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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87) - 그의 <무언가(無言歌)>는 49곡 -
    수필/음악 이야기 2022. 7. 15. 14:48

    집중이지요.

    '파고듦'이지요.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이지요.

    '체화'이지요.

    그리고

    사랑이지요.

    부디,

    아름다운 나날!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87) 

                                                              - 그의 <무언가(無言歌)>는 49곡 -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문득, 불가(佛家)에서 이르는‘묵언수행(默言修行)’을 떠올린다. 한편, 옛 잉글랜드 왕국의 사상가이며 기독교 성인(聖人)인 ‘토마스 모어’의 말도 떠올린다.

       “ 가장 깊은 감정은 언제나 침묵 속에 있다.”

       음악장르에서 말하는 ‘무언가, Lieder ohne worte, Song without word)’도 위에서 소개한 사항들과 그 뜻이 크게 다르지 않다.

       ‘무언가’란, ‘가사가 없는데도 마치 가사가 있는 것처럼, 작곡가의 감성을 그대로 품고 있는 아름답고 신비한 노래’를 일컫는다. 이 글의 주인공은, 당시 고작 나이 20세에 불과했음에도, 어찌 그러한 음악장르를, 과거와는 아주 다른 음악장르를 열고자 했을까. 그는 20세가 되던 해부터 무려 16년간 49곡의 ‘무언가’를 적었다. 마치 일생일대의 과업처럼. 그의 ‘무언가’는 그의 음악사적 위대한 업적들 가운데에서 하나로 꼽힌다.

       내 신실한 애독자님들께서는 한눈팔지 말고서 나의 문장을 끝까지 순순히(?) 따라오시길 바라며, 그의 정체를 아직은 밝힐 수 없다. 마치 ‘스무 소개’ 넘듯이.

       그는 자기가 태어난 1809년보다 18년 전에 57세로 생을 마감한 베토벤과 베토벤의 음악을 너무도 사랑했다고 한다. 해서, 베토벤의 ‘피아노를 위한 바가텔(bagatelle)’로 대표되는 ‘서정적 성격의 소품’이 후대에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정립되는 데 크게 보탬이 되기를 바라며, ‘무언가’ 작곡에 몰두하였다는 설(說)도 있다. 참, 위에서 말한 ‘바가텔’은 ‘사소한 것·하찮은 것·잡다한 것’ 등을 나타내는 말로서, 베토벤 자신이 작곡한 가벼운 피아노 소품에다 스스로 붙인 이름이다. ‘엘리제를 위하여(바가텔 25번)’ 등으로.

       이 농부 수필가가 집중탐구해본 바, 이 글의 주인공이 20세였던 1829년부터 ‘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던 게, 슈베르트가 31세 나이로 요절한 1828년 그 이듬해부터였다는 점. 이는 우연이 아닐 성싶다. ‘하이네’를 비롯한 당시 유명 시인들의 시에다 곡을 붙인 슈베르트. 그는 600~700편의 가곡을, 노랫말 붙인 음악을 작곡하였고, ‘가곡의 왕’이라 부르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 맥이 잠정 끊어진(?) 가곡의 빈자리를 이 글의 주인공이 꿰어 찼다는 추론도 가능하지 않은가. 그가, 이번에는 옛 사조(思潮)인 가곡에서 한발 더 나아가, “나는 가사가 없으나, 가사가 있는 듯한 피아노 독주곡을 작곡할 거야!” 새파랗게(?) 벼른 듯(벼린 듯)도 하고. 그는 제대로 시대를 읽은 셈. 이 점은 이 농부 수필가가 몇몇 날 인터넷 검색 등 자료를 챙기다가 알아낸 사항. 그 많은 음악 평론가들이 다들 이 점만은 놓친 듯. 그 많은 음악평론가들은 하나같이 전혀 그러한 시각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40 여년 수필작가 행세를 하면서, 나름대로 이처럼 날카로운(?) 시선을 갖게 된 듯.

       이 글의 주인공이 ‘무언가’를 한평생 과업으로 여기며 작곡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일부층의 전유물 정도로 여겨왔던 피아노 악기가 부르주아[bourgeois] 계급사회로 일반화되었다는 사실. 그들이 피아노 뚜껑을 열면, 이 글 주인공의 ‘무언가’ 악보가 놓이기 시작했단다. 많은 작곡가들이 자기 명성을 생각하여, 연주하기 어렵고 아주 기교적인 작곡을 했던 데 비해, 이 글의 주인공은 아마투어 피아노 연주자들도 접근하기 쉬운  ‘무언가’라는 이름의 곡을 적어댔으니... . 하여간, 작곡가였던 그의 혜안(慧眼)은 대단하였다.

       자, 내 신실한 애독자들께서는 여기까지 인내심 있게(?) 따라오셨으니, 이제부터는 ‘스타카토(staccato) 주법(奏法)’이어도 되겠다. 보너스다. 그가 바로 ‘행운아’라고 풀이되는 이름을 지녔던 ‘Felix(펠릭스, 1809~1837)’다. 유태인계 그의 조부는 철학자. 조부가 지어준 이름인 듯. 아버지는 당시 독일에서 최고로 잘 나가던 은행가. 어머니는 피아노 강사 겸 교사. 맏누이는 ‘Fanny(파니, 1805~1847)’. 누이 ‘파니’는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로 ‘펠릭스’와 죽이 척척 맞았으나, 그때는 “암탉이 울면 집구석 망한다.” 때문에 결혼 이후까지 선뜻 나서지도 못했던 터. 대신, 동생 ‘펠릭스’의 영원한(?) 후원자였으며, 동생 이름으로 작곡한 곡을 발표하기도 했단다. 20세 ‘펠릭스’는 스코틀랜드 방문 시 ‘핑갈의 동굴’을 보고서 편지로, “누나, 나‘히브리데스(핑갈의 동굴) 서곡’을 구상했어.” 편지를 적었던 이. 이따가 따로 이야기하겠지만, 이탈리아 베네치아(베니스)를 방문했다가,‘곤돌라(gondola,보트처럼 생긴 배)’ 가 유유히 떠다는 걸 보고서 영감을 얻었던 이. 그래서 다시금 누이한테 편지를 쓴다.

       “누나, 나 ‘베네치아 뱃노래 무언가’ 세 편 구상했다? 그 곡들은 내가 앞으로 빚을 그 많은 무언가들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내가 스스로 정한 표제음악이야. ‘베네치아 뱃노래’가 될 걸?”

       농부 수필가의 이야기는 ‘아 템포(a tempo, 본디 빠르기로)’다. ‘펠릭스(행운아) 멘델스존’. 그는 이름처럼 ‘행운아’였다. 유복한 이였기에, 그의 음악은 비교적 밝다. 특히, ‘무언가’ 시르즈물 49곡은 쾌활한 편이다. 그 가운데서도 인기 있는 두 곡을 살펴보자.

       ‘봄노래’.

       우리한테 너무도 익숙한 곡이다. 휴대전화 ‘컬러링’에도 쓰이는 음악. 겹쳐지는 음악도 있긴 하다. ‘왈츠의 왕’으로 일컬어지는 요한 스트라우스 2세(1825~1899)의  ‘봄의 소리 왈츠’. 두 곡 공히 새봄을 온몸으로 느끼게 하는 곡.

      ‘베네치아 뱃노래 3곡’.

       이들 세 곡도 농부 수필가의 고막(鼓膜)에 여음(餘音)으로 남은, ‘피아노의 시인’ ‘리차드 클레이더만’의 ‘베니스 여행’과 겹쳐질밖에. 정말로, 뉴에이지 피아니스트인  ‘리차드 클레이더만(1953~)’도 베네치아(베니스)를 그렇게 연주하였다.

       무언가, ‘펠릭스 멘델스존’이후에 동일 이름의 무언가는 무엇무엇? 차이코프스키(1840~1893)도 ‘무언가’를 작곡하였다. 그는 ‘멜로디 Op. 42-3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무언가’를 적었다. 사실 펠릭스 멘델스존 일생과 견주어 보면, 차이코프스키는 펠릭스가 이승을 하직한 후에 적은 것이다. ‘가브리엘 포레(1845~1924, 프랑스)’도 ‘세 개의 로망스’란 이름으로 ‘무언가’를 작곡하였다. 그이 또한 ‘무언가’  창시자인 ‘펠릭스 멘델스존’ 사후 8년 후에 태어난 음악인이다. 내가 이 글의 완성도를 높이고자 몇몇 날 ‘거듭듣기’ 해본 바, 가브리엘 포레의 ‘무언가’도 무척 감미롭다. 더욱이,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포레의 ‘무언가’ 연주를, 종종 앵콜로 연주하는 모양. 그의 부인인 영화배우 ‘윤정희’가 남편한테 졸라, 그 ‘무언가’를 자주자주 연주해달라고 했다는 에피소드도 있고.

       금세기에 들어와서는 뉴 에이지 피아니스트 ‘앙드레 가뇽(1936~, 캐나다)’도 ‘무언가’를 지어 연주하는데, 본디 그의 연주곡이 대체로 그러하지만, 그 음악은 다소 슬픈 기분.

     

       자, 내 글이 더 이상 길어지기 전에 마감을 해야할 텐데... . 이번에는 내 사랑하는 애독자들께 무슨 메시지를 남기면 좋을까. 번연하지 않은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그이는 날이 갈수록  ‘무언가’만 연주하고 있어요. 내 속 새까맣게 타는 줄도 모르고서요. 하지만요, 나의 그이가 아닌, 펠릭스 멘델스죤이 ‘무언가’의 창시자인 걸요. 짚이는 게 없어요? 역사는요, 일등만 기억해요. 금메달만 기억한다니까요. 오로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거. 그리고 그이를 한없이 사랑해요.’

     

       끝으로, 이 이야기는 더 보태야겠다. 음악적 동반자 겸 후원자였던 누이 ‘파니’가 42세 나이로 갑작스런 죽음으로써 ‘펠릭스 멘델스존’도 충격을 받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는 끝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는 갔다. 이승에서 누린 나이 38세.

       ‘ 밝고 아름다운 음악을 남기고 간 행운아, 펠릭스, 당신은 영원히 인류의 가슴 속에 밝은 표정으로 남을 것입니다. 부디, 명복을 누리소서.’

     

     

     

     

       작가의 말)

     

     

     

       그리고 이 글도 이 세상에 하나뿐인 님한테 바쳐요. 저한테 글 쓸 수밖에 없는, ‘동기(動機)’를 늘 주시는 분이시까요. ‘소리없는 깊은 강’처럼 모성애를 늘 실천해보이시는 님.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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