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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ce
윤근택(수필가)
남의 긴 다리를 믿어서는 아니 된다. 남의 긴 다리를 얕보거나 깔보아서도 아니 된다. 이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냐고? 엊그제 내가 ‘전기·영선(營繕) 주임’으로 근무하는 아파트에서, 남의 다리로 인해 내 다리를 다쳤음을 말한다. 4계단짜리 접사다리를 담벼락에 기대고 올라서서, ‘엔진 전정기’로 생울타리인 녹나무를 수평지게 가지런히 두목작업(頭木作業)을 하고 있었다. 두목작업이란, 전정작업이되, 수목의 ‘더북나기 순’이나 햇순을 마치 바리캉(bariquant)으로 머리를 깎듯 가지런하게 베는 걸 일컫는 임학도들만의 전문용어다. 사실 나는 대학에서 임학을 전공한 사람이니... . 하여간, 그렇게 작업하고 사다리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순간, 그 사닥다리가 뒤뚱 넘어져 버렸다. 오른 무릎부위가 바깥으로, 마치 가지가 째지듯 크게 젖혀졌다. ‘찌지직’하는 소리까지 들렸다. 낭패였다. 남의 다리인 사닥다리를 얕봐서 벌어진 일임에 틀림없다. 실제로 경험상, 무거운 짐을 지고 언덕길을 내려올 적에는 넘어지지 않았다. 대신, 만만하게 여기며 짐을 지고 언덕길을 내려올 적에는 넘어지는 예가 많았다. 바짝 긴장하지 않으면 사고가 나기 십상이다. 네 개의 다리를 지녔기에, ‘사닥다리(四-)’라고 부르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네 개의 다리들 가운데 단 하나만이라도 바닥에서 떨어져 있으면, 그렇게 균형을 잃게 되는 법. 그러한 점에서는 두 다리를 지닌 우리네 인간이 기능면에서 네 다리를 지닌 여타 존재들보다 착지(着地)가 안정적인지도 모른다.
당장 걷는 데 불편이 따랐다. ‘인대(靭帶)’가 늘어났거나 찢어졌거나 끊어졌을 수도 있겠다고 여겼다. 그렇더라도 하룻밤 견뎌보고 호전되지 않으면, 또 다시 그 정형외과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우선,‘포비돈 요오드액’을 무릎 안쪽 통증 부위에 발랐다. 사실 살아생전 내 어머니는 ‘삔 데’에는 치자씨가 그저그만이라며 두드려 붙여주곤 했다. 사실 치자씨의 색깔도 ‘포비돈 요오드액’의 그것과 비슷하며, 소염(消炎)효과도 뛰어나다는 걸 잘 알고 지낸다.
밤에는 인터넷을 통해,‘삔 데’ 즉 ‘염좌(捻挫)’의 응급처치 요령을 익혀, 그대로 실천하고 있었다. 우선,‘얼음찜질’이 유효하다는 걸 알아, ‘전기실’냉장고 냉동실 벽에 붙어 있는 얼음을 바늘을 이용해서 조각조각 깨어 비닐봉지에 담아, 통증 부위에 얹어보았다. 프로축구 선수가 상대 팀 선수와 부딪혀 잔디밭에 드러누울 적에 의료진이 달려가 얼음찜질을 하던 모습을 떠올리면서. 나도 얼음찜질을 그렇게 하였다. 그 얼음찜질의 효능은, 실핏줄이 터져 내출혈로 이어질 때 그걸 누그러뜨린다는 거. 참, 의사들은 ‘삔 데’를 두고‘捻挫(염좌)’라고 한다. 이제야 알게 된 사항이지만, ‘捻’은 ‘비틀림’을 뜻하고, ‘挫’는 ‘꺾임’을 뜻한다. 뼈가 다친 게 아니라, 뼈와 뼈 사이에 위치한 물렁뼈를 둘러싼 ‘와이어-로프’즉 힘줄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인터넷을 통해, 가히 신선한 충격으로 와 닿은, 삔 데’ 응급처치요령. 그게 바로 ‘price’였다는 거 아닌가. 그 머리 좋은 의학도들이, 그 많은 전문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외우기 쉽도록 만든 말인 듯하다. 어휘 자체는‘가격’, ‘대가’, ‘물가’로도 번역되는 ‘price’이지만, 염좌 초기단계의 응급처지 기본요령이라는 게 아닌가.
p : protection (상처난 부위 보호)
r : rest(상처난 부위 휴식)
i : ice (얼음찜질)
c : compression(압박으로 부기 가라앉힘)
e : elevation [상처 부위 거상(擧上;높이 들어올림)을 통한 혈액 순환 저지]
나의 신실한 애독자들께서도 이‘price’만 알아두시면, 삶에 큰 도움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는 평소 나의 수필작품을 자주 읽어주는 데 대한 프리미엄이다.
여담이다. 군대에 다녀온 나의 애독자들은 위 ‘price’를 통해 연상되는 게 하나 더 있을 것이다. 바로 ‘소총 분해 및 결합 순서’가 그것이다.
‘평탄하고 밝은 곳에서, 순서에 따라, 부품 손·망실에 유의해서. 결합은 분해의 역순.’
하늘이 두 쪽 나도 잊지 않을 그 교본. 혈기왕성하던 젊은이들한테 고향에 두고 온 애인을 연상케 하던 그 원리. 하여간, 외우기 쉽게 만든 ‘삔 데 응급처치요령’인‘price’는 놀랍기만 하다.
사고가 난 지 이틀째 되던 어제, 나는 그 정형외과 전문의한테 진료를 받으러 갔다. 이 환자는 자초지종을 다 이야기하였다. 아울러, 지난 밤 내가 인터넷을 통해 익히고 실천한 응급처치에 관해서도 보고(?)했다. 그는 내가 제대로 응급처치하였다고 격려해 주었다.
“선생님, 지난번에는 ‘드 께르 씨 병’때문에 왔지요. ‘손목 터널 증후군’ 말이에요. 그 병은 나았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내측부인대’에 무제가 생긴 듯해요. 다리를 바깥쪽으로 젖히려면 아파요.”
전문의는 내가 정확한 명칭을 알자,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 ‘내측부인대’의 역할이, 발 혹은 다리를 바깥쪽으로 젖힐 때 ‘팔자걸음’이 아닌 ‘일자걸음’으로 바로 잡아주는 역할을 하며, ‘외측부인대’는 ‘안짱걸음’을 ‘일자걸음’으로 바로잡아주는 역할을 한다는 거. 사실 지난밤에 인터넷을 통해 거지반 알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종종 유명한 프로축구선수들이 겪는다는 ‘십자인대 파열’에 관해서도 지난밤에 웬만큼 익혔다. 십자인대도 ‘전방십자인대’와 ‘후방 십자인대’가 따로 있다는 사실.
전문의는 간호사들의 도움을 받아, 내 오른 무릎을 중심으로 반깁스(半gips)를 해주는 한편, 압박붕대로 처매어주었다. 위에서 소개한 ‘price’가운데 제 4단계인 ‘c : compression(압박으로 부기 가라앉힘)’에 해당한다.
다들 경험했겠지만, 웬만한 병은, 병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을 만나는 순간, 곧바로 낫는다. 그래서인지, 이틀이 지난 오늘은, 지팡이를 짚고 지냈던 어제까지와 달리, 거의 원상회복 되어 계단을 오르내리는 데도 별 지장이 없다. 치유가 된 모양이다.
이번 안전사고를 겪고서 새롭게 얻은 게 만만찮다. 우리네 몸속 뼈는 꽤나 중요하다. 말 그대로 뼈는 프레임 즉 틀이다. 그러하지만 그 뼈 둘레에 신축성을 지닌 인대가 있기에 자유자재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거. 그 인대의 메커니즘을 실생활에 응용한 것들이 의외로 많다. 굴삭기의 암(arm)과 붐(boom)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유압으로 작동되는데, 우리네 인대의 신축을 그대로 모방한 사례다. 아킬레스 (Achille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전쟁영웅이다. 그는 온 몸 어느 자리에 화살을 맞아도 끄떡없었다. 하지만, 그는 발뒤꿈치의 근육 즉 인대에 치명적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그 발뒤꿈치의 인대에 화살을 맞아 죽었다는 거 아닌가. 실제로, 그 ‘아킬레스건(-腱)’이 끊어지면, 발이 축 늘어진다고 한다.
우리 몸에 무수히 많은 ‘섬유질의 띠’한 오라기조차 무시할 수 없는 존재다. 그 인대들이 활력을 잃게 되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리란 생각. 자칫, ‘로봇 걸음’이나 ‘로봇 팔 움직임’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 떨칠 수가 없다. 또, 그 인대 오라기는 바이올린을 비롯한 여러 현악기의 현(絃)과 같아서, 너무 느슨해져도 아니 되고 너무 팽팽해도 아니 됨을 이번에 새삼 느끼게 되었다. 참말로, 인대 한 오라기도 현악기 현의 역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죽는 그날까지 어버이가 낳아준 대로, 인대 하나라도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 ‘price’는 ‘좌염 응급처치요령’이 아니라, ‘내 몸이 값어치(price) 있다.’여도 좋으리.
작가의 말)
그 어떤 소재라도 내 더듬이에 닿기만 하면, 곧바로 글로 둔갑시킨다. ‘종군(從軍) 사진기자’는 적의 포탄이 쏟아지는 가운데에서도 마지막 셔터를 누른다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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