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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적바림
    수필/신작 2017. 4. 15. 07:15

     

     

     

     

                               

     

                                                                              적바림

     

                                                                                                                                            

     

                                                                                                               윤 근 택 (수필가)

     

     

     

     

            참말로, 우리네가 잊지 말아야 할 사항도 많다. 그러함에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깜박깜박 잊어버리는 일이 잦다. 특히 자고 일어나면, 지난 저녁 무렵에 행한 농사일 갈무리 여부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 쩔쩔매곤 한다. 사실 입에 담기도 민망하지만, 자가진단해보자니, 잦은 농주(農酒) 마심으로 인하여 알콜성 치매 증세같기도 하여 두렵기까지 하다.

            해서, 최근에는 색다른 지혜를 짜내었는데... . 그것이 바로 손바닥 메모장이다. 손바닥을 메모지 대용(代用)으로 쓴다는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할 양이면, 어김없이 손바닥에 볼펜 또는 네임펜으로 적힌 주요사항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손바닥보다 뛰어난 메모지는 이 지구상에는 없는 것 같다. 사실 이 손바닥 메모장은 나의 창안품이 아니다. 국민학교(결코 나는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에 다녔다. 내 아련한 추억조차 고스란히 간직하고 싶은데... .)시절, 어느 담임선생님이 늘 말씀하시곤 하였다.

            여러분, 오늘 수업 끝. 다시 손바닥!”

            그러면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손바닥을 펴서, 선생님이 칠판에 적는 글씨를 따라 적곤 했다. 대체로 이러한 것들이었다. ‘산토닌(회충약) 먹기’, ‘할미꽃 뿌리 캐오기(화장실 구더기 죽이기 위해서 썼음.)’, ‘솔방울 주워오기(난로에 불쏘시개로 썼음.)’... ‘양초 가져오기(겨울에 교실 마룻바닥에 초칠해서 물걸레 청소 아니 했음.)’ . 그 손바닥 메모 덕분에 준비물 챙기기에 실수가 거의 없었던 기억.

            오늘밤 세수를 하려고 양손바닥에다 세숫비누를 묻히다가 보니, 거기에 두 가지 사항이 적혀 있다. ‘강아지 사료’, ‘ 도라지씨’. 아침에 맞교대자 전기주임한테 인계인수를 하고 퇴근하여 나의 만돌이농장에 곧바로 달려갈 텐데, 그곳에 가기에 앞서 강아지 사료를 사가야 하며, 지난 해 가을에 받아둔 도라지씨를 뿌려야 함을 나타낸다. 물론, 나는 손바닥 메모 덕분에 여축없이, 깔축없이 스스로 부여한 그 두 가지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문득, 그 놀라운 메모의 원리를 우리네 인간들은 어떻게 알아냈을까 싶기도 하고, 왜 하필이면 그 행위를 메모라고 할까싶어 인터넷 검색창에다 이런 저런 검색어를 입력해 본다. 그러다가, 의외의 수확을(?) 얻게 된다. 물론 메모‘memo’에서 온 말이다. 다시 이 ‘memo’‘memorandum’의 축약이다. 아니, ‘memorandum’의 메모사항이 ‘memo’인 셈이다. ‘잊지 않기 위해서나 남에게 전하기 위해서 간략하게 요점만 글로 적음.’ 혹은 그렇게 적은 글을 뜻하니, ‘memorandum’의 메모가 ‘memo’인 게 분명하다. 메모에 해당하는 순수 우리말은 없을까 살펴본즉, ‘기록’, ‘비망록’, ‘적바림’, ‘쪽지 기록등으로 순화해서 쓸 것을 권유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내가 흥미롭게 받아들인 어휘는, 바로 적바림이다.

            적바림, ‘적빠림으로 읽히는 어휘라는데... . ‘나중에 참고하기 위하여 글로 간단히 적어 둠. 또는 그런 기록.’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적바림되다[적빠림되다/적빠림뒈다]’ 꼴은 피동형. ‘적록(摘錄)’, ‘적기(摘記)’ 등의 유의어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적바림‘-바림이 합쳐진 말이라는 뜻인데... . ‘-바림은 대체 어떠한 뜻일까?

            바림, 화법(畫法)에서는 단계적으로 점점 엷게 하거나 점점 진하게 하는 그러데이션(gradation) 기법을 말한다. 한쪽으로 갈수록 색이 바랜 듯한 효과를 낼 수 있는 색채기법을 일컫는다. 이는 적바림에서 말하는 ‘-바림과는 동떨어진 의미인 듯하다. 다시 살펴본즉, ‘발리다의 옛말 리다가 하나 걸려나온다. ‘ 뼈다귀에 붙은 살을 걷거나 가시 따위를 추려 내다를 나타내는 이 말. 그러니 메모를 일컫는 적바림에 쓰인 ‘-바림, ‘발리다에서 온 듯. 그런데 적바림, 유의어 摘錄摘記를 미루어 볼 때에 본디 바림이었을 거라는 추측. 그렇다면 순우리말도 아닐뿐더러 전혀 순화된 어휘 같지가 않다. 더욱 놀라운 것은, ‘글쓰기를 이르는 우리말 ‘()적기또는 ‘() 적다가 한자어 摘記의 음역(音譯) 같다는 사실. 모르긴 하여도, ‘글쓰기를 일컫는 말인 ‘() 적기혹은 ‘() 적다도 한자어 摘記에서 따왔으리라는 생각 떨칠 수가 없다.

            아무튼, ‘메모의 순화된 어휘 가운데에는 적바림도 있다니, 시쳇말로 다소 찜찜하기는 하지만, 어디 한번 믿어볼까나. 두루 익히 아는 사항이지만, 우리네 인간은 기억력이 한계가 있고, 뇌의 용량도 한계가 있다. 해서, 기록을 남기고자 종족 나름마다 고유의 문자(文字)를 고안해 내었다. 그 점이 여타 동물들에 비해 월등히 빼어난 점이다. 이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항이다. 그 숱한 문자 가운데에서도 메모내지 적바림의 위력은 아주 대단하다. 길고 긴 문장을 단 한 단어, 아니 단 한 자의 글로 남겨두어도 된다. 그러면 기억이 되살아나니! 그 짧디짧은 메모를 나름마다 독특한 기록지에다 적게 되는데, 나는 환갑 나이에 이르러 다시금 그 기록지를 그 무엇도 아닌, 손바닥으로 택했다. 다시 말하거니와, 손바닥을 메모지로 알려준 이는 옛 스승이었다. 참으로 고맙다. 수필작가이기도 하며 농부이기도 하며 직장인이기도 한 나.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수필작가인 나는, 글감이 떠오르면 얼른 손바닥에다 적어댄다. 아울러, 클래식 음악 마니아인 나는, 흐르는 음악이 감미로우나, 여태 그 작곡가와 그 제목을 모르고 지냈다면, 얼른 손바닥에다 프로그램 진행자가 일러주는 작곡가와 작품명을 적게 된다.

           끝으로, 학창시절의 손바닥은 기말고사 커닝 페이퍼로는 최고였다는 점은 두말하면 잔소리이고.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한국디지털도서관 본인의 서재, 국디지털도서관 윤근택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본인의 카페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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