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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7)수필/음악 이야기 2014. 4. 15. 08:38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7)
-행진곡의 왕(The march king)-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그는 ‘행진곡의 왕’으로 일컬어진다. 사실 우리는 하루도 그의 행진곡을 아니 듣는 날이 없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서 스포츠중계나 스포츠 뉴스에 그의 음악이 시그널 뮤직 등으로 나온다. 다들 귀에는 익숙한데도,곡을 쓴 이가 누구인지만 몰랐을 따름이다. 그가 바로 ‘존 필립 수자(John Philip Sousa, 미국, 1854~1932)’다. 그는 미군이 주둔한 곳이면 어디서나 자기네 국가(國歌)보다 ‘성조기여 영원하라(Stars and Stripes forever)’가 오히려 더 자주 연주하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의 생애를 뒷조사(?) 해보았다. 소년시절 워싱턴, 필라델피아 등지의 극장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는 한편 지휘봉도 잡은 것으로 나타났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하지 않던가. 1880년 그가 25세 약관일 때 대통령 의전 악대인 해병대군악대 악장이 된다. 그리고는 군악소령까지 진급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민간인이 되어 1892년 ‘수자 취주악단’을 조직하고, 취주악에 쓰기에 적합한 소위, ‘수자폰’을 만들기까지 한다. ‘튜바’라는 악기를 개량한 것으로 최저음을 내는 금관악기로 알려져 있다. 독자님들께 덤으로 드릴 게 있다. 색소폰도 수자폰처럼 그걸 고안해 낸 벨기에의 ‘아돌프 색스’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 다시 수자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간다. 그는 미국이 제1차대전에 참가하게 되자, 예순이 넘은 나이에 군에 복귀하여 해병대 군악대 훈련소장으로 일했다. 그는 미국인들한테 애국심으로 상징되는 인물이다. 그가 1889년 작곡한 ‘워싱턴 포스트(Washington Post)’는 1890년대 미국과 유럽을 휩쓴 ‘투 스텝 댄스’ 열풍의 근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1896년 크리스마스에 작곡한 ‘성조기여 영원하라’는 미합중국의 공식 행진곡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가 작곡한 ‘성조기여 영원하라’는 미국국가인 ‘성조기여 영원하라(The Star-spangled Banner)’와 다른 곡이다. 그의 행진곡 가운데는 이밖에도 ‘Semper fiedelis(항상 충성을)’, ‘El captian’, ‘Manhatan Beach’, ‘The Invincible Eagle’ 등 유명한 곡들을 많이 적었다. 그렇게 하여 적은 행진곡이 100곡 되며,오페라타와 춤곡과 가곡 등도 많이 적은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사실 우리는 그의 행진곡을 수 없이 들어왔지만, 그 곡을 적은 이가 누구이며 무슨 행진곡인지 몰랐을 뿐이다.
자, 이쯤 해두고 내가 그의 행진곡을 들었던 시대별 구분과 그때마다의 상황을 소개하고자 한다. 독자 여러분께서도 나와 유사한 추억이 있을 것이다.
유년시절. 어머니를 따라 읍내로 간 일이 있다. 시오리를 걸어가다 보면 아랫마을 ‘솔편’에 극장이 나타났다. 극장 앞에 만국기가 펄럭였다. 그 곳 극장 확성기에서 경쾌한 행진곡이 흘러나왔다. 어깨가 들썩여졌고, 영화 구경을 참으로 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살아생전 우리들한테 ‘문화교실’ 한번 허락해준 적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몇 푼도 되지 않는 극장표. 오늘에야 안 사실이지만, 그렇게 흐르던 행진곡이 죄다 위에서 소개한 수자의 행진곡이었다.
국민학교 시절. 분명코 나는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에 다녔다. ‘초등학교’라고 쓰면 내 아련한 추억조차 다 사라질 것만 같아서… . 사실 나는 한국전이 끝난 후 몇 해가 지난 1957년에 태어난 이다. 도회지 또래 아이들은 어떠했는지 잘 모르겠으나, 우리는 다들 헐벗은 아이들이었다. 미국 정부의 구호물자인 ‘마른 우유’와 ‘강냉이’ 등을 얻어먹었다. 그래도 행복한 나날이었다. 등교할 적이나 하학할 적에는 스피커에서 행진곡이 흘러나왔으니까. 그 행진곡은 어린 나한테 기쁨과 환희, 힘과 용기를 주었던 게 사실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아이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가을운동회 매스게임을 할 적에도 봄,가을 소풍 때도 행진곡은 예외 없이 울려 나왔다. 그 음악들이 죄다 수자의 행진곡이었다는 것을. 그는 분명 이국(異國)의 아이들한테도 희망을 주었다.
중학교 시절. 중고등학교가 함께 붙은 시골학교였다. 수업이 끝날 즈음, 고등학교 브라스밴드 형들은 이른바 ‘나발’을 불어댔다. 그 곡명과 노랫말을 끝까지는 알 수 없으나, ‘먼 산에 아지랑이 ‘로 시작되는 곡은 대를 이었던 것 같다. 그런 가운데 브라스밴드 형들은 군내(郡內) 각종행사에 앞서 정말 열심히 연습을 하곤 했다. 그 연습곡들은 행진곡이었는데, 그 또한 오늘에야 안 사실이지만 모두 수자의 행진곡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유난히 행진곡을 많이 들은 시절이다. 교내 브라스밴드의 연주곡은 물론이려니와 축구경기장에서 행진곡을 얼마나 자주 들었던가. 내가 다녔던 대구의 청구고등학교는 아직도 축구 명문학교로 알려져 있다. 재학시절, 전국 규모 대회에서 한 해에 3관왕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당시 펄펄 날았던 후배 ‘변병주’와 ‘박경훈’ 콤비는 후일 국가대표선수로, 그것도 콤비로 활약한 바 있다. 요즘은 한참 후배인 축구신동 ‘박주영’이가 나온 학교이기도 하다. 우리는 서울이며 부산이며 대구며 온 데 응원을 다녔다. 사실 공부하는 것보다 축구경기 응원하러 가는 게 더 신났다. 운동장에서는 어김없이 행진곡이 흘렀다. 특히, 개막에 앞서 흘러나오던 행진곡은 우리들을 들뜨게 하였다. 파란 잔디와 모교 선수들의 노란 유니폼을 난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때 흘러나왔던 행진곡도 이제야 알고 보니 죄다 수자의 행진곡이었다.
58세가 된 요즈음. 나는 그 동안 잔잔한 음악에만 너무 길들여져 있었다. 자칫 무기력한 늙은이가 되어갈까 두려워한 적도 많다. 바로 이러한 때에 ‘수자’라고 하는 작곡가를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이처럼 ‘행진곡의 왕’을 새롭게 알게 됨으로써, 내가 성장해 온 그 긴 여정에서 사실은 그의 행진곡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는 것도 되새길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모든 추억이 그의 행진곡과 함께 존재했다는 것을. 앞으로는 수시로 그의 행진곡도 들을 요량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그의 행진곡은 기쁨과 환희,힘과 용기를 주기에 꼭 그렇게 할 것이다. 마침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고 삼월 아닌가. 봄을 일컬어 ‘spring’이라고 하였다. 용수철도 ‘spring’이라고 하였다. 또, 삼월을 일컬어 ‘march’라고 하였다. 그가 그토록 많이 적은 행진곡도 ‘march’라고 하였다. 끝으로, 독자님들께도, 특히 연로한 독자님들께도 수자의 행진곡 모음을 자주 들으시라고 권하고 싶다.
(다음 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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