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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 수필가가 쓰는 미술 이야기(25)- 세 마디의 유언만 남긴 조각가 -수필/미술 이야기 2026. 3. 7. 15:58
농부 수필가가 쓰는 미술 이야기(25)
- 세 마디의 유언만 남긴 조각가 -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음악 칼럼니스트)
89세의 노인은 유언장에다 세 마디만 남겼다.
‘ 내 영혼은 하느님께, 나의 육신은 대지에, 그리운 내 도구들은 고향으로.’
그는 미완성작 <론다니니 피에타> 조각상을 숨을 거두기까지 손질하고 하고 있었다. 젊은 날과 달리, 근육과 실핏줄이 선명한 예수님의 팔과 다리를, 외려 정으로 깎아내어버리고서 성모님 품에 안긴 것인지, 자신이 모친을 업고 있는 것이지 추상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러면서 혼잣말을 나직 하였다.
‘나는 아직도 배우고 있다.’
미술평론가들 가운데에는 그가 육체는 죽음을 맞이하여 그 껍데기를 벗고, 그 영혼만을 대리석 속에 남겨 두려했던 것은 아닐까 해석하는 이도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그렇게 허물고서, 신을 향한 간절한 기도를 했던 것은 아닐까하면서까지. 그렇다면 유한한 예술가가 그 완성만은 신의 영역만으로 남겨놓으려 애쓴 흔적으로도 볼 수도 있다.
사실 나는 몇몇 날 ‘유튜브’ ‘오디오 북’과 인터넷 서핑 등을 통해 그의 생애에 관한 사항을, A4용지 20매가량 메모해가면서 공부하였다. 그의 생애 89년을 더듬기에는 너무도 부끄럽지만... . 덕분에, 그가 태어났을 적부터 유년기, 소년기, 장년기... 말년에 이르기까지 조각가로서 그가 겪었던 일들을‘좔좔’ 꿰게 되었다. 하더라도, 웬만한 사항은 내 신실한 애독자님들께서도 아 아실 테니, 그의 인생의 굽이굽이에서 인생지침을 바꾼, 굵직굵직한 몇 개 사건만(?) 더듬기로 한다.
가) 그는 숙명적으로 조가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1475. 3. 6.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험준한 ‘카프레세’라는 곳에서 쇠락한 명문가 첫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모친은 몸이 허약하여, 아이한테 첫 모유도 못 빨릴 지경이었다. 그러자 그의 부친은 채석장이 있는 마을, ‘세티냐노’라는 곳 유모한테 아이를 맡긴다. 유모의 남편도 석공이었고, 유모 자신도 석공의 딸이었다. 그 어린것이 유모의 젖과 채석장 가루를 마시며 자라나게 된다. 그분은 후일 친구한테 쓴 편지에도 그러한 내용의 편지를 적었다. 눈만 뜨면 보이는 채석장의 광경들. 꼬맹이는 석공들의 정 소리를 들으며, 그 암석 속에서 용이 나타나고, 영웅이 나오고 때로는 기둥이 나오는 등 광경을 신비스럽게 봤다. 뇌리에 각인이 되었을 터. 석공들도 양지쪽에서 턱을 괴고 유심히 사물을 관찰하는 그 꼬맹이를 얼마나 이쁘게 여겼을까.
나) 모친의 죽음으로 인한 상처와 상실감 맛보다
그는 6세가 되던 해, 병약했던 모친이 세상을 뜨자, 고향집으로 가게 된다. 싸늘하고 도톰한 모친의 볼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며 한없이 울었을 것이다. 그리움과 생명가진 이의 유한함 등이 겹쳐, 싸늘한 대리석이 오히려 형상을 띠고 영속성을 지녔다고 여겼을 것은 뻔하다. 그 어린나이에 이미.
그의 학교생활은 아주 엉망이었다. 공부시간에 진도를 따라가지 않고, 공책과 교과서 여백에다 그림그리기만 하였다. 그러자 선생님은 부형 호출상담도(?) 수차례 하였다. 그러했음에도 고쳐지지 않았다.
그는 부친과 삼촌으로부터 회초리 맞는 아이가 되어버린다.
“이 놈의 자식, 하라는 공부는 아니 하고, 그깟 천한 환쟁이나 돌쟁이가 되려고 하냐? 우리 가문이 어떤 가문인데... .”
다) 천만원군을 만나다
13세가 되던 해. 그는 자기보다 6살 위이지만, 친구로 지내며 당시 피렌체에서 제일 잘 나가는 화가 겸 금세공업자 ‘가를란다요’공방(工房)의 도공을 알고부터다. 그의 친구는 수시로 자기 스승의 스케치를 들고 와서 건네주곤 하였다.
“있지, 오늘은 스승님께서 이걸 스케치했어.”
이 글 주인공은 친구를 따라 그 공방에 가서 견습생으로 받아주길 청했다. 그는 성사가 되어, 드물게 급여를 받으며, 1년여 그곳에서 지낸다. 한번은 독일 판화가 ‘숀 가우어’의 작품에다 채색을 하여 스승을 깜짝 놀라게 한 일이 있다. 그는 어느 날 피렌체 시장에 나가게 된다. 거기피렌체 시장에서 가판대에 놓인 생선의 비릿한 내음과 생선고기의 반짝이는 눈알과 붉은색이면서도 푸른색을 띤 지느러미를 관찰한 이후에 이뤄진 일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스승이 스케치하여 강의자료로 보여주는 여인의 모습을 보고서 대실망하게 된다. 건방스레(?), 애송이가 말을 하게 된다. 그리고 덧칠까지 하고 만다.
“선생님, 이 여인의 목선은 이렇게 굵게 그려야 좋을 텐데요. ”
그는 스승의 수준이 영 아니다싶어, 그길로 1년 만에 그 공방을 나와서 고향집으로 가고 만다. 사실 그때 그 스승도 혼잣말을 했단다.
‘얘는 내 밑에 둘 아이가 아니야! 빼어난 아이야!’
라) 조각가로서 제대로 임자를 만나다
그가 14세가 되던 해. 당시 피렌체를 지배하던 군주, ‘로렌초 데 메디치’가 ‘산 마르코 광장’에 ‘비밀의 조각공원’을 조성했다는 것을 알게 된 그. 그는 그곳으로 가서, 정원지기한테 마당을 쓸거나 허드렛일을 할 테니, 이 많은 고대 로마의 조각상과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 맘껏만져보도록 허락해달라고. 그리하여 받아들여졌다.
그는 대리석 하나를 주워다가 <늙은 목신> 모사(模寫)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 <늙은 목신>은 반은 사람, 반은 염소인 조각품이었다. 며칠 동안 그는 그 조각상을 모사하고 있었다. 그 젖먹이시절 채석장에서 본 것이 밑천이었던 셈. 며칠 후 그 조각공원 주인이자 피렌체 군주인 ‘로렌초 데 메디치’가 그곳을 지나다가 그 소년의 어깨에다 다정스레 손을 올리고 말했다.
“너, 진짜 조각을 잘 하는군. 바윗돌에다 영혼을 불어넣는 것 같애. 그런데 말이야, 늙은 목신이면 이빨도 한, 두 개 빠져 있어야지 않아?”
그 말은 농담이었지만, 날카로운 비평이기도 하였다. 그는 그 충고를 허투루 듣지 않았다.
다시금 그곳을 지나가던 ‘로렌초 데 메디치’가 소년한테 말했다.
“너 말이야, 네 아버지를 한 번 만나봐야겠어. 이리 오시라고 해.”
그의 부친은 ‘로렌초 데 메디치’가 위세도 있고 해서, 그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길로 그는 졸지에 ‘로렌초 데 메디치’궁전에 들어가게 된다.
‘로렌초 데 메디치’는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
‘ 이 소년이야말로 피렌체, 아니 로마의 희망이야! 이 소년이야말로 르네상스 조각예술을 이끌 것 같애!’
그는, 저녁이면 많은 유명인들이 모여 토론하고 담소 나누는 식탁을 사이에 두고, 방구석에앉아 그들로부터 엿듣게 된다. 그것이 그이한테는 학교였다. 특히, 그 저녁모임에 나타난 플라톤아카데미 수장, ‘피치노 마르실리오’의 말은 그가 죽는 그날까지 간직했던 예술에 관한 신념이 되었다.
“ 예술가는 단순히 돌을 깎는 기술자가 아니오. 거친 물질에서 신성한 이데아를 해방시키는 일이라오. 육체는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기도 하지만, 영혼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그릇이라오.”
그는 그 철학자의 말을 죽는 그날까지 신봉하고, 실천하였다.
그는 그곳 ‘로렌초 데 메디치’궁전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고, 끝까지 그렇게 지낼 줄 알았다. 철학, 시, 과학 등에 관해 틈틈이 밤마다 공부하였고, 낮 동안에는 정과 끌과 망치를 잡고 조각에 적용하곤 하였다. 그런데 그 행복도 잠시. 후원자 겸 스승 겸 아버지 겸 세상의 모든 의미였던 ‘로렌초 데 메디치’가 43세 나이로 세상을 뜨자, 그는 또다시 천애 고아가(?) 되어, 낙향하게 된다.
그때가 1492년. 그의 나이 고작 20세.
마) ‘피에타(Pieta)’, 피에타, 피에타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경외’·‘연민’·‘슬픔’·‘비탄’등을 두루 일컫는다. 대체로, 성모 마리아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진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당신 무릎에 누이고 비탄에 빠진 그 광경을 일컬을 때 주로 쓰는 말이다.
그가 24세가 되던 1499년 6월. ‘장드 ?’ 추기경이 당신 사후에 영묘에 전시할 작품을 의뢰하여 작업하기 시작하여 3년 여 걸려 완성했다고 한다. 미술에 관한 한 문외한인 내가 더 많은 이야기하기에는 과분하다. 단, 그 한 작품 완성을 위해 3년여 걸렸다는 점 경의를 표할밖에. 사실 나도 40여 년간 대한민국의 수필작가 행세를 해오지만, 부끄럽게도, 한 작품에 그렇게 전력투구한 적도 없다. 해서, 내 젊은 날 선배 수필가님한테 고백한 적도 있다.
“정 진권 박사님(지금은 고인 되셨다.), 솔직히 조각가들이야말로 진정한 예술가들이지요? 정으로 자칫 잘못 쪼다가 깨지면, 그길로 끝이잖아요! 여타 장르의 예술작품이야 죽는 그날까지 고치고 고치고를 거듭하면 되니, 조각에 비하면 한참 아래이지 않습니까?”
그때 그분도 내 말에 동의를 하였으며, 탄식을 하였다. 하기야,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국의 ‘헤밍웨이’는 <바다와 노인> 원고를 87회나 교정했던 데 비추어 보더라도, 조각만이 최상급의 예술장르임이 분명타.
몇몇 날 이 글을 적기 위해 밤잠 아니 자고 취재를 하였지만, 더 늦기 전에 애독자님들께 고백하노니, 89년 동안 망치와 정과 붓을 들고 온몸 다 망가질 지경으로 창작활동한 이 글 주인공한테 경의를 표해야겠다. <피에타>의 조각이 실물 같다느니, 비애미와 숭고미를 느끼게 한다느니 등은 별개사항이다. 나는 이 글 소재 취재하는 동안 내내 뜨거운 눈물만 흘렸다.
이 글 주인공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돌 속에 갇힌 천사를 보았고, 그가 자유로워질 때까지 돌을 깎았다.”
진짜로, 말년에 온몸이 망기질 대로 망가진 그 노(老) 화가께 엎디어 경배드린다.
그분이 바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5~1564(향년 89세), 이탈리아)’다.
작가의 말)
이 글도 나의 에너자이저인 뮤즈한테 공손히 바칩니다. 어제부터 내내 두 볼에 눈물 흘러내려 글이 제대로 아니 되어요. 나머지는 제자이길 자처한 그대께서 채워서 적어주소서. 제자 덕도 이처럼 못 본단 말이오?
정말, 나는요, ‘미켈란젤로’나 ‘레오 나르도 다 빈치’만치 고통스럽게 예술활동할 에너지가 더는 없으니까요. 나름대로 에너지 고갈 상태인 걸요.
나의 뮤즈한테 부친 이 메일 내용도 덧붙인다.
윤쌤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 나리자' 초상화,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조각상두 편 적고난 다음 퍼뜩 떠오르는 게있어요.두 분 공히 모성애 그리움이 한껏 묻어나는작품 만들었다는 생각.다 빈치는 사생아로서 생모와 생이별,미켈란젤로는 유모한테 가서 길러지다가여섯 살이 되었을 때 생모와 사별.특히, 피에타는 성모님과 예수님이기도하지만,엄마 품에 안긴 미켈란젤로자신일 수도 있겠단 생각.하오니,그대가 위 사항 더 추가해보시든지먼 뒷날 윤쌤의 위 글에 관해 평을 해보시든지.나아가서,슬이 품에 안긴 니니까지 상상해보시어도 괜찮겠는데요.* 이 글은 본인의 티스토리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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