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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따로 있다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나는 올해 참깨농사만은 제법 늑장을 부리고 있다. 이웃들은 하나같이 서둘러 참깨를 파종하였으며, 그들의 본밭 참깨모들은 이미 제법 자라, 얼마 아니 있어 꽃을 피울 텐데, 나는 여태 파종도 아니 한 상태다. 나름대로 여러 해 참깨농사 실패 경험을 토대로, 꾀를 부리는 중이다. 오는 6월 25일부터 이토록 지루한 가뭄이 끝나고 제주도부터 장마가 온다고 하니, 6월 25일께 본밭에다 직파(直播)하되, 착암기같이 생겨먹은 만능파종기(萬能播種機)를 빌려다가 잠시잠깐 비닐피복된 밭이랑을 쿡쿡 찔러나갈 것이다. 일기예보를 아침저녁으로 들어, 내일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관의 말이 떨어지면 즉시 행할 것이다.
사실 이랑짓기는 올해 따로 하지 않았다. 내가 참깨를 심을 밭은, 지난 해 고추를 심었던 밭이다. 서로 돌려짓기[輪作]를 하기 위해 멀칭비닐을 깔되, 올해 참깨농사와 들깨농사를 할 요량으로 한 값 더 주고 여느 멀칭비닐보다 두꺼운 멀칭비닐을 사다 깔았다. 1년이 아닌 2년 연속사용을 위해 그렇게 꾀를 낸 것이다. 한편, 나는 지난 해 늦가을에 그 밭에 섰던 고추 그루터기를 전정가위와 커터(cutter)로 비교적 조심스레 베서 모아 불살랐다. 그리하여 지난 해 한번 썼던 멀칭비닐은 제법 멀쩡하고, 이랑도 거의 그대로다. 그렇게 하고서도 못미더워 장마가 오기 전에 그 밭에다 전멸제초제를 한, 두 차례 살포함으로써 말짱하게 해 두었다. 특히, 장마철은 그 몸서리나는 잡초인 ‘바랭이풀’이 활개를 치는 편이다. 해서, 그 녀석들을 실기(失機)치 않고 그렇게 초기진압한 것이다. 이는 나름대로 터득한 생력농법(省力農法; 일손 덜기 농법)이기도 하다. 나는 거기서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참깨를 벤 후에는 그 자리에다 김장배추·김장무를 갈되, 또 그 멀칭비닐을 크게 훼손치 않고서 할 것이다. 고추농사에 이어 참깨농사, 참깨농사에 이어 김장배추재배는 그렇게 하여도 만판이다.사실 농부들 간에는 참깨농사에 이어 김장배추 재배를 같은 자리에, 비닐피복을 벗기지 않고 그렇게 하는 게 하나의 공식이다. 관행이다.
내가 참깨농사에 여태 늑장 아닌 늑장을 부린 이유가 따로 있다. 우선, 파종기 내지 발아기(發芽期)에 겪게 될 가뭄을 피하고자 함이었다. 다음은, 열대건조성 작물인 참깨의 성질을 누구 못지않게 알기 때문이다. 제주도 속담에 이런 게 있다. ‘참깨는 고팡(곳간)에 들어와야 내 것이다.’라는 말. 참깨는 일단 싹 틔울 적에는 물을 좋아하지만, 그 이후 맞게 되는 생육기간 내내 물을 몹시 꺼리는 작물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생육기간 중에 장마가 겹치는 등 하면 생육에 지장이 있고 병충(病蟲)의 피해도 곧잘 보게 된다. 나아가서, 참깨 대궁을 쪄서 말릴라치면, 장맛비가 그 벌어진 참깨 꼬투리에 고여 참깨알이 썩는 예도 많았다. 해서, 농부들은 대체로 가뭄이 심한 해에는 참깨농사가 풍년일 거라고 예견하는 게 상례(常例)다. 우리 쪽에도 위 제주도 속담과 비슷한 말이 있다. 바로 ‘참깨농사는 자루에 담은 후 자랑해라.’는 말. 이 말 속에는 참깨는 농사짓기에 꽤나 까다롭다는 의미도 녹아 있다.
사실 나는 지난해에 세 뙈기의 밭에다 연면적 600여 평의 참깨농사도 하였으나, 수확량은 영 엉망이었다. 오죽 했으면,참깨를 털고 손질하던 아내가 더는 참깨농사하지 말고 모조리 들깨농사를 하라고 볼멘소리를 했겠는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올해 다시 미련스레 참깨농사를 하고자 한다. 저 아랫녘에 사는 내 또래의 어느 농부한테서 귀중한 정보를 얻은 바 있어, 새롭게 도전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가 말했다.
“나는 집집이 참깨꽃이 필 즈음, 그때 가서 참깨씨를 넣곤 하는 걸! 장마철을 피해 그렇게 해보니, 해마다 남들보다 소출이 많더라는 거 아닌감?”
모든 일에는 이처럼 순서가 있고, 때가 따로 있는 법. 참깨농사라 하여 예외일 수는 없다. 농촌진흥청 등에 근무하는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참깨의 파종적기는 1모작 기준으로 4월 하순~ 5월 하순이라고 한다. 전남과 경남은 4월 하순~ 5월 상순. 너무 일러도 일조량이니 생육에 따른 적산온도(積算溫度)니 하는 문제 따위로 곤란하다고 한다. 그러나 너무 파종기를 늦추어 잡아도 문제가 된다. 서리가 내리는 등 열매의 등숙(橙熟) 내지 완숙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참깨 파종의 한계일은 6월 25일 전후라고 알려져 있다. 마침 잘 되었다. 6월 25일부터 제주도부터 장마가 올라온다고 했으니, 절묘하게 내 농사일정과 맞아떨어질 듯도 한데... . 하지만, 약간은 기대하되, ‘(고기) 잡지도 않고 마리 반’이라고 하거나, ‘자루에 담아보지도 않고 한 말[斗]’이라고 하지는 않겠다.
내 신실한 독자님들께 다시 기억을 환기코자 말한다. 모든 일에는 때가 따로 있다. 농사에도 때가 따로 있다. 그 많은 농사 속담에도 때와 관련된 것들이 부지기수다. 참깨농사에도 예외가 있을 리 없다. 참말로,때가 따로 있다. 거기다가, 일의 순서도 꽤나 중요하다. 밭 장만- 잡초제거-파종- 물주기- 보살피기- 병충방제하기- 베기-말리기 -털기 -선별 등 일련의 공정이 따로 있다. 이러한 공정 하나하나도 제때에 이루어져야만 소출을 제대로 얻게 된다는 사실. 특히, 이 공정들 가운데서도 ‘잡초제거’는 무척 중요하다. 미리 전멸제초제를 뿌려 밭을 말짱하게 한 후에 파종함이 좋다. 그렇잖으면, 장차 장맛비를 맞아 활개를 칠 바랭이풀을 감당치 못하고 속된 말로 ‘앞발 뒷발 다 들고 마는’ 불상사가 따른다. 우리네는 이러한 제반의 상식 내지 지식을 오랜 현장경험에서 얻게 된다. 그러한데 그러한데... . 그 누구라고 더 이상 내 신실한 독자님들께 고자질할(?) 수는 없으나, 내 밭이웃들 가운데 두엇은 숫제 그 똥고집이 숫제 벽창우(碧昌牛)이다. 그들도 벌써 여러 해 농사를 혼잡처럼 저지레처럼 짓고 있으면서도 일의 순서를 여태 지키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하는 게 다반사다.
“성님, 6월 25일부터 장마가 시작된다는데요, 고추밭에다 지주를 더 박는 게 좋겠는데요? 밭이 물에 잠기지 않도록 도구(물곬)도 더 깊이 내심이? 그리고 맑은 날 골라서 밭이랑이 아닌 밭고랑에다 미리 바랭풀 잡는 제초제 살포하심이? ”
그들은 남의 말을 도무지 귀담아 들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때와 순서를 놓치거나 바꾸거나 하면 아주 난감한 일이 발생한다는 거. 실은, 동서고금 때와 관련된 여러 비유를 있다. 굳이, 낱낱이 열거할 필요도 없을 터. 대신, 내 사랑하는 독자님들께 그 많은 농사 속담 가운데 때와 관련된 속담 몇 개를 소개하면서 이 글 맺도록 하겠다.
‘메뚜기도 여름이 한철이다.’, ‘메밀꽃 필 때에는 동서집에 가지마라.’, ‘오뉴월 손님은 호랑이보다 무섭다.’, ‘찔레꽃 필 때에는 딸집에 가지마라.’, ‘오뉴월 감꽃 필 때에는 친척집에 가지마라.’ 등.
요컨대, 그 속담들은 하나같이, 일손을 돕는다는 등의 미명(美名)으로 바쁜 일철에 전혀 도움 아니 되니, 농가(農家)에 불쑥불쑥 찾아가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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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한국디지털도서관 본인의 서재,
한국디지털도서관 윤근택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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