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무난로 앞에서(81)수필/신작 2020. 1. 7. 22:12
나무난로 앞에서
-여든 한 번째, 여든 두 번째 이야기-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81.
오늘은 저기 충북 괴산에서 부친 택배가 도착하였다. 이 택배 물건은 20kg은 족히 나갈 마대(麻袋)에 든 것으로, 개복숭 또는 돌복숭아로 부르는 과일의 씨앗이다. 지난 초가을, 대학 임학과 동기생이며 그곳 산림조합 간부인 친구한테 부탁했더니, 선물로 그렇게 부쳐온 것이다. 이미 그가 부치기 전 발아촉진을 위해 황산에 침지(浸漬)까지 하여 황산 내음이 진동한다.
나무난로 맞은편 접의자에 앉은 외손주녀석은 궁금해 하며 묻는다.
“한아버지, 어디다 쓰려고?”
해서, 녀석을 데리고 그늘진 감나무 아래로 그 복숭아씨앗 마대와 삽을 들고 나선다. 미리 준비해둔 모래더미. 그 모래흙을 파고 복숭아씨앗을 묻는다.
“으뜸아, 이렇게 하는 걸 ‘한데묻음[露天埋藏]’이라고 해. 복숭아 씨앗은 이렇게 해야 내년 봄에 싹이 터. 그냥 두면 딱딱한 껍질이 마르는 등 싹틔우기가 힘들어.”
녀석은 어제(이 연재물 79화에 소개된 내용 참조.) 농막 안 냉장고 냉동실에 보관하고 있는 발상추씨앗에 관한 내용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다.
“한아버지, 씨앗마다 저장하는 방법이 다 다르네. 상추씨는 냉동실에, 복숭아씨는 땅에.”
녀석은 이로써 제대로 알게 되었다.
사실 ‘노천매장법’은, 휴면성이 높고 경피(硬皮)이거나 발아율이 떨어지는 복숭아씨 ·호두씨·앵두씨 등에 행한다. 화살나무·이팝나무·때죽나무·산수유나무 등의 씨앗은 노천매장을 하되, 2년씩이나 행해야 한다.
일을 끝내고 조손(祖孫)은 다시 나무난롯가.
“으뜸아, 이번에는 이 할애비가 실패하지 않을 거야. 몇 해 전에는 그렇게 친구가 부쳐준 개복숭아씨를 봄날에 본밭에 심었다가, 콩나물처럼 올라오는 싹들을 새들이 다 쪼아가는 바람에 죄다 망쳐버렸거든. 때맞춰 농약을 치든지 아니면 아예 묘상(苗床)에서 제법 키워 본밭에 내다 심든지 할 거야.”
이 말을 듣던 녀석이 말한다.
“한아버지, 그렇게 많이 개복숭아를 키워서 어디에다 쓰려고?”
이에, 이 할애비는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으뜸아, 사실 이 만돌이농장의 과일나무들과 꽃나무들은 거의 다 이 할애비가 손수 접붙여 만든 거 아니니? 개복숭아나무는 복숭아·자두·매화·앵두 등의 바탕나무[臺木]로 쓰이거든.”
사실 봄마다 녀석은, 이 할애비가 접수(椄穗)와 접도(椄刀)와 비닐테이프를 들고 이곳저곳 나무 곁으로 가는 것을 자주 봐 온 터.
“ 이 할애비는 너랑 함께 이 산골짝을 아주 꽃동산으로 만들어버릴 요량이거든.”
이 말을 듣던 맞은편 접의자에 앉은 녀석은 그 작은 손으로 박수를 ‘짝짝’ 치며 환호한다.
“한아버지, 파팅(파이팅)!”
82.
나무난로 앞에서 불을 쬐던 조손은 전정가위를 들고 농장 이곳저곳을 누비며 과일나무 햇순들을 잘라 모은다. 단감나무·은율밤나무·대봉감나무·왕보리수·능수매화·운룡매화 등등.
“한아버지, 이번에는 이 나뭇가지들로 뭘 할 건데?”
이에, 할애비는 이따가 나무난로 곁으로 가서 찬찬히 일러주겠다고 한다.
다시 조손은 나무난로 앞. 난로 뚜껑 위에는 냄비가 얹혀 있고, 그 냄비 안에는 지난 해 쓰고 졸여진 ‘양초와 송진’ 혼합물이 있고, 그것은 다시 녹는다. 나는 그 혼합물을 들고 온 접수(椄穗)들 절단면에 일제히 적셔 코팅을 한다.
녀석은 송진내음에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신기해하는 표정이다.
“으뜸아, 이렇게 해야 나뭇가지 속 수분이 빠져 달아나지 않거든. ”
50여 센티씩 길이가 된 접수들. 나는 미리 준비해둔 신문지로 여러 겹 돌돌 말아 싼다. 그런 다음 노끈으로 질근 접수 다발을 묶는다.
밖은 다소 추우나, 굳이 녀석을 따르게 하여 농막 앞 밭가장자리로 삽을 들고 나선다. 적당한 깊이로 횡으로 구덩이를 파고 접수다발을 묻는다.
다시 조손은 나무난로 앞. 녀석은 이 할애비가 묻지도 않았건만, 혼잣말처럼 하고 있다.
“한아버지, 으뜸이는 이제야 알겠다. 상추씨는 냉동실에, 복숭아씨는 황(黃)에 담갔다가 그늘 모래흙에, 접을 할 가지는 신문지로 ‘이불을 씌워’ 밭에.”
이 할애비는 조금 전에 ‘이불을 씌워’라는 녀석의 말이 하도 기특하고 총명해서 설명을 더해준다.
“으뜸아, 네 말이 맞어. ‘이불을 씌워’ 따뜻한 흙속에 그것들 가지들을 잠재워 둔 거야. 그것들이 콜콜 겨울잠을 자는 동안, 몸을 바탕나무로 내어줄 나무들 가지에는 봄이 오고 물이 오를 거야. 참말로, 물이 오를 거야. 그때 쯤 가서 접을 붙이면 새로운 생명이 탄생할 거야. ”
이 말을 듣던 녀석은 대체 누구 새끼인지, 이런 말까지 다 한다.
“ 한아버지, 그라뭐(그러면) 오늘 잠재워 둔 나뭇가지들은 꼬마신랑들이네. 봄날 물 오른 색시를 꼭 안고 비닐테이프로 탱탱 감겨 한 몸체가 되면... .”
참말로, 나의 외손주는 맹랑한 녀석이다.
학습능력이(?) 뛰어난 녀석한테 덤으로 하나 더 알려준다.
“으뜸아, 그렇다면 나뭇가지의 겨울눈[冬芽] 하나는, 접[接]이나 꺾꽂이나 휘묻이를 통하여 또 새로운 나무를 만들어낼 수 있는 거 맞지?”
녀석이 맞장구친다.
“ 완죤(완전) 놀라운 나뭇가지의 겨울눈!”
나무난롯불이 사위어 간다. 또 다시 산골 외딴 농막엔 어둠이 손님처럼 찾아들고... .
(다음 호 계속)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한국디지털도서관 본인의 서재,
한국디지털도서관 윤근택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본인의 카페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수필 > 신작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무난로 앞에서(84) (0) 2020.01.11 나무난로 앞에서(81) (0) 2020.01.09 무 (0) 2020.01.07 나문난로 앞에서(79) (0) 2020.01.07 나무난로 앞에서(77) (0) 2019.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