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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리백정의 사위가 된 양반
    수필/신작 2019. 8. 12. 22:55

    고리백정(-白丁) 사위가 된 양반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위 제목에 나오는 고리백정유기장(柳器匠)’의 다른 말로서, ‘고리버들로 고리짝이이나 키 따위를 만들어 파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천민을 일컫는다. 그러한데 요즘으로 따져, 중앙부처에서 근무하던 양반 출신의 고급 관리가, 그 고리백정의 사위가 된 기막힌 사연이 있었으니... .

    때는 1504(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로 말미암아 교리(校理)’이장곤(李長坤;1474~1519)은 거제도로 유배가게 된다. 야사(野史)에 따르면, 그의 아내는 외모가 빼어났다고 한다. 그로 말미암아 처녀든 유부녀든 가리지 않던 연산군 눈에 들켜(?) 그만 빼앗겼다고 한다. 이에, 이장곤은 분을 못 삭이고 자기 아내를 단칼에 베었다는 거 아닌가. 단 하룻밤이 되었든 승은(承恩)을 입은 여인을 그렇듯 죽였으니, 갑자사화에다 가중처벌로 대역죄인.

    연산군은 이장곤이 거제도에 유배되었음에도 맘이 놓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장곤은 과거에 당당히 합격한 문신(文臣)이었음에도 기골이 장대하고 무예까지 갖추었던 터라, 무슨 일을 막 일으킬 듯했기에. 해서, 연산군은 병졸들을 풀어 그 누구든지 이장곤을 찾는 즉시 죽이라고 명한다.

    낌새를 챈 이장곤. 그는 함흥으로 도주하게 된다. 그가 신분을 감추고 은신처로 택한 곳은 천민계급인 고리백정들이 모여 사는 촌락. 때는 한여름 해질녘, 기진맥진한 이장곤은 우물가에서 물 긷는 류씨(柳氏) 처녀를 만나게 된다.

    처자, 나는 한양 사는 이선달이오. 과거에 내리 낙방하고 상심해서 무작정 유랑길에 나섰다오. 물 한 바가지를 얻어 마실 수 있겠소?”

    그 행색이 하도 초라해 보여, 처녀는 물 한 바가지를 떠서 그에게 공손히 건넨다. 그 물바가지에다 고리버들 잎사귀 한 장 띄워서. 처녀는 버들잎을 후후불어가며 천천히 마시라는 당부까지 하였다. 둘의 수작은 거기서 끝내지 않고, 오갈 데 없는 이장곤은 요즘 흔히 하는 말로, ‘(fill)까지 꽂혀처녀댁까지 저물녘에 찾아들게 된다. 유기장 즉 고리백정 류씨네였다.

    이장곤은 이리저리 둘러대고서는 그때부터 아예 그 댁 식솔이 되어 눌러살게 된다. 공짜밥을 줄 턱없는 처녀네 부모. 이런저런 일들을 이장곤에게 시켜보건만, 제대로 하는 게 없었다. 반거들충이인 그는 꽤나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다. 온갖 구박을 다 당한다. 그러나 처녀는 양친과 달리, 요리조리 이장곤 편을 잘도 들어 주었다. 이장곤과 류씨 처녀는 서서히 정분이 났고, 곡절 끝에 혼인을 하게 된다. 데릴사위가 된 셈이다.

    수년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못난이(?) 이 서방은 이번엔 웬일로 자기가 장인 대신 지게를 지고 가서 관가(官家)고리짝[柳器]’을 납품하고 오겠다고 나서게 된다. 까다롭기 그지없는 납품과정이건만, 자기가 거뜬히 해치우고 오겠다고 장담을 한다. 장인장모는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그들 딸은 신랑 편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어디 한 번 이 양반한테 맡겨 봅시다.”

    문지기들은 허름한 복장의 이 서방을 내쳤다. 그러함에도 이 서방은 기어이 관가에 들어섰다. 그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고리백정 사위, 교리 이장곤이 버들고리 받치러 왔소.”

    현령(縣令)은 그의 목소리를 금세 알아차렸다. 버선발로 쫓아왔다.

    여보게, 동문수학한 자네, 반가우이. 대체얼마만인가? 그렇잖아도 전하께서 자넬 찾으라고 조선 천지에 엄명을 내리셨다네. 당장 내일 의관을 정제하고 나와 함께 입궐하세나.”

    마침 그때 중종반정이 일어난 때였다.

    둘은 약조(約條)를 하였다. 이튿날 현령은 이장곤이 거처하는 댁으로 방문하기로.

    지게에 짊어지고 갔던 고리짝을 다 팔고 온 이 서방. 그는 전혀 내색치 않고, 마당을 싹싹 쓸어댔다. 영문도 모르고, 장인장모는 평소 아니 하던 사위의 행동거지에 놀라워하며, 내심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여겼다.

    이튿날, 약속대로 현령은 이장곤 처가에 행차했다.

    형수님, 그 동안 마음고생 심했겠어요. 그 동안 내조(內助)에 관해서는 이 벗을 통해 어제 다 들었어요.”

    이장곤의 장인장모는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이장곤은 자기 아내한테 곧 데리러 올 테니, 며칠 만 기다리라고 하고서 한양으로 향한다. 그는 곧바로 복직이 되었고, 중책을 맡아 눈코 뜰 사이 없이 정무(政務)를 보게 된다. 중종으로부터 두터운 신임까지 얻게 된다. 그런데 업무에 중독이 되어서인지, 아니면 ?

    한편, 함흥 처가의 식구들은 기다려도 기다려도 이 서방이 오지 않자, 류씨 부인은 자기 부친과 함께 길을 나서게 된다.

    궁궐 문지기들한테 부녀는 애걸복걸한다.

    함흥에 사는 유기장이오. 내 사위 이 서방을 만나러 왔소.”

    서방님을 뵈러 왔어요.”

    궁궐 문지기들은 부녀를 밀쳐냈다.

    저리 물렀거라. 예가 어디라고 감히 상것들이... .”

    관복을 입은 이장곤은, 직장 동료와 정사(政事)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궁권 뜰을 거닐다가, 장인과 아내가 문지기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걸 얼핏 보게 된다. 그러함에도 짐짓 못 본 척한다.

    참말로, 기가 막힐 일. 눈치를 챈 이장곤의 부인 류씨는 생떼 쓰는 자기 부친과 달리, 재치롭게 말을 돌려댄다. 혹시라도 남편한테 누가 될세라... .

    저는 예전에 저 이장곤 나리 댁의 여종이었어요. , 멀찌감치 얼굴을 본 것만으로 되었어요. 순순히 돌아갈 게요.”

    여러 벼슬을 거쳐 대사헌, 좌찬성에 올랐던 이장곤. 학문과 무예를 겸비하여 중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이 장곤. 그러나 그는 맘이 늘 편하지 않았다. 조강지처를 그렇게 헌신짝처럼 버렸다는 죄책감으로 인하여.

    그런 일이 있고 꽤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그는 주상전하께 나아가 그 동안의 사정을 다 고한 후, 모든 관직 다 버리고 백정의 사위로 온전히 돌아가도록 윤허해주십사 읍소(泣訴)를 하게 된다. 이에 중종은 한 바탕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자연, 조정은 백정의 딸을 양반의 정실부인으로 인정하느냐 마느냐로 한바탕 시끄러워지게 된다. 결국 중종이, 어려운 시절에 동고동락한 천민의 딸을 양반의 정식 아내로 인정하라는 명령을 내려 사건은 마무리된다. 이 사건은 당시 조선 전체가 들썩거렸던 백정의 딸 양씨 스캔들이었다니! 이장곤의 진심 덕분에, 부인 양씨는 정경부인이 되고 그의 처가 식구는 모두 천민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문득,‘조강지처고사 속 또 다른 인물이 겹쳐질 줄이야!

    그 고사는 이러하다. 후한(後漢)의 시조 광무제한테는 일찍이 남편을 잃고 홀로 사는 호양이라는 누님이 있었다. 그 과부 누님이 바로 송홍(宋弘)’ 대신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송홍은 처자가 있는 유부남이었다. 그러함에도 그 과부 누님은 송홍이 본부인과 이혼하고 자신과 결혼하게 해달라고 동생인 광무제에게 졸라대곤 했다.

    과부 누님이 하도 보채자, 광무제는 어느날 송홍을 조용히 불렀다. 그리고는 병풍 뒤에 누님을 숨겨두고 송홍에게 이렇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사람이 높아지고 부유해지면, 아내를 바꾸는 것도 흠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의 마음은 어떻소?”

    그러자 송홍이 이내 대답했다.

    전하, 예부터 가난할 때 사귄 친구를 잊어서는 아니 되며, 고생을 함께 한 아내를 버려선 아니 된다고 했습니다. 제가 이제 벼슬이 올라 부귀를 누린다고 해서 술지게미와 쌀겨를 함께 씹어 먹던 아내를 어찌 내칠 수가 있겠습니까?”[“빈천지교불가망 조강지처불하당(貧賤之交不可忘 糟糠之妻不下堂.”] - 출전 : <十八史略(십팔사략)>, <後漢書 宋弘傳)>

     

    하여간, 이 염량세태에 이장곤은 송홍과 더불어 우러러 뵈는 위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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