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수필작가 윤근택이가 신작 및 기발표작 모아두는 곳임.

Today
Yesterday
Total
  • 파밭에서
    수필/신작 2014. 4. 15. 08:44

    파밭[葱田]에서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나는 종종 하찮은 사물한테서 삶의 지혜를 배울 때가 많다. 또 그렇게 얻은 지혜를 그때그때마다 곧바로 수필이란 형식을 빌어 글로 적기를 좋아한다. 사실 이미 몇 차례 느낀 바이지만, 파밭에 나섰다가 또다시 놀라게 되었다. 나도 더러는 파를 뿌리째 뽑아 요리를 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그것조차도 아까워 마치 부추를 베듯, 칼로 땅거죽 위에 드러난 줄기만 베게 되는데, 이미 베 먹은 파들이 또다시 멀쩡해져 있었다는 말이다. 이 또한 무슨 이야기냐고? 다들 알다시피, 파는 대롱 줄기를 지녔고, 그 끝은 피침형(披針形;창모양; lanceolate)이며 평소 닫혀 있는데, 칼로 베게 되면 당장 피리 꼴의 대롱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일정 기간이 지나면, 다시금 그 끝이 아물어 피침형으로 복원되니 놀랍지 아니 하냐고? 사실 파만이 그러한 자가치유의 능력을 지닌 게 아니다. 경험한 바 부추 잎도 그러하였고, 춘란 잎도 그러하였고, 행운목 잎도 그러하였고, 소나무 잎도 그러하였다. 대체로 식물들의 잎들은 그러한 자가치유 능력을 갖춘 듯싶었다. 반대로, 마치 가위로 자른 듯 생긴 나무백합(튜울립 트리)의 잎은 가위로 일부러 뾰족하게 잘라도 부모한테서 받은 유전형질 대로 언제고 절두(截頭; 종이를 접어 가위로 끝을 자른 듯한 잎 모양)라는 특수한 잎 모양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내가 파 잎의 상처치유능력(wound healing power)을 더욱 갸륵하게 여기는 것은, 여느 식물의 잎과 달리 그 속 비어있음 때문이다. 사실은 그렇게 아물 때까지 베인 대롱 줄기 속으로 빗물 등 이물질이 들어가 고였을 터인데 .

    식물이 이처럼 굳이 본디 꼴의 잎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이유가 대체 뭘까? 설혹 베여 끝이 뭉텅한 상태의 잎이 되어도, 생명활동에는 하등의 지장도 없을 성 싶은데도 . 얼핏 생각하기에는 그렇지만, 그들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몸을 해치지 않고, 온전히 낳아준 모습 그대로 지키려는 혼이 깃든 것만 같다. 그것이 그들한테만은 일종의 미션이다. 비단,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 이니 .가 인간의 미션만이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우리네는 무슨 유행병이라도 앓듯, 사회 각 분야에서 힐링(healing)-이란 수식어를 붙여 야단법석들이다. 그런데 이미 내가 보아왔던 식물들은 그 힐링을 오랜 동안 묵묵히 수행해온 셈이다. 파밭의 파들조차 저렇듯 행하고 있으니 . 그러니 나는 그 유행어에 휘둘릴 아무런 이유가 없다. 대신, 상처가 아물어가는 저 파를 통해 여타의 생각을 얹어봄이 옳겠다.

    하여간 모든 생명체는 본디의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 그걸 두고 화학에서는 환원(還元; reduction)이라고 한다. 산화(酸化)의 역반응이다. 산화가 산소와 결합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인데 비해, 환원은 수소와 결합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물리학에서는 복구(復舊) 또는 복귀(復歸)라고 부른다. 사실 생명체만이 그러한 능력을 지닌 것도 아니다. 소성(塑性)의 반대말인 관성(慣性)을 떠올려 보면, 자명해진다.

    이 즈음에서 간을 맞추는 걸 끝내자. 만물의 영장인 우리네 인간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지 않은가. 공자님은 <<論語>> <顔淵>편에서 제자 안연을 통해 당신의 가르침 요체인 ()을 명쾌히 설명한다. 바로 극기복례(克己復禮)가 그것이다. 사사로운 자기만의 욕심을 버리고 예로 돌아가라는 가르침이다. 이야말로 자가치유의 본보기인 듯하다. 꼭히 몸만이 아닌 정신의 치유에 해당한다. 또 부처님도 비슷한 가르침을 주셨다. 바로 삼귀의(三歸依)가 그것이다. 부처님(), 진리()한테, 스님()한테 돌아가 참인간이 되기를 바라셨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의 가르침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 신자들은 ()의 수요일에 사제로부터 이마에 재를 바르는 의식을 갖게 된다. 그 때에 사제는 신자인 우리에게 전한다.

    흙에서 왔으니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십시오.

    이미 위에서 이야기하였지만, 치유라는 게 꼭히 상처 난 몸만을 그 대상으로 삼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신적인 면에서 필요한 처방이다.

    나는 지금 파밭을 서성이며 온갖 생각을 다하게 된다. 저 미물도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다스려,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이 의연하게 서 있다. 다만, 치유과정에서 그 뾰족한 잎의 끝에 노랗게 마른 흔적만 조금 남아있을 따름이다. 참으로 장하다. 파들조차 하느님으로부터, 조상으로부터 받은 미션을 저렇듯 훌륭히 수행하는데 .

     

     

     

     

     

    '수필 > 신작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꿈쟁이 요셉에 관해  (0) 2014.04.15
    우비에 관한 토막추억  (0) 2014.04.15
    고르디우스의 매듭  (0) 2014.04.15
    참 좋은 분  (0) 2014.04.15
    자작나무 껍질을 태워 봐  (0) 2014.04.15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