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글 다듬기 더는 못할 전설
    문장이론/문장수련(문장이론) 2014. 4. 24. 07:08

    글 다듬기 더는 못할 전설


     

     


     

                           근택(수필가/문장치료사/수필평론가)


     

    1. 산길에서

      허위허위 산길을 걷다가 우람한 소나무와 마주친다. 가지가 y 모양이다. 흡사 그때 보았던 그 나무 같다. 너럭바위에 걸터앉아 회상한다.
      84 2. 대학을 갓 졸업한 나는 낙향하여 고향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취업을 못한 채 날갯죽지 접은 장닭처럼 집 안에만 맴돌았다. 남부끄러워 차마 고샅에  나갈 수 없었다. 봄날, 보기에 안쓰러웠던지 어머니는 나직 제안했다.
      야야, 에미랑 갈비터 개간밭에 옥수수 심으러 가지 않으련?
      좀체 흥이 나지는 않았지만,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모자(母子)는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그날따라 뻐꾸기는 왜 그리도 구슬피 울어대던지. 산길가에 y'자 모양 지겟가지로 뻗은 소나무가 의젓하게 서 있었다. 나는 그 소나무를 가리키며, 생각 없이 내뱉고 말았다.
      어머니, 저 소나무 무척 참하지요? 지게를 다듬었으면 참 좋겠는데요? ” 
      그 말을 듣던 어머니는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들처럼 땅두더지로 살지 말라고, 지게꾼으로 살지 말라고 대학까지 보내놨거늘, 고작 생각하는 게 지게라며 몹시 상심(傷心)한 듯했다. 이내 용서를 구하긴 했으되, 그제나 저제나 살아갈 묘안이 떠오르지 않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였다.
      밭에 닿아, 모자는 옥수수를 갈기 시작했다. 호미로 파고, 씨를 넣고,흙을 덮고... . 어머니는 내내 처량한 콧노래를 불러댔다. 그러면서도 거듭 축원(祝願)했다. 비록, 심을 때는 당신과 함께이더라도, 거둘 때는 아들이 곁에 없었으면 좋겠노라고. 어디론가 이 아홉째 자식이 살 곳을 찾아 훨훨 날갯짓하며 날아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고향 산자락에 해가 저물어갔다. 어디선가 두견이는, 보쌀 대끼소(보리쌀 대끼시오). 보쌀 대끼소. 온 산마을에 외며 날아갔다. 우리는 귀가를 서둘렀다.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는 그 새 울음 흉내를 내며 슬픈 전설 한 자락도 들려주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며느리는 대식구의 밥을 짓기 위해 디딜방아로 보리쌀을 대껴야 했다. 깜빡 낮잠을 들었다가 저녁 끼니장만을 놓쳐버렸다. 그 일로 시어머니한테서 방아공이로 맞아 죽었다. 그 원혼이 새가 되어, 아낙들한테 보리쌀을 대낄 때가 되었음을 그렇듯 일러주고 간다.
      본디 어머니는 이야기꾼이었다. 실은 그 새가 뻐꾸기류이지만, 어머니는 굳이 보쌀 대끼소 새라고 부르곤 했다. 한편, 꾀꼬리는 호로 자식이라고 했다. 한사코 너 에미 코 꿰 달아라. 코 꿰 달아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를 두고 하는 말 같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참매미의 사위는 이씨(李氏)라고 했다. 언제나  이서방! 이서방! 하면서 사위타령을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처럼 억지로라도 맥없는 아들을 웃기려 했던 어머니.
      그 해 8.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에 힘입어서인지 취직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리고는 읍내 전화국에 근무하게 되었다. 장날이었다. 일선(一線) 창구에서 고개를 수그린 채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 한 분이 들어섰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어머니였다. 광주리를 이고 있었다. 어머니는 짐을 내려놓고, 나한테 넙죽 절을 했다.
      윤 주임님, 그 동안 잘 계셨어요? 지난 봄 우리 넷째아들과 함께 심은 옥수수를 꺾어서 삶아 온 건데요, 어디 한번 들어보시지요?” 
      어머니는 언제나 자식들 직함 부르기를 좋아했다. 고향집에 들르면, 윤 대리님, 오셨습니까? 또는, 윤 과장님, 자리에 앉으시죠.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며 맞아주곤 했다.
      저 소나무를 베다가 사당(祠堂)이라도 지어드리고 싶은데... .

      2. 난전(亂廛)에서

      자취를 하다보니까 시장에 나설 일이 잦다. 파 몇 뿌리, 냉이 한 움큼, 감자 한 알을 사더라도 기왕이면 난전 할머니한테 가는 편이다. 이번엔 시장 모퉁이를 돌아서자, 골목에 숨어있던 매서운 바람이 와락 달려들어 볼을 후려갈긴다. 눈물이 핑 돈다. 겨울바람 탓이겠거니. 오늘도 할머니는 옹크려 앉아 채소를 다듬고 있다. 흡사 내 어머니 같다.
      끼니는 제대로 챙겨 드셨을까? 자식들은 무얼 하는 사람들일까? 말리지는 않았을까?
      거꾸로 셈을 해보니, 어머니는 요즘 같으면 젊은 축에 드는 50대 중반이었다. 말릴 재간이 없었다. 고무다라를 이고 대구 변두리 골짝골짝 행상(行商)을 다녔다. 때로는 과일, 때로는 생선이 다라에 담겨 있었다. 그렇게 찢어지게 가난한 형편도 아니었건만... . 이제금 생각해보니, 당신 스스로 어떤 업보(業報)를 그렇게 치르고 싶었던 모양이다.
      내가 대구에 소재한 고등학교로 진학을 하자, 어머니는 핑계거리가 제법 되었다.
      에미야, 그 동안 고생이 많았구나. 끝으로 달린 니 시동생들 셋을 데리고 대구에 밥해주러 가련다.
      어머니는 그렇게 나섰지만, 속뜻은 그 게 아니었다. 큰아들 내외의 짐을 덜어주기 위한 용단이었다. 특히, 열 남매 맏며느리로 맞아들인 여인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던가 보다.

      어머니는 퍽이나 별난 분이었다. 맏며느릿감을 손수 고른 다음, 그 규수한테 통사정하여 데려왔다. 중매쟁이는 형식적으로 넣었다. 내막은 이렇다. 큰형님이 채 혼기(婚期)가 차기도 전에, 부모님은 여러 곳에 줄을 대어 며느릿감을 찾았다. 줄줄이 열 남매를 슬하에 두었으니, 그렇게 서두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쳇말로, 똥차에 밀려 세단이 나아갈 수 없게 될까봐서다.  상대의 부모들은 우리의 가세(家勢)를 둘러보러 오곤 했다. 그런 날은 비방(秘方)이라며, 우리한테 똥장군에다 차례차례 오줌을 누게 했다. 그리고는 이웃집으로 피신(?)을 하라고 했다. 될 성싶다가도 혼사(婚事)가 매번 터지곤 했다. 이제나 그제나 맏이한테 딸을 쉬이 주려 하지 않는 세상인심이다. 더군다나, 시동생 될 우리들은 아직 초등학교에 다니는 조무래기들이었으니... .
      급기야 어머니는 맏며느릿감을 손수 찾아보겠다며 팔을 걷어붙이고 집을 나섰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군내(郡內) 골골 아니 다닌 곳이 없다고 했다. 조바심은 있었으되, 어머니는 나름대로 기준이 분명했다. 됨됨이를 최고덕목으로 꼽았다. 수개월 그렇게 후보자(?)를 찾아다녔다고 한다. 길을 가다가 아가씨와 마주치면 은근슬쩍 말붙이기를 해보았던 모양이다.
      아가씨, 지나가던 할망구인데 냉수 한잔 얻어 마셔도 될까요?
      그렇게 시작하여 사람됨을 알아보고자 했단다. 물을 쟁반에 받치지 않고 떠오면 조상모시기를 소홀히 할세라 퇴짜, 말을 조심성 없이 하면 우애를 끊을세라 퇴짜, 부엌정돈이 엉망이면 손아랫사람들 건사를 제대로 못할세라 퇴짜... . 어느 골짝마을을 지나다가 드디어 괜찮은 규수를 발견했던 모양이다. 둥그런 얼굴, 쌍꺼풀, 치렁치렁한 머리. 가지런한 이빨... . 다소 피부는 까무잡잡했지만 후덕스러운 외양에 끌렸단다. 어머니는 아가씨의 손을 덥석 잡고, 며느리가 되어줄 것을 간청했단다. 어린 시동생들과 별난 시누이들은 당신이 책임질 테니 며느리가 되어달라고. 그때 그 규수가, 지금은 할머니가 된 나의 큰형수다.
      어머니는 자녀를 많이 두어, 맏이 내외한테 큰 짐을 지운 것을 늘 마음 아파했다.
    그러기에
    밥 바라지 핑계로 아들 셋을 데리고 대구에 나와 있었다. 심지어, 세 아들의 학비를, 당신 말마따나 반티(광주리)장사로 충당하고 있었다.
      자존심이 유난히 강했던 어머니. 말년에 이르러서는 당신 노구(老軀) 자체가 자식들한테 짐이 된다고 여겼던 듯하다. 그래서 그 짐을 그렇게 조용히 내려놓고자 했던 것일까?
      그립다. 당신의 아홉째 새끼는 삼가 명복(冥福)을 빈다.


      

       * 창작 후기)


     
     

          문학은 사실을 적는 것이 아니고, 진실을 적는 것이다. 오랜 기간 동안 수필계에, 비생산적인 논쟁거리로 머물렀던 사실허위의 문제. 참말로 비생산적이다. , 내 어머니가 후일 바로 그 옥수수를 삶아서 이고 오신 적은 없다는 말이다. 물론 다른 종류의 곡식 따위는 곧잘 이고 오셨더라도 .


     

          기왕지사 꺼낸 사실진실의 문제이니, 윤오영 선생의 수필작품들에 관해서도 이야기해야겠다. 그분의 명작, 방망이를 깎던 노인의 경우, 작가 윤오영방망이가 지녀야 할 미덕을 진작에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치 귀가 후 그분의 아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방망이가 갖추어야 할 미덕에 관해 알게 된 양 글을 적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방망이 깎던 노인의 프로정신에 대한 경의를 . 이는 드라마틱하게 글을 적을 줄 아는, 대가만이 할 수 있는 작법이다. 작가 윤오영은 이튿날 그 노인을 다시 찾아가 마음 속으로 품었던 불경(不敬)을 사죄코자 한다. 노인은 그 처마 밑에서 사라지고 없다. 작가 윤오영은 철저히 사전계산하고 있었다. 그 노인이 그 곳에 있는 것으로 설정하면, 작품을 완전히 버린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하늘에는 유선형의 흰 구름이 떠 있고, 쳐다본 처마의 서까래는 곡선이고 . 그 자체만으로도 자신이 어제 산 유선형 방망이의 몸매를 연상토록 한다. 아물러, 노인을 흰 수염 단 신선의 경지로 사라지도록 함으로써 . 하여, 작가 윤오영은 신비를 좇는 작가였던 것이다. 그분의 짧은 글, 달밤에 나오는 노인도 그러한 분이었다. 사실 나는 그 작품을 대할 적마다 중국의 전설, 월하노인(月下老人)을 떠올리곤 한다. 심지어, 어쩌면 작가 윤오영은 그 월하노인에서 모티브를 낚아채지나 않았을까 하고서.


     

           여담이다. 나의 작품 유품윤오영달밤을 연상케 하는 작법(作法)으로 되어 있다. 아니, 나의 유품은 그 달밤을 모델로 한 작품이기도 하였다. 이는 진실된 고백이다. 나의 유품에는 달밤에서 쓰인 어휘 하나를 그대로 빌려쓰기도 하였다. 바로 이윽고. 이윽고, 원고지 3~4매를 줄이는 효과가 있었다.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는 말이 아닌가. 그래서일까, 어느 시인 겸 대학교수인 분은 자신이 집필한 중학교 1-1 국어교과서(디딤돌출판사, 2010~2002)에 두 윤씨 (윤오영,윤근택)의 위 두 글을 나란히( 한 편은 국어교과서, 한 편은 생활국어교과서) 같은 단원에 실었다.


     

           요컨대, 위 두 작품은 공히 압축생략이 빼어난 작품이다. 자화자찬이기는 하지만.


     

           다시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린다. 우리는, 어떻게 쓰면 작품이 되며, 또 어떻게 쓰면 잡문이 되어 버리는지에 관해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진실사실 사이를 방황할 때에도 작품잡문의 결과가 생겨날 수 있음을.

     

           * 이 글은 한국디지털도서관 (바로가기 '한국디지털도서관 윤근택')과

              제 카페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문장이론 > 문장수련(문장이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필로 쓰는 수필론  (0) 2014.10.06
    문장수련(57)  (0) 2014.05.05
    문장수련(57)  (0) 2014.04.15
    지금은 온점 시대  (0) 2014.04.15
    찰거머리론  (0) 2014.04.15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