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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간'을 생각해요수필/신작 2017. 9. 3. 11:41
‘풀무간’을 생각해요
윤근택(수필가)
사랑하는 당신,
어느 아파트 전기주임인 나는 업무상 경비원 아저씨들을 도와 일을 할 적이 많아요. 사실은 그분들이 70대 할아버지들이지만, 경비원은 아무리 연세가 들어도 ‘경비원 아저씨’라고 불러요. 그 많고 다양한 갑질에도 불구하고, ‘-아저씨’란 칭호를 지녔으니, 특권이지요? 본디 나도 아파트 경비원이었으며, 내년쯤엔 다시 ‘경비원아저씨’로 돌아갈 거여요.
참, 이야기가 샛길로 빠져들었네요. 내가 그분들과 함께 하는 일 가운데에는, 우리가 ‘보물창고’라고 일컫는 ‘고물창고’돌보기도 있어요. 이 아파트 담장 너머에는 ‘OO자원’이란 고물상이 있어요. 참, ‘고물상’이란 말도 당신한테만 하는 거여요. 그 사장이 들으면 기분 나쁠 테니까요. 요즘은 ‘고물’이라 하지 않고 ‘자원재활용품’이라고 하잖아요. 하여간, 그 댁 사장이 화물차를 몰고 주기적으로 아파트로 와요. 그러면 우리는 고철은 고철끼리, 플라스틱은 플라스틱끼리, 빈 병은 빈 병끼리 모아서 일제히 실어주곤 해요. 참말로, ‘끼리끼리’ 혹은 ‘낄끼리’여야 해요. 그렇게 해서 판매한 소액은 몽땅 관리사무소에 헌납하게 되어요. 한편, 어느 업자가 모조리수거해 가서 커다란 용광로에 넣어 녹여, 융화(融化)가 되었든 융합(融合)이 되었든 제법 쓸 만한 제품으로 거듭 태어나도록 하겠지요.
사랑하는 나의 임이시여,
오늘도 나는 그처럼 창고비우기를 도왔어요. 그러다가 문득 지난 날 ‘풀무간’을 떠올렸어요. 누가 나더러 수필작가가 아니라 할까봐서?
고향 마을 ‘저너메(←저 너머)’엔 마을 어른들이 공동작업해서 흙으로 지은 가마가 있었어요. 짚이엉으로 지붕까지 인 풀무간. 어린 우리들은 종종 보곤 했어요. 가을 한 철, 봄 한 철 대장장이가 이 마을 저 마을 순회했거든요. 집집이 보습이며 괭이며 낫이며 호미며 도끼며 온갖 연장들을 들고 그리로 갔어요. 그리고는 초조히 순번을 기다려 대장장이한테 물건을 맡겼어요. 가족 가운데 어린 우리들은 번갈아가며 풀무질을 하고, 힘께나 쓰는 아버지나 큰형님이나 작은형님은 해머질을 해야 했어요.
대장장이는 모탕 위에다 빨갛게 익은 연장들을 집게로 집어올린 후 메겼어요.
“때리소. 때리소. 때리소. 때리. 때때리. 때.때.때. ”
대장장이는 음악용어인 ‘점점 빠르게’즉 ‘아첼레란도(accelerando)’는 몰랐겠지만, ‘쇠뿔도 단김에.’와 ‘Make hay while the sun shines.’와 ‘Strike while the iron is hot.’을 너무도 잘 알았기에요.
사랑하는 당신,
참, 기왕에 꺼낸 이야기이니, 아들이 자기 아비한테 반말이 허용되는 경우가, 바로 ‘벼름질’할 때라는 거 아세요? 장인(匠人)인 아들은 모탕 위에 벌건 연장을 올려두고, 해머질하는 아비한테 일러요.
“아버지요, 때리소. 아버지요, 때리소. 때리소. 때리소. 때리. 때리. 때때리. 때때. 때.”
마을 어른들은 그 대장장이한테 일정량의 보리쌀과 쌀을 품값으로 치르곤 했어요. 그러나 그 일도 이미 옛 이야기이지요. 그 풀무간은 진작에 사라졌고, 그 풀무간에 모였던 마을 어른들도 다 저 세상으로 떠났어요.
진심을 다해 사랑하는 당신,
나는 이 풀무간 이야기를 통해, 여류 수필작가이시며 빼어난 여류수필가가 되시길 바라는 당신께 달리 들려드릴 게 있어요. 남들은 하찮게 여기며 내다버린 쇠붙이일지라도 소중히 여기세요. 물론 플라스틱 제품도 그러해야겠지요. 이미 위에서 말했듯이 그것들을 끼리끼리 모으기만 하면 되어요. 그렇게 끼리끼리 모은 것들은 모두 글감 내지소재의 다른 이름인 걸요. 재치로운 당신께서는 금세 알아차리실 겁니다. 그 다음에는 당신의 가슴 그 용광로에다 넣고 완전히 녹이셔야 해요. 융화 내지 융합인 걸요. 내 사랑하는 당신께서는 그 용융물(熔融物)을 ‘수필’이라는 거푸집에다 바삐, 그리고 재주껏 들어부어야 해요. 그 거푸집이란, ‘수필의 형식미’를 말하는 겁니다. 한편, 당신은 불집게로 그 쇠붙이를 집어 모탕 위에 올린 다음, 메겨야 해요. 나를 부려야 해요.
“때리소. 때리소. 때리소. 때리. 때때리. 때.때.때. ”
참말로, ‘아첼레란도’여야 해요.
그 무엇보다 내가 당신을 위해 할 일은... 끊임없이 풀무질을 해드려야 함을. 불이, 문학에 대한 당신의 불이 꺼져서는 아니 되겠기에요. 고물 쇠붙이를 녹여 보습을 만드는 이가 바로 작가거든요.
아, 그리고 당신을 오래오래 사랑할 거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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