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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배문학을 생각함
    수필/신작 2018. 11. 9. 09:45

    유배문학(流配文學)’을 생각함


     



     


     


                                  윤근택(수필가/문장치료사/수필평론가)


     


     


      흔히들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대로, ‘편한 백성이 되어 있다. 5년 여 고작 12일만 공백이 있었을 뿐, 주욱 이어서 이 아파트 저 아파트 옮겨 다니며, ‘경비원으로 혹은 전기주임으로 지냈던 나. 이번엔 본의 아니게 해고가 되어, 잠정적으로 굴레 벗은 말[]’이 되었다. 사실 그래봤자, 격일제 근무일수로 따져 닷새째 쉬는데... . 한마디로 심심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이참에 그 동안 제대로 손보지 못한 농막 안팎도 수리하고, 가을걷이도 마무리하며, 과수목 전정도 하고, 무너진 돌둑도 고치고 해야겠다고 별렀다. 쉬엄쉬엄 몸과 맘을 추스르는 계기로도 삼을 겸.


       오늘은 농막 앞 돌둑이라도 고쳐보아야겠다고 여기며, ‘모난 돌들을주울 요량으로 개울바닥에 나섰다. 사실 경험상, 돌둑을 짓는 데는 원만한, 즉 둥근 돌보다는 모난 돌이 낫다. 개울 바닥에는 새로운 얼굴을 지닌 모난 돌멩이들이 참으로 많이 불어나 있다. 지난 가을 때늦은 태풍 덕분으로(?) 물이 한껏 불어난 적 있고, 저기 위 경산시 지정등산로이기도 한 선의산(仙義山)’ 산골짜기에서 세찬물살아니, 모진 등쌀때문에 뽑히어 떠내려 온 돌들이 빼곡 쌓여 있는 것이다. 사실 저마다 항변(抗辯)할 게 왜 없겠냐만, 내 알 바 아니다. 내 농장을 휘감은 개울은 폭이 8미터쯤 되며, 그 길이가 내 농장 앞만 하여도 200여 미터가 된다. 그러니 본디 제 자리에 붙박이로 못 지내고, 등쌀에 떠내려온 돌멩이들이 각양각색이며 지천(至賤)이다.


      한 나절 내내 돌을 주워 손수레에 담아다가 돌둑을 고치고 있다. 작업을 하는 동안 엉뚱한, 아주 엉뚱한 생각에 잠기게 되는데..  


    세상사 다 그러해. 격변(激變)이랄까, 개혁이랄까 하는 것이 마냥 나쁜 일만은 아니야! 내 개울바닥의 돌들이 이를 똑똑히 보여주고 있어! 물론 당사자야 더러는 억울하겠지만... .’


       사실 지난 가을 태풍이 몰고 온 폭우 덕분에, 나는 제법 쓸 만한 돌멩이들을 마음껏 주울 수 있으니.


       이번엔 문득 유배문학을 연 역사 속 인물들이 차례차례 떠오른다. 이 게을러터진 수필작가는 최근 버릇처럼 꼴라주(collage)를 이번에도 하겠다. 사실 요점정리가 잘 되어있어서.


     


      <유배문학이란, 조선 시대 선비들이 유배지에서 쓴 작품을 통칭해서 일컫는 용어.


       특정 문학 장르를 이르는 말은 아니다. 조선시대 사림이 조정에 진출한 이후 당파가 형성되고, 정권을 잡는 당파가 바뀔 때마다 조정의 주요 관직에 있던 선비들이 유배를 가게 되었다. 당파 싸움이 치열했던 15~16세기는 관직에 있던 사람들 4명 가운데에 1명꼴로 유배를 갔을 정도로 빈번했다. 유배는 형벌이긴 했지만, 골치 아픈 당쟁에서 벗어나 학문에 정진하거나, 위대한 작품과 저서를 남긴 선비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유배문학 작품을 남긴 사람으로는 가사 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이 담양에 유배되어 있을 때 사미인곡속미인곡등을 지었으며, 시조 문학의 대가 고산 윤선도는 어부사시사, 오우가등을 남겼다. 강진에 유배된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정약용은 500여 권의 저서 지었으며 그 중 지방의 벼슬아치들이 백성을 다스리는 바른 도리를 설명한 목민심서가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다. (이상 다음 백과사전에서 따옴.)>



       나는 대학 입학 후문학회동아리에 잠시 들어 있었다. 그때 문학회 선배들이, 대학교가 소재했던 청주에서 가까운 진천군 어느 산자락에 송강 정철의 묘가 있다면서, 참배하러 가자고 했다. 그 묘에 가본즉, 지난날 명성(名聲)에 걸맞지 않게, 묘역은 참말로 초라했다. 서울에서 태어났다던 송강이 그 낯선 진천에 묻혀있다는 것도 신기했고. 사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명색이 수필작가인 나는, 선배문인들의 발자취를 그때 이후 단 한 차례도 더듬어본 적 없다.


     


       또, ‘다음백과는 경남 남해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180여 명에 이르는 유배객이 거쳐간 곳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그곳에는 남해유배문학관도 있다고 전한다. 그곳 역시 가본 적이 없다.


      그러한데 ...... 나한텐들 유배문학이라고 이름 할 시대가 왜 없었을라고? 1991~1992(2) ‘울릉도 시절이 바로 나의 유배문학 시대 1였다. 이때 나는 나의 인사권을 쥐고 있었던 상사한테 참소리를 하였다가 노여움을 샀다. 해서, 어찌어찌 또 다른 힘으로(?) 승진은 했으되, 그 섬나라로 유배를 갔다. 나는 그곳에서 한 권 분량의 수필작품을 빚었으며, 그 글들을 모아 첫 수필집 <독도로 가는 길>을 만들었다. 나의유배문학 시대 2영양(英陽) 시대일 테고, 두 번째 수필집 <이슬아지>가 탄생했다. 물론, 이때는 자원해서 그 오지로 갓다. 그 이후에도 25년 여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경미한 사안(事案)으로 말미암아, ‘보직박탈도 겪었으며, 이리저리 유배 아닌 유배를 당한 적도 있다.


      유배, 정쟁(政爭)의 소용돌이 속에서 제물(祭物)이 되는 일이기도 하지만... . 위에서 소개한 분들처럼 문학사적(文學史的) 위대한 업적을 남긴 예도 많다는 것을. 쓸쓸히 바다를 내다보든가, 솔바람 소리를 듣든가 했을 그분들. 사실 그분들만이 그러했던 게 아니다. 수필작가인 나도 본의 아니게 모난 돌취급을 받고, 이 곳 저 곳으로 내몰린(?) 일이 얼마였던고? 하지만, 그게 결코 끝은 아니었다. 정신력이 더더욱 강해지더라는 거. 그 일들이 보약이었다는 것도 그 다음, 그 다음에야 깨닫곤 했다.


       지금 나는 지난 큰물에 떠내려 온 개울 돌을 주우며, 그것들의 독특한 개성(個性)을 음미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로써 돌둑을 고치는 등 유용하게 쓸 요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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