’ 블로그에 본디 나의 필명 ‘윤ㅇㅇ’으로 올려진 게 2011.9.27.부터 2014.3.14. 현재까지 정확히 450편이다. 또 같은 블로그에 ‘윤요셉’이란 필명으로 올려진 게 2014.1.20.부터 2014.3.17. 현재까지 총 44편이다. 둘을 합치면 494편이다. 물론 이들 가운데는 이중으로 올려진 글도 있지만, 30여 개월만에 500여 편을 쓴 셈이다. 내 자랑을 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30여 개월 동안 매일 아침 나의 글을 받으셨으며 곧바로 회원들과 일반독자들한테 선모이기 위해 그렇듯 블로그 등에 올리셨다는 계산이 나오지 않은가. 그 작업이 편당 1분씩 소요되었다 할지라도, 누적하면 엄청난 수고를 하신 것이다. 그렇게 올려진 글은 또 많은 분들이 퍼나름으로써 나를 한국의 윤아무개 수필작가로 알려지게 하신 게 분명하다.
요컨대, 나와 나의 생질들 둘은 내 어머니의 영향으로 예술가이자 생활인이 되어 있다. 진심으로 고인에게 감사 드려야 할 일이다. 그리고 전주의 김학 선생님 덕분으로, 나는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한 작가다. 사실 한번도 찾아 뵈온 적 없는 이한테 이렇듯 큰 사랑을 베풀어주셔도 되는지 여쭤보고 싶다. 그것은 크나큰 특혜임에 틀림없다. 그분의 수고와 사랑에 머리 조아려 인사 드리는 한편, 기대에 어긋남 없이 끊임없이 창작에 힘쓰겠노라고 다짐하며 글 접는다.
작가의 말)
이처럼 글로써라도 ‘기워 갚아야’ 할 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